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320화 (320/373)

학사재생 320화

제 320화

“그러고 보니 포달랍 궁의 가장 큰 스승은 기억을 가진 채로 끝없는 윤회를 거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전생에서 들은 이야기고,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하여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참 이상한 이야기였다.

‘나 자신도 환생자인데, 다른 누군가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다니.’

입술을 조용히 깨문 황준우는 눈을 감고 팔짱을 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졌다.

우마왕은 침착히, 아무런 말 없이 그런 황준우를 기다려주었다.

결코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계단을 오른 시간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제자리에 멀뚱히 서 있었으니 말이다.

“우선…… 첫 번째. 지금 쳐들어오고 있는 군세의 뒤에도 놈이 있나?”

우마왕의 입가로 비릿한 웃음이 지나갔다.

“내가 이 상처를 입었을 때, 녀석이라고 무사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또다시 윤회…….”

“아마. 그때가 삼십 년 전쯤이었지.”

“삼십 년…….”

그 긴 시간 동안, 저 큰 부상을 입은 채로 버텼다.

우마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그릇이 새삼 더욱 크게 느껴졌다.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 너희 인간에게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삼십 년이라는 시간은 찰나와 같다고.”

“알아. 단지 네 강함에 감탄한 것뿐이야.”

“아아, 그런 부류라면 얼마든 환영이지.”

자신만만한 웃음을 보인 우마왕이 검지를 들었다.

“어쨌든 그 첫째로 돌아가서, 놈은 한 번 사라지면 최소 오십 년은 보이지 않았어. 아직 돌아오긴 이르다고 생각해. 지금 침공은…… 보다시피 내 꼴이 이 상태인지라. 욕심을 부리는 녀석들이 많지. 유계와 금오도를 통틀어 최강이라는 이름, 그리고…… 이 성에 잠든 많은 보물까지.”

“죽은 자와 요괴도 보물을 탐내는구나.”

“당연하지. 잊지 말라고. 이곳에 있는 죽은 자들은 어떠한 집착으로 아직 새 삶을 얻지 못한 아귀들이야. 금오도의 요괴 녀석들은 본성부터가 글러 먹었고 말이지.”

“흠…….”

“우리 우마 일족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아. 욕심과, 불합리한 감정으로 채워진 녀석들이 대부분이지. 그것을 탈피할 정도의 재능을 가진 놈들이 자주 태어나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우마 일족은 기본적으로 긍지와 의지로 그런 데에 휩쓸리지 않게 스스로를 잡고 있다고.”

“뭔가 굉장히 대단한 이야기를 들어버린 기분인걸.”

“대단하다마다. 괜히 최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건 아니지. 뭐, 다음 의문은?”

우타와 우적 때에도 알 수 있었지만, 우마 일족의 자긍심은 최강이라는 명성만큼이나 드높다. 황준우는 그런 점이 싫지만도 않았다. 어떠한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는 자긍심이 가진 굳건함이란, 달리 말해 고귀함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주연하가 그렇듯 말이지.’

보고 싶은 얼굴을 잠시 떠올렸다가, 머릿속에서 지운 황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다시 별개 질문으로, 지금 침공하는 녀석들의 머리는 누구야?”

“딱히 누구랄 것도 없어. 요괴왕 일곱과 마왕 다섯이 연합했으니까. 아, 굳이 뽑자면 선동질을 한 녀석이 있기는 하지. 얼마 전에 유계로 떨어진 녀석인데,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마왕이 됐더군.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군. 나이가 들긴 했나 봐. 흐흐.”

“흠…….”

“놈들은 신경 쓰지 마. 숫자만 많은 얼간이들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으니까.”

“일단 알겠어. 그러면 세 번째 질문. 영멸, 확실해?”

“흐음…….”

우마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이 나를 의심하는 건가?”

“의심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잖아. 영멸이라는 것은, 단어 그대로 영원한 소멸이야.”

한데 우마왕과 대치했다는 포달랍궁의 인물은, 계속해서 유계로 돌아왔다.

자연스레 황준우의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극히 확률은 낮지만 우마왕이 착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 현재의 정황만 보자면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신빙성이 높았다.

“뭐, 말했듯이 사실 나도 확신을 하고 있는 건 아니야. 네 말대로 영멸을 당했다면 결코 돌아올 수 없겠지.”

황준우의 눈길을 담담히 받아들이던 우마왕이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올 수 있다면 놈은 스스로를 전생자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을 거야. 그런 존재라면 차라리…….”

“불멸자(不滅者).”

“그래, 그렇게 지칭했겠지.”

황준우의 말에 우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 내가 느끼기로는 영혼이 완전히 사라졌어.”

“일반적인 영멸의 증상과 같네.”

“그렇지.”

“그자는…….”

“너를 알지는 못하는 것 같더라고.”

황준우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 우마왕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잠시, 황준우의 눈가에 짙은 떨림이 일었다.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물어도 될까?”

“말 그대로야. 놈은 네 존재 따위엔 별로 관심이 없어. 설령 그게 남천맹의 맹주이건, 일곱 밤을 걸쳐 무신이라 불린 사나이건 말이지.”

우마왕의 눈매가 곱게 휜다.

꽤나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유계의 모든 존재는…… 나를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는 건가?”

황준우는 유계에 들어서기 전 마주쳤던 망령의 장벽을 떠올렸다.

그들 모두가 황준우의 과거를 보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의 황준우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행태다. 본모습을 보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건 아니야. 누군가는 볼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못 보겠지. 유계의 망령들은 무엇에 집착하느냐에 따라 그 형태가 완연히 달라지지. 재미있는 건 그들 대다수가 집착하는 것이 삶이란 거지.”

“삶……?”

“그래. 생명. 이미 죽은 자들이 이제 와 생명을 추구해. 때문에 놈들은 죽기 전인 인간의 모습으로 대부분 유계에 안착해. 그리고 자신이 결국 죽은 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단 걸 알게 된 순간, 둘 중 하나가 되지.”

우마왕이 검지를 펼쳤다.

“첫째는 윤회의 길로 올라가는 것. 참고로 말해 아주 드문 경우야. 애초에 유계에 안착할 정도로 무언가에 집착이 많은 놈들이야.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걸 포기하고 사라지기란 쉽지가 않지.”

“둘째가…… 망령이 되는 건가.”

“정답. 솔직히 놀랐어. 네게 사무친 원한이 얼마나 많기에 그 끔찍한 놈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장벽을 만들어 버린 건지.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못 버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아주 부숴버리고 나오더라.”

“그걸 봤어?”

“보진 못했지만 느낄 수는 있지. 우타가 누구 명령으로 거기까지 갔다고 생각한 거야?”

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녀는 우마왕이다.

대화를 나눌수록 점점 더 그런 사실이 느껴졌다.

“아마 그렇게 망령이 된 녀석들 중 너를 아는 존재라면 대다수 네 과거의 모습을 보게 될 거야. 그것이 자신이 추구했던 과거의 삶 속에 살아가던 황준우니까.”

“하면 아직 망령이 되지 않은 자들은 나를 보고도 모른다는 건가.”

“녀석들은 아직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어리석지. 참.”

“안타깝지. 그런데 너…… 괜찮아?”

조소를 흘리는 우마왕의 안색이 창백하다.

처음 마중 나왔을 때에 비하자면 확연히 위험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다소 무리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괜찮아. 이 몸으로 전장에도 몇 번이나 섰는걸.”

“…….”

“그러니까 평소에 힘을 아껴둬야 한다고. 이따 저기까지 올라갈 땐 업어줘.”

“업는 건 조금 그렇고…… 그래도 움직이지 않게 모셔는 줄게.”

“허공섭물로?”

“그래.”

“쉽지 않을걸. 큭큭. 할 수 있으면 해 봐. 쿨럭!”

거친 기침을 토한 우마왕의 신형이 휘청인다.

“우마왕!”

“아아, 괜찮…… 괜찮아.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빨리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 짓자. 그런 의미에 있어. 내가 너를 알아본 이유는 간단해. 숙에게 들었으니까.”

허무맹랑할 정도로 간단한 이유다.

또한 쉽게 납득이 됐다.

숙은 이 세계의 가장 높은 신.

황준우의 환생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외에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내가 너에게 전생자에 관한 이야기를 한 건…… 예상이지만 그가 너의 대적자(對敵者)일 것 같아서야.”

“대적자.”

완전히 서로를 바라보는 운명의 지평선에 선 적.

그 말이 황준우의 가슴에 갑작스레 와 닿았다.

“같은 환생자, 기억을 전이 받는다는 것, 조건은 너와 같거나…… 아니 유리한가? 놈은 벌써 몇 번이나 환생을 했으니. 그런데 지향하는 목표는 완전히 달라.”

우마왕의 이야기를 듣는 황준우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대적자라는 단어, 그리고 지향하는 목표. 닮은 듯 완전히 다른 선상에 선 둘을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그 전생자는 멸망을 원하고 있구나.”

“난 역시 머리 좋은 녀석이 좋아. 말을 길게 할 필요 없잖아.”

“어째서……?”

“놈에게 이유란 건 없어. 직접 보면 알겠지만, 그 녀석은 마치 악의(惡意)의 화신 같은 존재니까. 솔직히 말해 어떠한 마왕, 요괴와도 비교할 수 없어. 그야말로 세계가 가장 괴로운 방법을 찾아 행하고 싶을 뿐이지.”

우마왕의 목소리가 무겁다.

“그러니까 네가 놈을 막아야 해.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의문을 가졌지만, 이렇게 보고 나니 확신을 가지게 됐어.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황준우. 너밖에 없어. 네가 아니면 놈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야.”

“하아…….”

황준우의 입가로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뒷머리를 긁적이는 손길은 거칠다.

“제강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멸망을 원하는 전생자라니…….”

문득 사방이 적이라는 말이 다 떠오를 정도였다.

하나 달리 말하자면 어차피 바뀔 일은 무엇도 없었다.

“어차피 난 멸망을 막을 거니까. 무슨 수를 써서든.”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놈은 반대로 생각하겠지.”

“골치 아픈 녀석이네.”

“그렇지.”

새로운 적이 생겼다.

지상으로 돌아가자마자 해야 할 일이 생긴 셈이었다.

“거듭 말해 이곳의 전쟁은 신경 쓰지 마. 너는 내가 보호하기 힘들어진 제강의 영혼을 가지고 유계를 탈출해.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하면 돼.”

“…….”

“백택 녀석한테 들어보니까 의외로 마음 여린 부분이 많은 녀석인 것 같기에 미리 권고하는 거야. 여기저기 참견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 같고.”

“부정은 못 하겠네.”

그래서 전생에도 무림공적으로까지 몰렸던 몸이니 말이다.

“네 동료들과 함께 제강의 조각을 얻고, 바로 탈출해. 아, 부탁하고 싶은 물건이 몇 개 더 있기는 해.”

“부탁하고 싶은 물건?”

“네가 가지고 가서 나쁘지 않을 것들이야. 흔히 말하는 보패는 되는 보물들이니까. 예를 들자면 내 파초선 같은 것 말이지. 아, 그러고 보니 그 전생자 녀석이 계속 나한테 덤벼들었던 이유도 파초선을 가지고 싶어서라고 했지. 그 악의를 가지고 대체 어디에 쓰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지.”

“잠시만. 우마왕. 잠시.”

황준우가 재빨리 우마왕의 말을 막았다.

의문 가득한 표정의 우마왕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갑자기 왜 그래?”

“놈이 네 파초선을 원했다고?”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