소설리스트

학사재생-319화 (319/373)

학사재생 319화

제 319화

옅은 웃음을 지은 우마왕이 태연하게 말했다.

“응……?”

“힘드니까 업어달라고.”

“……거력왕이라며.”

“그건 옛날이야기고. 넌 내가 몇 살인 줄 아니?”

“딱히 거기까지는 관심 없는데.”

“재미는 있는데 친절하지는 못하구나. 매력이 있는 듯, 없는 듯.”

“장난칠 생각 없어.”

“진짜 안 업어주려고?”

“발이 없진 않잖아. 여기까지 내려오기도 했고.”

“실망.”

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 우마왕이 웃음을 보였다.

“뭐, 그래도 고마워. 덕분에 일족들이 많이 죽지 않았어.”

“일행들은?”

고마움의 인사라면 이미 충분히 들었다.

거력왕이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묘하게 나른한 우마왕의 시선을 피한 황준우가 말을 돌렸다.

“제일 꼭대기에. 동생? 예쁘더라.”

“우리 집안 자랑이지.”

“너는?”

“나도 자랑이고.”

“그게 뭐야. 누가 더 자랑인데?”

“우리 부모님은 그런 것 안 따져.”

“흐음…….”

둘은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계단을 오른다.

“유계는 처음이지?”

“당연하지.”

“어때?”

“황폐하더군. 생각보다 요괴도 많고.”

“요즘에는 난리니까. 본래에는 이렇게 많지 않았어.”

“그랬겠지.”

“흠, 나한테 궁금한 건 없어?”

“있긴 한데. 우선 일행들부터 보고.”

“흐으음.”

더욱 긴 신음을 흘린 우마왕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꼭대기까지는 멀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미리 할 수 있는 시간이잖아.”

“그러려나.”

“어차피 대답도 꼬박꼬박할 거잖아. 말하기 귀찮은 것도 아니고.”

“좋아, 그러면 첫째. 일행들은 몇 명이나 왔어?”

“셋. 네 동생, 그리고 어린 노인, 마지막으로 백택.”

우마왕의 표현 중 재미있는 것은 서문지언에 관련된 것이었다.

“어린 노인?”

“그렇잖아. 고작 백수도 안 산 주제에 팍 늙어서는. 오랜만에 본 인간이라 그런가. 신기하더라고. 후후.”

“인간은 원래 다 그래.”

“넌 아닐걸?”

“…….”

처음으로 황준우의 입이 닫혔다.

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우마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음을 보였다.

“억지로 부정하려 하지 마. 신은 신이야.”

“부정이 아니야. 신도, 인간도 모두 인정하고 있어.”

“딱히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됐고. 다들 다친 곳은?”

“없지. 여기를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야.”

“방금 전까지 전장 한복판이었지.”

“어머, 그랬지. 참. 호호.”

입가를 가리며 가증스럽게 웃는 우마왕을 곁눈질로 바라본 황준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 소가 아니라 여우 같은데…….”

“아쉽게도 우마 일족 맞아. 마호(魔狐) 일족이랑 비교는 너무하잖아.”

“마호 일족이라…….”

어째서인지 달기가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그 녀석들이 조금 도와줬다면 전쟁이 훨씬 수월했을 텐데…….”

“적이 되었나 보지?”

아까 전 보았던 적의 병력에 섞여 있던 몇몇 여우 요괴를 떠올린 황준우가 물었다.

“전부는 아니고. 일부가. 욕심 많은 녀석들이라 제멋대로 일족을 뛰쳐나온 거지. 다스릴 마왕이 없는 상황이라 더 엉망이야.”

“원래는 마왕이 있었단 거네?”

“그렇지.”

“달기?”

“맞아. 그년을 알아?”

“말하는 게 어찌 곱지 않아 보이는데.”

“여우 같은 계집애를 좋아할 마왕이 어디 있겠어?”

“자신을 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어?”

“말했지만 난 우마 일족이야. 그중에서도 왕. 이보다 더한 정체성이 어디 있을까. 호호.”

계단은 우마왕의 말만큼 길지는 않았다.

어느덧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끝이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걸음이 너무 느렸다.

“조금 빨리 걸으면 안 될까?”

황준우의 질문에 우마왕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힘들어서 불가능. 그러니까 업어 달래도.”

“천하의 거력왕이 너무 앓는 소리 하는 것 아니야.”

“그러게. 그 넘치던 힘이 어디 갔을까.”

짙은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향해 황준우가 참고 있던 질문을 건넸다.

“너…… 어디가 안 좋구나?”

“그러면 멀쩡해 보여?”

“적어도 겉으로는.”

“그것참 영광이나.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한 덕은 있었어. 호호.”

“…….”

“궁금하면 직접 봐. 너, 굉장한 권능도 하나 가지고 있잖아. 신안(神眼).”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멈추고 황준우 쪽으로 돌아서 양팔을 벌린 우마왕이 웃으며 말한다.

“황금안이 권능?”

“그러면, 천 리를 한눈에 보고, 상대의 모든 걸 꿰뚫는 그 눈이 평범하다고 생각한 거니?”

“그냥 술법의 일종처럼 펼친 건데…….”

“무신이라 불리더니, 진짜 무에 관련된 것만 권능인 줄 아는 거니. 쿡쿡. 네 가장 강한 권능은 바로 그 눈이야.”

“권능…….”

인식을 한 순간, 확실히 술법이라 느껴지던 황금안의 성질이 다르게 보였다.

마음속으로 술법 술식을 외우고 펼쳤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다.

황금안은 그야말로 권능.

또한 우마왕의 말대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신안이다.

눈을 한 번 깜빡인 이후, 황금빛으로 물든 황준우의 시선이 우마왕을 훑었다.

동시에 황준우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너……!”

“엄청나지? 호호.”

옷자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텅 비어버린 배의 중심을 제 손으로 살짝 가린 우마왕이 물었다.

“대체…… 그러고도 살아있다고?”

“보다시피. 죽을 정도로 힘들지만.”

황준우의 황금안이 점점 더 강한 빛을 흩뿌린다.

문제가 있는 것은 텅 비어버린 복부.

그녀의 육체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영혼 자체에 거대한 상흔이 생겼다.

우마왕이라는 거대한 그릇에 담겨 있던 선천기가 큰 데다, 스스로 계속해서 기운을 충족하고 있는 덕에 아직 버티고 있었지만, 영혼 자체가 밑 빠진 독과 다름이 없는 상태인 셈.

이 상태라면 결국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고 영혼 자체가 완전히 붕괴할 것이다.

그 과정은 곧, 영멸로 이르는 길이었다.

“남한테 이런 모습을 직접 보인 건 처음이야. 부끄러운걸.”

“우마왕…….”

황준우의 목소리에 동정이 깃들었다.

그를 느낀 것일까?

우마왕의 표정이 이전에 비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동정은 사양할게. 난 강자와 싸웠고, 패배했어. 그 탓에 이런 상처를 입게 되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

“…….”

“우마 일족은 유계, 금오도를 통틀어 가장 강해. 그 근간에는 강인한 정신이 있어. 우린 결코 패배를 외면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도 지금까지 그랬듯 당당히 날 봐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할게.”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야 표정을 푼 우마왕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어렸다.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네게 이 상처를 보인 것은 이유가 있어.”

본론이다.

황준우는 우마왕이 어째서 홀로 자신을 마중 나왔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앞에 나누었던 많은 대화는 그야말로 마음의 준비다.

정상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이 시점.

그녀는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를 공개하면서 드디어 자신이 본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이 상처는 너와 같은 인간에게 당한 거야.”

천하에 산재한 종족.

그 가능성은 다양하다.

방면을 가리지 않고, 각자의 개성에 따라 나아간다.

한계 또한 없다.

하나 그 벽을 넘는 인물은 극소수다.

그리고 눈앞의 우마왕이 가진 그릇은, 결코 벽을 넘어서지 않고는 뛰어넘을 수 없는 수준이다.

우마왕이 완전히 정상인 상태를 가정한다면, 황준우조차도 전력을 다해야지만 승부를 장담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데 그런 우마왕에게 황준우가 아닌 인간이 큰 상처를 입혔다.

의문이 순식간에 범람했다.

“어떻게…… 인간이 유계에?”

“재미있지? 그는 인간 중 유일하게 유계와 인간계를 제멋대로 오갈 수 있어. 아, 멋대로는 아닌가. 죽음을 대가로 바치니까 말이야.”

“무슨 말이야?”

정신이 더욱 혼탁해졌다.

지금 우마왕이 하는 말은 황준우로서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었다.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 봐. 그러니까……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쯤이었어. 그때는 우스웠지. 힘없고 어린 인간이 유계 최강이라 불리는 내게 도전장을 내민 거니까. 참고로 간단히 이겼어. 애초에 크게 신경 쓸 녀석도 아니었으니까, 영멸까지는 안 시켰지. 그 이후로 오십 년쯤 지났나.”

과거를 회상하는 우마왕의 입가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놈이 다시 왔어. 제법 더 강해졌지만 여전히 의미가 없었지. 이때는 번거로워서 놈을 영멸시켰어.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오는지 짜증이 났으니까. 그리고 팔십 년이 더 지나고…… 다시 놈이 나를 찾아왔어.”

“뭐? 방금 영멸시켰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생각했지. 실제로, 놈은 내가 기억하던 모습과 완전히 달랐어. 생김새도, 기운도. 하지만 놈은 명확히 나를 알고 있고, 그때를 기억하더라고. 그리고 다시 내게 도전했고, 또 영멸당했지.”

“잠깐.”

황준우가 재빨리 우마왕의 말을 끊었다.

이해가 되지 않던 그녀의 이야기가 빠르게 머릿속에 정립이 되고 있었다.

때문에 더욱 큰 혼란이 생기고 있는 것이었다.

비록 유계를 거친다는 과정이 없지만, 황준우 역시 그와 비슷한 입장 아니던가?

“그러니까…… 그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거야? 모든 기억과 경험을 가진 채로?”

“그렇지. 녀석은 자신을 음…… 그래. 전생자(轉生者)라고 부르더군.”

“전생자!”

커다란 외침을 토한 황준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정신이 아찔했다.

그보다 자신을 정의하기 쉬운 단어가 어디 있을까.

‘나 혼자만이 아니었어.’

또 있었다.

심지어 한 번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자는 네게 몇 번이나 도전했지?”

“총…… 스무 번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정도 될 거야.”

“그때마다 다른 모습, 다른 기운을 가진 상태였고?”

“처음과 두 번째를 제외하고는 모두 같았지. 놈은 인간계에서 자신의 경험을 축적하고, 더 강해진 다음 죽게 되면 내게 도전했어. 그리고 영멸을 통해 다시 환생했지. 아, 생각해보니 내가 놈을 정말 영멸시킨 게 맞나 싶기도 해. 영혼이 사라져서 그렇게 느낀 것일 수도 있지.”

“영멸을 당해도 돌아온다면, 정말 끔찍한데.”

확실하다.

그는 황준우와 같이 모든 기억을 가진 채로 다음 삶으로 넘어간다.

오히려 황준우보다도 더 먼 과거부터 같은 일을 겪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영혼은 유계를 거친다는 것이다.

“무슨 방법을 알았으면 내가 이 꼴이 되지는 않았겠지. 무지하게 귀찮은 녀석이거든. 아, 맞아. 놈이 자신이 활동하기 편하려고 지상에도 무슨 세력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지상에?”

“포달랍궁이라고 했나.”

“포달랍궁!”

서장 사막의 지배자라 불릴 정도의 세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중원 진출을 노리지 않은 유일무이한 세력이다.

그 내부는 비밀스러웠으며, 그다지 알려진 것도 없다.

어떠한 호사가는 중원무공의 기원도 그로부터 발전되었다는 이야기도 종종 하고는 했다.

지금 우마왕의 이야기대로라면 영 신빙성이 없는 말도 아니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