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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25화 (325/373)

학사재생 325화

제 325화

여치는 정말 최선을 다해 뛰었다.

마왕이 된 이후, 이보다 더 열심히 달린 기억이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빌어먹을 놈! 혼자 도망가다니!”

파초선이 만들어 낸 거대한 태풍이 휘몰아치고, 군세의 대다수가 순식간에 소멸한 것을 느낀 여치는 문득 숲 한편에 몸을 숨긴 채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는 욕을 내뱉었다.

“우라질 놈, 시체 거시기만도 못한 자식, 자라 새끼 모가지보다 겁 많은 개 같은 놈!”

이어지는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숨긴 채 어딘가를 바라보는 사내의 가면 아래로 달뜬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다. 여치의 눈에는 그 모습이 참으로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넌 대체 뭘 보고……?”

“이런, 옵니다.”

사내가 다시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여치의 등에 갑작스럽게 소름이 삐쭉 돋아났다.

‘설마?’

흥분한 마음에 잠깐 잊고 있었다.

이곳은 아직 전장 바깥이 아니다.

그리고 파초선을 휘둘렀던 괴물 같은 무신은 그녀의 적이었다.

“아까 도망갔던 마왕 중 하나로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순간 여치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행운이었을까? 아니면 기회를 준 걸까?

서늘한 검격이 그녀의 머리카락만을 자르고는 허공을 지나갔다.

“대, 대적할 생각 없습니다. 한낱 여인이 어찌 사내에게 싸움을 걸려 한단 말입니까? 오해는 푸시고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그런 여치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본 황준우가 물었다.

“이름이?”

“이름 말이야. 마왕쯤 되면 제법 유명했을 것 같아서.”

황준우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던 여치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텄다.

“여치…….”

“여치? 아, 한고조 유방의 여후(呂后)!”

황준우의 입가로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여치의 몸이 덜덜 떨렸다.

“한신과 팽월의 목조차도 벤 인물이 한낱 여인이라니, 너무 가식적인 것 아니야?”

“그, 그건…….”

상대가 역사에 대해 무지하길 바랐다.

무공만 익힌 무인이라면 능히 그럴 수도 있었을 터니 말이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척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변소에 가두었고, 조카마저 독살하여 그림자 황제로 살았던 여인이 스스로를 그렇게 낮출 필요가 있나.”

“네깟 놈이 뭘 안다고! 빌어먹을 새끼!”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킨 여치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언제 뽑았는지 모를 긴 소매 속의 검은 황준우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 거칠게 휘둘러진다.

“아쉽지만, 오래 놀아줄 시간은 없어. 그래도 당신 정도면 죽어서도 벌을 받아야 하니까…….”

피식 웃은 황준우의 검이 번쩍였다.

동시에 긴 옷소매도, 대지를 디디고 있던 두 다리에서도 감각이 사라졌다.

이윽고 지독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아아악-!”

“죽은 영혼, 마왕이라고 하여도 고통을 느낀다는 건 참 좋아.”

비명을 내지르는 여치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들어 올린 황준우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네가 남에게 주었던 고통, 그대로 돌려받아 봐.”

그 상태로 여치를 든 채, 광기로 날뛰고 있는 요괴들 머리 위로 날아오른 황준우가 머리끄덩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아…… 아아……!”

눈물 콧물을 쏟아 내는 여치의 머리가 좌우로 내저어졌다.

잡힌 머리끄덩이가 지독히도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그 누구보다 요괴를 무시해왔던 마왕인 그녀 아니던가?

그들 아래 짓밟혀, 짐승 같은 이빨에 짓눌려 죽어가게 된다.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다.

치욕적이고, 서러웠다.

“너에게 죽은 모두가 비슷한 심정이었을 거야.”

간절한 눈빛에서 그를 읽은 황준우가 잡고 있던 머리에서 완전히 힘을 놓았다.

“아아악! 네놈을 저주하겠다!”

여치의 마지막 비명이 황준우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러든지 말든지, 어차피 그녀에게 남은 미래는 더 이상 무엇도 남지 않는 영멸뿐이었다.

한 시대를 물들였던 악녀, 여치를 처단했다.

묘한 기분도 들었다.

‘내가 달기를 처음 만났을 때 지금과 같은 힘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당시에는 황준우에게 영혼을 영멸시킬 힘이 없었다.

장소 역시 유계가 아닌 지상이기에 더욱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생포했다. 그렇다고 하여 그녀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달기는 오랜 마왕이다. 따지자면 여치 정도는 우스울 악업을 쌓았을 것이다.

아마 당시에도 지금과 같은 힘이 있었다면 더한 방법으로 그녀를 처단했을 것이다.

하나 어쩔 수 없이 오래도록 그녀를 끌고 다녔고, 결국 목숨을 구제받기까지 했다. 그리고 회개의 기미를 보았다. 여치 역시 같았다면…….

‘쓸데없는 생각.’

황준우는 잡념을 지웠다.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둘만의 차이를 가르려 할 필요도 없다.

이미 그는 수많은 마왕을 죽였다.

또한 대치하는 많은 적의 피를 손에 묻혔다.

그리하여 달기가 기회를 얻었다면 그것 또한 그녀의 명운이다. 다만 먼 훗날에라도 달기가 황준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역시 느리군.’

짧게 생각을 정리하며 움직이다 보니 눈앞에 어느덧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가면 쓴 마왕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는 되도록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지금의 황준우에게는 너무나 느릴 뿐이었다.

또한 움직임, 기운 역시 너무나 낯익다.

단숨에 그를 앞질러, 앞에 선 황준우가 술법을 이용해 투명한 벽을 세웠다.

“……!!”

놀란 가면의 사내가 뒷걸음질 치려 하였지만 이미 때늦은 후다.

“어억-!”

큰 충격을 견디지 못한 사내가 비명을 흘리며 몸을 나뒹굴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검을 뽑은 황준우의 입가로 어이없는 웃음이 흘렀다.

벽과 충돌하여 반쯤 깨진 가면 아래로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역시 너였구나.”

황준우가 차가운 목소리를 흘렸다.

깨진 가면 아래, 일그러진 얼굴을 재빨리 가린 사내가 몸을 돌린다.

“보, 보지 마십시오!”

“뭘 보지 마.”

어이없는 말에 혀를 찬 황준우가 검을 뽑았다.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내가 또다시 달아나기 시작했다.

재빠른 걸음이지만, 거듭 말해 늦다.

단숨에 그를 낚아채 허공으로 던져버린 황준우와 사내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와중에까지 얼굴을 가린 손은 결코 풀지 않는다.

“진짜 집착만은 인정해주마. 빌어먹을 놈아.”

공중으로 날아오른 황준우의 발길질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등에 직격했다.

“아악-!”

비명과 함께 양손에 힘이 풀린 사내가 바닥에 몸을 뒹군다.

그 와중에도 끝내 얼굴만은 비추지 않겠다는 듯 땅에 얼굴을 파묻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뭐, 굳이 얼굴을 볼 필요는 없겠지.”

차갑게 웃은 황준우가 검을 뽑아 들었다.

오래 볼수록 좋은 상대는 아니다.

이미 경험으로 깨달았지 않은가?

“자, 잠깐!”

황준우의 기세가 날카로워지자 사내의 입이 다시 열렸다.

“내, 내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는 다급하다.

황준우의 살의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는 탓이다.

그때, 빠르게 다가오는 하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동시에 황준우와 진무영의 시선이 같은 방향을 향했다.

“서연이?”

황준우가 의문을 흘렸다.

아마 전장을 정리하고 그를 돕고자 나선 것 같았다.

사내는 기회가 왔다는 듯, 눈을 빛내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앞으로 쏘았다.

내뻗는 손길은 황서연의 목줄을 향하고 있다.

그 모습에 잠시 황준우는 황당한 신음을 흘렸다.

분명 날래고, 판단도 좋았다.

다만 황준우가 잡고자 마음먹는다면 역시 헛된 수고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다.

‘서연이가 만만하지는 않을 텐데.’

자신에게 다가오는 손길을 확인한 황서연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한다.

매영검에서 연분홍빛 강기가 흘러나오며 춤추듯 주변으로 흩뿌려진다.

“……!!”

순식간에 손목이 잘려나간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더 이상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움직임이 다시 한번 뒤틀린다.

한쪽밖에 남지 않은 손에서는 열 자가 빠르게 그어졌다.

“십단금!”

자신을 노리는 무공을 알아본 황서연이 놀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무공 자체는 위력적이다.

시전자의 숙련도도 높다.

하지만 지금의 황서연에게 빗대자면 부담될 수준은 아니다.

매영검이 다시 한번 춤을 추었고, 주변으로 연분홍빛 강기가 꽃잎처럼 흩날렸다.

파바밧-!

“크아악-!”

십단금이 깨어지고, 남은 한쪽 손목마저 잘려서 바닥을 뒹굴었다. 발목의 인대마저 끊긴 사내가 바닥을 뒹굴었다.

“왜 여기까지 쫓아왔어.”

그사이 황서연의 옆에 선 황준우가 물었다.

“혹시 해서, 오빠가 포위라도 됐으면 한 손 거들라고.”

방금 전까지의 전투는 잊었다는 듯 제법 밝게 웃은 황서연이 혀를 쏙 빼 내민다.

“앞으론 그러지 마. 진짜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오빠가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더 강해질게.”

황서연의 장담에 황준우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인 탓이다. 애초에 황씨 고집이 보통이 아닌 건 본인 스스로가 잘 알지 않던가?

“크으윽…….”

신음을 흘린 사내가, 바닥을 기며 두 사람의 눈치를 본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일이다.

‘무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저 아이는…….’

알고 있다.

황준우의 여동생.

제법 뛰어난 무재라고 했던가?

하지만 아직 어리다.

그리고 무신에 비하자면 그 영혼의 깊이도 얕아 보였다.

한데 어찌 벌써 자신을 넘어섰단 말인가?

이미 죽은 자가 되었지만, 그 역시 인간 중에서는 한때 수위를 다퉜던 무인이었다.

“아쉽네. 더 이상 얼굴을 가릴 수단도 없어서.”

그런 사내의 앞으로 다가와 앉은 황준우가 바닥을 보고 있는 사내를 뒤엎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 일그러진 얼굴과 눈빛이 보인다.

분명 기억하고 있는 인상이다.

다만 황준우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화상이라도 입은 듯 크게 일그러지고, 뭉개졌다.

눈빛과 표정, 그리고 특유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곁을 지나칠 때 무심코 지나쳤을지도 몰랐다.

“보, 보지 마! 보지 마시라고요!”

얼굴이 붉어진 진무영이 발버둥 치며 자신을 감추려 한다.

하나 이미 손목마저 모두 잘려나간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한정되어 있다.

“이 사람 누구야? 무당파 사람 같던데.”

“마왕. 죽은 자. 서연이 너도 아는 사람이야.”

“나도?”

“응. 전 무림맹주.”

“설마……?”

“응.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진무영.”

그 말에 놀란 황서연의 시선이 내리꽂힌다.

황준우는 차가운 시선으로 사내, 진무영을 노려본다.

“보지, 보지 말란 말입니다. 당신께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는…… 그것만은 정말 싫었단 말입니다.”

한때 최강의 적이었던 그가 괴로워하고 있다. 자신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흘리며 몸서리치고 있었다.

망가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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