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24화
제 324화
우마왕의 궁궐 전체가 뒤흔들렸다.
이 말은 곧, 성벽이 무너졌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그에 못지않은 힘이 움직였던가.’
어느 쪽이든, 두고만 볼 수는 없다.
우마왕이 굳은 얼굴로 황준우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혼돈, 제강의 조각과 바깥의 전쟁 상황.
대답을 망설일 틈은 없었다.
“우선 나가자.”
“…….”
우마왕은 아무런 이유도, 생각도 묻지 않은 채 곧장 제강의 조각이 봉인된 방문을 닫았다.
쿠르릉, 쿵.
이어서 빠른 걸음으로 보물창고를 지나친다.
일전까지 보였던, 다소 신나 보이던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
긴 복도를 지나, 드넓은 궁궐의 방으로 돌아오기까지는 갈 때에 비해 시간이 반절도 걸리지 않았다.
“대왕님!”
방에 들어선 순간, 한 여인이 다가와 재빨리 우마왕을 부른다.
머리에 소뿔만 심어져 있을 뿐, 영락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렇군. 바깥에서 내가 보았던 쪽은 남성체인가?’
분명 일부지만, 여성체의 느낌이 나는 우마 일족도 있었다.
“성벽이 무너진 거야?”
황준우가 쓸데없는 고민에 빠진 사이 우마왕이 전장의 상황을 확인했다.
걸음은 유계 전체를 볼 수 있는 창문을 향하고 있는 채다.
“아니요. 우적 님이 전면에 나서셔 그런 건 아니지만, 상황은 좋지 않아요. 마왕만 둘, 요괴왕이 다섯이에요.”
“둘, 다섯?”
창문 밖을 바라보며 상황을 살핀 우마왕이 아랫입술을 질끈 씹었다.
공개적으로 참전한 마왕은 다섯, 요괴왕이 일곱이다.
총 열둘 중 절반 이상이 한 전장에 나선 셈.
‘조심스러운 녀석들답지 않은 행동인데.’
마왕이나 요괴왕이나, 다를 바 없다.
아니, 오히려 그쯤 되면 제 목숨을 더 중히 여긴다.
인간계와 달리 유계, 그리고 금오도에서의 죽음은 곧 영멸과 직결되는 상황에 권력자의 위치에 오른 그들이 끝을 원할 리가 없지 않은가? 평생을 누리길 바라고, 영원히 왕이길 원한다.
먼저 나섰다가, 부상당한 우마왕이라도 마주치면 모두 영멸이다.
그걸 모를 놈들이 아닌데 전면에 나섰다.
무슨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제법 많네.”
우마왕의 옆에 서, 함께 창밖을 바라본 황준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한 우마 일족의 용사들, 우타와 우적이 분전하고 있다.
그 외로도 꽤나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 우마 일족 몇몇이 전방에 나서 우마 일족을 이끌고 있었지만 아슬아슬하다. 적에게 왕(王)이라 불릴 정도의 강자들이 너무 많다.
‘저자는…….’
그중 황준우의 시선을 유독 끄는 인물이 있었다.
검은 가면을 깊게 눌러쓴 채, 검을 휘두르는 사내.
사용하는 무공과 자세가 모두 낯익다.
“오빠!”
“맹주.”
고심하는 황준우의 뒤로 황서연, 서문지언, 그리고 백교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 역시 사태가 범상치 않음을 눈치챈 것이다.
“건방진 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입술을 잘근, 잘끈 깨물며 고심하던 우마왕의 눈에 결심이 어렸다.
시선은 황준우를 향했다.
“내 파초선을 줘.”
직접 나설 생각이다.
상처 입은 몸이지만, 무리한다면 어지간한 왕 한둘 정도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파초선까지 휘두른다면 저들 모두를 휩쓸 수 있을지 모른다.
다만 그 이후가 너무 위험하다.
“안 돼. 빌려준 거라지만, 당장은 내가 가지고 있다고.”
황준우가 한 손에 든 파초선을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죽지 않는다.”
“그래, 고작 저 정도로 네가 당하진 않겠지. 하지만 달리 말해, 이 정도 사태에 나설 필요도 없다는 뜻이야. 잊었어? 난 네 조력자라고.”
“하지만…… 넌 해야 할 일이…….”
“조금 미루기로 했으니까. 보니까 쓸데없는 책임감이 강한 듯한데. 걱정 말고 날 믿어. 오지랖 넓은 성격이란 소리 괜히 듣는 거 아니거든.”
고민하는 우마왕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 두드려준 황준우가 한 손에 든 파초선을 가볍게 흔든다.
“이것 나도 제법 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위력도 시험해봐야지.”
“건방진 놈.”
어딘지 모르게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눈빛이 불쾌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목소리 어딘가에는 안도한 느낌이 가득했다.
“부탁하마. 참고로 말해 파초선을 제대로 다루려면, 전력으로 휘둘러야 할 거다.”
“전력으로라…… 알겠어.”
결정을 내린 황준우가 움직이려 할 때였다.
“나도 갈래.”
황서연이 곁에 섰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황서연이라면, 어지간한 왕급 전력에 살짝 모자란 수준이다.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나 역시 가겠소. 과거의 청산은 별개의 일이니.”
서문지언도 곁에 섰다.
복잡한 심경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을 잊지는 않은 것이다.
“저는…….”
“스승님은 쉬고 계셔요. 금방 다녀와서 대화나 좀 하자고요.”
“대화요?”
“예. 대화.”
뒤를 향해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황서연과 서문지언이 쏜살같이 그를 쫓는다.
“아무래도…… 큰 빚을 지게 생겼군.”
창밖의 풍경으로 그들이 달려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우마왕의 입가로는 묘한, 안도의 미소가 흘렀다.
마왕 둘에, 요괴왕 다섯.
모두가 유계와 금오도 어느 한 지역에서는 명성을 떨치는 존재다.
그런 그들이 함께하고 있음에도, 우마 일족의 용사들에 막혀 나아가지 못한다.
우마왕 본인이 직접 나선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요괴왕들의 자존심이 절로 상했다.
이미 첫 목적, 적에게 새로이 나타난 무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은 버렸다.
그들은 이성을 상실한 채 마구잡이로 날뛰며 기운을 흩뿌렸다.
그 거친 기세에는 적, 아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쓸려나간다.
재빠르게 한 발 뒤로 물러난 여치가 그 풍경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는 발을 굴렀다.
“힘만 센 무식한 요괴 놈들!”
자칫했으면, 그들의 거친 기세에 휘말려 그녀도 다칠 뻔했다.
성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괴왕이 직접 싸우는 건 처음 보는데, 엄청나군요. 정말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의 바로 옆, 함께 물러난 검은 가면의 마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미친놈들이지. 애초부터 짐승에 가까운 녀석들에게 뭘 바랐나 싶기도 하지만…….”
이를 빠득, 빠득 간 여치의 시선이 성벽 위로 뛰어올라 전장에 떨어지는 신형을 향했다.
“저자……!”
눈이 단숨에 휘둥그레졌다.
그를 따라 시선을 공중으로 옮긴 가면의 사내 역시 눈동자가 커다랗게 변했다.
“무신, 황준우!”
“저자를 알아?”
“현재 지상의 무신입니다. 이럴 게 아니라…….”
검은 가면의 사내가 곧장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한다.
얼마 전 새로 마왕이 돼 누구보다 근래 지상의 소식을 잘 알고 있는 이의 갑작스러운 이탈이다.
“빌어먹을! 역시 무서운 놈이었잖아!”
여치는 망설임 없이 그를 따라 전장을 이탈했다.
시험이라는 명목하에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파초선.”
그런 그녀의 귓가에, 묵직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저 부채가 그…….’
우마왕의 신보!
보패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파초선이다.
“잠깐, 지금 그걸 휘두르겠……?”
놀란 여치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성벽만 한 거대한 부채가 휘둘러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콰아아-!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주변을 휩쓸어 버리는 태풍이 용솟음쳤다.
콰드드득-!
지면이 거칠게 일어나고 제멋대로 날뛰던 요괴왕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돌리기 시작한다.
능력 되는 자가 사용하면 천상과 천하, 지하까지 통틀어 무엇보다 가장 뜨겁다는 성영대왕의 홍염(紅焰)마저도 밀어버릴 정도의 바람이다.
말려들면 요괴왕이라고 하여도 무사할 리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본능에 충실한 요괴왕들이 미친 듯이 서로를 밀치며 달아나기 시작했지만 이미 때는 뒤늦은 후였다.
찌이잉-!
귀가 아릿하게 울리는 파공음이 들렸다.
눈앞으로 전장을 휩쓸어 버리는, 하늘까지 닿은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맙소사.’
여치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잇지 못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작정 뛰었다.
휘말리면, 그녀라고 해도 영멸이었다.
“대왕께서 파초선을 직접?”
“아니, 그자다. 가장 강한 인간.”
눈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거대한 광풍을 보며 놀란 우마 일족의 말에, 바로 옆에 선 우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실제로 거대한 파초선을 가볍게 휘두른 이의 모습은 분명한 인간이었다.
그들이 아는 위풍당당하고 거대한 우마왕의 모습은 아니다.
“우마왕께서 파초선을 내주신 적은 드물다고 알고 있거늘…….”
“그만한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우적까지 나서서 그렇게 말하자, 모든 우마 일족이 말을 닫았다.
우마 일족에서도 용사라 불리는 다섯 강자.
그들 중에서 둘 이상이 인정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을 벗어나 그들의 대왕이 먼저 손을 내민 이다.
무엇보다 결과가 좋았다.
두 마왕이 빠졌다고 하여도, 갑작스럽게 미쳐 날뛰는 다섯 요괴왕에게 진땀을 빼고 있던 상황이 일순간에 정리되었다. 몰려들던 적군도 반절 이상이 쓸려나갔다.
‘대왕의 전성기 시절이라 하여도 이 정도 광풍을 만들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을 턴데.’
광풍이 멎은 뒤 풍경을 바라본 우적은 마음에 담긴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적어도 그들 우마 일족에게 있어 거력대왕은 신보다도 높은 존재였다.
불경한 생각을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는 탓이다.
“와…… 이거, 엄청 힘 빠지네. 어지간한 권능을 쏟아낸 것 못지않잖아.”
양손으로 휘둘렀던 파초선이 다시금 작아진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몰아 내쉰 황준우가 말한다.
그 역시 생각 이상의 결과에 기겁하고 있는 차였다.
전력을 쏟아내라고 해서 있는 힘껏 휘둘렀더니, 그 반동을 견뎌내기가 힘들 정도였었으니 말이다.
키에엑-! 키에엑-!
그사이, 자신들이 모시던 요괴왕이 죽은 것을 확인한 요괴 몇몇이 괴성을 내지르며 공황에 빠진 것이 전해졌다.
“곧 폭주할 거다. 두 번이나 도움을 주어, 고맙다. 이만 쉬어라.”
우적이 그런 황준우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곧 요괴들의 기세가 들끓기 시작했다. 사방을 향해 적의와 살의를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뭐 쉴 정도까지는 아닌데…….”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까 달아난 마왕.’
남자와 여자 하나.
여자 측은 모른다.
다만 남자 측에 대해서는 일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놈을 잡아야 해.’
예상대로라면, 오래 볼수록 좋지 않은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키에에엑-!
고민을 끝냈을 무렵 요괴들의 폭주가 시작되었다.
우마 일족의 용사와 전사들이 앞으로 나서 그들을 영멸시키기 시작한다.
뒤를 따라 도착한 황서연과 서문지언도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고 용사들과 함께 최전방에 섰다.
“또 다른 인간들의 도움이군! 고맙다!”
우적이 그런 두 사람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척 보아도 어지간한 우마 일족의 전사보다 뛰어난 두 사람의 도움은, 피해를 크게 줄여줄 테니 말이다.
이미 황준우를 통해 인간에 대한 편견을 모두 버린 우적이었다.
‘좋아, 그러면 가볼까.’
그들의 든든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한 황준우의 신형이 곧장 두 마왕이 달아난 길을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