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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21화 (321/373)

학사재생 321화

제 321화

“굳이 따지자면 파초선뿐만이 아니지. 올 때마다 탐내는 게 더 늘어나긴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어쩌면 놈은 내게 제강의 조각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우마왕.”

황준우의 눈에서 황금빛이 번쩍였다.

머릿속에서는 몇 번이고 벼락이 쳤다.

가설이 아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점점 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네가 영멸 아니, 쫓아냈다고 말한 전생자 역시 아직 유계에 있을지도 몰라.”

“무슨 말도 안 되는…… 그것만큼은 이 몸이 직접 확인한 일이다.”

우마왕이 미간을 크게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큰 부상을 입을 만큼 힘든 격전이었지만, 분명히 전생자의 영혼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영멸이라는 상황 자체가 부정될 수는 있어도, 그가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봐. 내가 유계에 오기 전 몇 가지 의문을 가지고 있던 이야기가 있어.”

“의문?”

우마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최대한 아닌 척하려 했지만 표정에는 감출 수 없는 불쾌함이 어린 채였다.

“그래, 의문. 시작은 팔선 중 하나인 장과로로부터였어.”

이후 뇌신 요동에 이어, 우마왕까지.

단편적인 이야기였지만 왠지 모를 연결고리가 느껴지는 일이었다.

“마왕 중 하나가 보물을 모은다고? 언뜻 들으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만…….”

우마왕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이미 말한 바 있듯, 마왕이란 욕심 덩어리들이다.

설령 그녀가 약해졌다 한들, 유계와 금오도를 통틀어 최강이라는 우마 일족에게 곧장 전쟁을 일으킬 만큼이나 말이다.

실제로 세계 이곳저곳에서 보물을 모으는 마왕이나 요괴왕을 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황준우가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신격까지 얻은 무인의 직감이란 예언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믿어주는 거야?”

“믿어주기보다는, 믿을 수밖에 없는 거지.”

이후, 미간을 곱게 모으고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우마왕이 입을 열었다.

“……네 직감으로 놈이 아직 이곳 유계에 있음도 확신하고 있어?”

“응. 이제는 거의 분명하다고 느끼고 있어.”

황준우의 황금안이 번쩍인다.

그를 조금은 홀린 듯 바라보던 우마왕의 입 바깥으로 이내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내렸다.

“그렇단 말이지, 결국 그 싸움은 내 패배였나. 자존심 상하는군. 결국 따라잡혔다니.”

“너무 낙심하지는 마. 네 말대로 놈은 무한히 살아나는 전생자잖아.”

“어설픈 위로 하지 마라. 나 역시 놈이 전생하는 동안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니.”

혀를 찬 우마왕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상황이 그렇다면…… 놈이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겠군.”

“그렇지. 아마 너 못지않은 부상을 입었을 거라고 생각해.”

“흐음…….”

조금은 흡족한 듯, 묘한 신음을 흘린 우마왕이 턱을 쓰다듬었다.

“제강의 조각이 아니더라도, 네가 이곳에 남아야 할 이유가 생겼구나.”

“쓸데없는 오지랖을 벌여서 전쟁에 참가할 이유도 생겼고 말이지.”

“어쩔 수 없군. 자존심이고 뭐고, 오기를 부릴 때가 아니군.”

웃음을 그린 우마왕이 손을 내민다.

그 의미를 모를 황준우가 아니었다.

“잘 부탁한다. 조력자.”

우마왕은 웃음을 흘린 이후, 쓰러졌다.

황준우는 쓰러진 우마왕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는, 품에 안고 계단을 올랐다.

우마왕의 말대로 꼭대기에 위치한 큰 방에는 황준우의 일행들이 모두 기다리고 있었다.

백교, 황서연, 서문지언.

“다들 무사했구나.”

세 사람의 편안한 낯을 하나하나 확인한 황준우의 입가로도 미소가 흘렀다.

“무사고 뭐고, 입구의 온갖 망령이 공자께 몰려간 덕에 가볍게 나왔지요.”

백교가 부채를 펼치며 말한다.

시선은 쓰러진 우마왕에게로 향한 채였다.

“아래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는 듯했습니다만, 결국 무리한 모양이군요.”

“대화만으로 이 꼴이 될 정도로 아직까지 버티고 있단 게 용할 정도죠.”

품에 안은 우마왕을, 넓은 방 한편에 있는 거대한 침대 위에 눕힌 황준우가 셋을 돌아보았다.

“어쨌든 이야기를 나눈 덕에 알게 된 게 많아요. 세 사람에게도 들려주어야 할 것 같은데…….”

“저야 뭐, 사실 조금 엿들었습니다만 두 분은 다르겠지요. 저도 알려주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백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서연과 서문지언, 두 사람도 이곳까지 온 이상 전반적인 상황을 확실히 알아야 할 테니 말이다.

“우선…….”

황준우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황서연을 바라보았다.

곁에서 늘 지켜주고자 마음먹었는데, 어느 순간 보니 훌쩍 자라나 이렇게 옆에 서 있게 돼버렸다.

‘내 모든 걸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가족인 만큼 그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다.

다만 그래서 더 걱정인 것도 있었다.

과거, 칠야무신은 작금 황준우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결국 황준우로 태어났어야 할 사람을 대신한 것이 본인일지도 모른다.

‘화를 내려나?’

순수하게, 동경의 시선으로 반짝이는 눈빛이 변할 것이 한편으로는 두렵다.

하지만 이제 와서 마냥 피할 수만은 없다.

‘이 모두가 자격이 있으니까.’

황준우와 함께 목숨을 걸고 유계까지 넘어온 사람들이다.

동생이라고 빼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니, 동생이기에 더욱 특별하게라도 말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 이야기부터 해야 되겠네요. 나는…… 저는 전생자입니다.”

무거운 입이 열렸다.

동시에 백교의 눈엔 감탄이, 서문지언과 황서연의 눈에는 의문이 깃들었다.

“전생자?”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나는…… 이전의 삶을 기억하고 있어.”

“어, 그러니까, 오빠는 지금…….”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셈이지.”

“두 번째.”

“원래 사람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죠?”

당황한 목소리를 흘린 황서연의 시선이 백교를 향했다.

어째서인지 그라면 무엇이라도 대답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든 탓이었다.

“당연하지요. 공자가 아주, 매우 많이, 특별한 경우랍니다.”

“그렇죠. 당연히 사람이라면 한 번뿐인 인생을 사는 건데, 우리 오빠는 두 번째를 살고 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굉장해! 역시 우리 오빠야!”

이후 터져 나온 것은 감탄이었다.

덕분에,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살피던 황준우의 입에서 맥 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지. 경호 아저씨도 이 이야기 들으면 그냥 납득해 버릴걸. 과연, 역시 우리 오빠는 대단해. 뭘 하든 평범하지 않구나.”

“그게 끝이야?”

“끝은 아니지.”

물음에, 단호히 고개를 내저은 황서연이 언제나 그렇듯 날듯이 뛰어 황준우의 앞으로 도달했다.

이윽고는 망설임 없이 황준우를 끌어안는다.

토닥, 토닥.

어째서인지,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부드럽다.

“무슨 의미인지 물어도 될까?”

가슴 한편이 간지러워지는 묘한 감정을 느낀 황준우가 물었다.

“위로의 의미. 어린 시절부터 그런 비밀을 가지고 있었으면, 나름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아빠 눈치도 보이고, 엄마도 신경 쓰이고. 우리 오빠 또 은근히 마음 약한데.”

토닥, 토닥.

“너…….”

“괜찮아. 오빠. 나는 아니,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무엇이 되었건 오빠가 우리 오빠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황서연…….”

“난 그냥, 오빠가 좋아. 그 속에 어떤, 무슨 과거가 있더라도 마찬가지야.”

문득 아주 어린 시절, 자신의 손을 맞잡으며 위로해주던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냐면, 오빠는 아주 좋은 사람인걸.”

“좋은 사람…….”

“응. 착하고, 정의롭고, 멋지고, 잘생겼고…… 그러니까 오빠, 나쁜 사람 아니야. 설령 지금까지 그 말을 못 하고 있었더라도 말이지.”

품에 안긴 채, 활짝 핀 웃음을 보이는 황서연의 그 말에 마음의 문 어딘가가 벌컥 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괜찮은 줄 알았다.

이미 떠나보낸 전생이기에,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아니, 거짓말이다.

이미 한계를 뛰어넘으며 느꼈지 않은가.

과거의 자신도, 지금의 황준우도 모두 스스로임을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이렇게 황서연에게까지 이야기한 것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족에게 인정받았다.

그 사실이, 말로 다할 수 없이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행복했다.

“나는 정말…… 축복받았구나.”

황준우의 표정에도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손길로 황서연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작에는 깊은 애정이 깃든다.

“그럼, 나만큼 예쁜 여동생이 흔한 줄 알아.”

“결단코 없지. 세상 전체를 뒤져도 없을 거야.”

“천하제일 여동생이라고.”

맞는 말이다.

적어도 황준우에게 있어서만큼은 백 번을 고쳐 죽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말이었다.

“혹시 해서 묻는데…… 맹주가 칠야무신이오?”

그런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서문지언이 질문을 건네 왔다.

언제 들어도 결코 가볍지 않은 이름이다.

“맞아.”

황준우는 망설임 없이 그 이름을 긍정했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품에서 떨어진 황서연을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하나 없다.

정말 황준우를 그 자체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 서문지언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전대라고 해도 좋을 오래된 무인이었다.

전생의 황준우를 안다.

직접 지켜본 적도 있다.

그의 행보가, 어떠한 협의로 이루어진 일이라 한들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 오대세가 중 하나, 서문세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 역시 그 싸움에 일부 휘말렸었으니 말이다.

“잠시, 바깥바람을 쐬고 와도 되겠소?”

결국 복잡한 표정으로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던 서문지언이 힘겹게 입을 열어 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쉽게 정리될 이야기가 아닌 것이 당연하다.

“기다릴게.”

황준우는 고개를 끄덕였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서문지언이 사라졌다.

“자, 그러면 서문가주가 올 때까지 잠시 쉬고 있지요. 두 번에 걸쳐 이야기할 건 없으니 말이죠. 이 방에 연결된 문 하나, 하나가 또 다른 방입니다. 넓은 침대도 있고 푹 쉴 수도 있지요. 하암.”

박수를 쳐, 다소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환기한 백교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말을 이었다.

“공자가 공세도 물린 덕에 성 전체에 여유가 있으니, 오늘은 별 소음 없이 푹 쉴 수 있겠군요. 그간은 쉬고 있어도 전쟁 소리 덕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거든요.”

“맞아, 맞아. 오늘은 정말 푹 잘 수 있겠지.”

황서연 역시 기쁜 표정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갑자기 검이 하늘을 뒤덮고, 폭풍처럼 쏟아져 내려 병력을 일순간에 휩쓸어 버렸다. 맞나?”

다소 딱딱하고 차가운 음성을 흘린 인면의 거미가 미간을 깊게 찌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후로는 내뱉은 말을 스스로 점검이라도 하듯 몇 번이고 되뇐다.

그 뒤편, 말하는 인면지주의 모습을 다소 답답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여인이 팔짱을 끼고는 앞으로 나섰다.

“말 그대로야. 괴상한 녀석이 나타났어. 딱히 요기나 마기가 느껴지는 건 아닌데…… 이 멍청한 놈에게 들었다시피 굉장해. 전성기 시절의 우마왕을 보는 것 같더라고.”

“멍청한 놈? 여치(呂雉). 죽인다.”

“죽여? 네까짓 게?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거미 주제에 어디 감히!”

콧방귀를 뀐 여인이 팔짱을 풀고는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려 할 때였다.

“그만, 그만. 두 분이 지금 싸울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망자고, 요괴고, 심지어 마왕과 요괴왕인 두 분께서도 겁먹어서 도망쳤다는 것 아닙니까?”

다소 어두운 그늘 속에 숨어, 얼굴을 감추고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걸린 채였다.

“도망? 네가 그 모습을 봤으면 달랐을 것 같아? 놈은 괴물이야.”

여인, 여치가 차갑게 말했다.

여치가 아는 그 누구라고 한들 그 상황에서 견뎌냈을 리가 없다.

‘아니지…….’

단 두 명만은 예외로 둘 수 있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 괴물이랑, 저자 정도.’

여치의 시선이 잠시 어둠 속 어딘가를 훑고 지나갔다.

하나 적어도 얼마 전 갓 마왕이 된 눈앞의 애송이라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괴물이라…… 그런 분이 요기도, 마기도 없다는 말입니까?”

“그래. 놈은 마치 살아 있는 인간 아니지, 그보다 다른…….”

“신이었다.”

불쾌하게 인상을 찌푸린 인면지주의 왕, 괴이의 말에 여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무신.”

여치의 말을, 괴이가 받는다.

동시에 여치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함부로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시선은 또 다른 어둠 속, 거대한 형체를 한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내를 향한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어째서인지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무신이라…….”

앞으로 나선, 웃음기 가득한 사내의 표정이 오묘하게 바뀌었다.

“누군가가 떠오를 듯도 하군요. 그가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으면서도, 어째서인지 가능할 듯도 하고…….”

“무슨 소리야?”

“아닙니다. 직접 확인하고 싶은데…… 조금 무섭네요.”

웃음을 흘린 그의 시선이 여치가 바라보았던 한구석, 덩치 큰 사내를 향했다.

“어떻습니까. 감히 무신이라는 명패에 도전을 내밀 만한 인물이 나타난 것 같은데요.”

“흠…….”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짧은 신음이었지만 그 무게감은 결코 얕지 않다.

애초에 쉽게 입을 여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한 걸음을 내디뎌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주변 전체가 술렁였다.

입을 열기도 어렵지만, 직접 움직이는 것을 보기는 더 힘든 사내다.

사실상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마왕과 요괴왕이 긴장감으로 침을 삼켰다.

모습을 드러낸 그는 팔 척이 넘는 장신을 소유한 거인이었다. 얼굴에는 셀 수 없는 흉터가 가득하다. 두터운 검은 옷을 입은 몸에도 드러난 부위에는 상처로 가득했다. 유계에서 흉터가 남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내 스스로가 그 고통을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등 뒤로는 자신의 신장만 한 대검(大劍)이 매달려 있었다.

“알아볼 필요는 있겠지.”

그가 움직이고, 말을 하자 더 이상 입을 열고 함부로 경거망동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먼저 그를 지목했던 사내조차도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물러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직접 나설 만한 일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거인의 시선이 어둠 속, 한 걸음 물러났던 사내를 향했다.

“애송이 마왕. 내가 요괴왕 다섯 그리고 여치와 함께 합공을 가한다.”

“……제가 말입니까?”

목소리가 떨린다.

“그래. 너다.”

하나 거인의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사내는 어떻게든 그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곧 생각을 멈추었다.

거인의 기운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른다.

그따위는 일거에 영멸시켜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무서운 압박감이다.

‘과연…… 제 뜻대로만 될 위인들은 아니란 건가요.’

하긴, 얕보기에는 상대들 하나, 하나가 만만치 않다.

특히 거인의 경우는 더욱 특별했다.

‘너무 성급하게 움직였나요.’

뒤늦게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거인은 그의 속내를 모두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엄중히 말했다.

“가라. 이제 갓 마왕의 지위를 얻은 교만한 자여. 네가 그에게 무신의 이름을 걸고 다툴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여라.”

명령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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