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29화
제 329화
덕분에 황준우의 입장이 조금 더 난처해질 뻔도 했지만, 우마왕을 제외하고는 다른 인물들 모두 그런 달기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특히 서문지언의 경우 여우 요괴의 특징이라고 가볍게 생각한 듯했다.
이후, 항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마왕이 미간을 찌푸렸고, 백교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첩첩산중이란 게 이럴 때 쓰는 말이로군요.”
그야말로 산 넘어 산.
뭐 하나 쉽게 해결되는 일이 없었다.
이 상태로 그냥 물러날 상황도 아니다.
아직 황준우가 제강의 조각을 얻지 못했다.
뿐만이 아니더라도 문제는 더 있었다.
우마왕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항우라는 강적이 나타났다. 어찌 됐든 신세를 진 상황에 우마 일족을 나 몰라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너무 걱정은 마세요. 붙어 봐야 알겠지만, 이기면 되는 거니까.”
여유롭게 웃어 보인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고민해도 답은 없어요. 전생자와 다투기 전에 예비 연습이라고 생각하죠.”
“음…….”
피할 방법이 없다면, 고민은 의미가 없다.
황준우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조금 쉬고 생각하지. 어찌 됐든 오늘은 대승을 거둔 날이니.”
우선 우마왕이 다소 굳어진 분위기를 풀었다.
새로운 강적, 항우의 등장은 예상외지만 그들에게도 황준우가 있다.
마냥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난 잠시 일족들이랑 만나고 올게. 계약은 이행해야 하는 거니까.”
달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마왕을 향해 말했다.
“……부탁하지.”
“천하의 우마왕이 이 정도까지 양보하는데, 나도 최선을 다해볼게.”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한 달기는 황준우를 향해 눈웃음을 보이고는 손을 흔들었다.
“금방 올 테니까, 무리하지 말고 쉬고 있어. 알겠지?”
“무리랄 일이야 있겠냐만은.”
“그래도.”
“…….”
결국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야, 달기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우마왕이 말했다.
“저 여우 요괴 녀석, 너한테 완전히 빠졌네.”
“이렇게까지 사이가 좋아질 줄은 몰랐지.”
“사이가 좋은 정도가 아닌데?”
황준우의 대답에 우마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적어도 너보다는 저 요망한 여우 요괴 년을 오래 알았으니 하는 말이다만, 고작 사이가 조금 좋다고 하여 저렇게 애지중지할 성격이 아니다. 분명 다른 의미가 있겠지.”
“다른 의미라고는 해도…….”
이해할 수 없다.
황준우가 혼란스러운 눈을 하고 있자 우마왕이 혀를 찼다.
“돌아갈 것도 없다. 황준우. 저 여우 요괴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말도 안 돼.”
곧장 부정이 튀어나왔다.
말했듯 그녀와 황준우는 애초에 종족 자체가 다르다.
아무리 서로 닮은 형태를 하고 있다지만 여우와 인간이 사랑을 나눌 수는 없는 법이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놀랍게도 백교가 그런 우마왕의 이야기에 동의했다.
“확실히…… 평범한 분위기는 아니지.”
황서연 역시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이쯤 되자 사실을 부정한 황준우가 이상해질 마당이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종을 초월하는 일이라고.”
“인간에게 한계가 없다고 느낀 것이 본인 아니야? 종의 경계 따위가 뭐가 대수라고.”
“…….”
“황제 폐하가 싫어할 것 같은데.”
황서연이 조심스러운 음성을 흘렸다.
그녀 역시 처음 달기를 보며 거부감을 먼저 느꼈다.
사실 지금이라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자신을 아끼고 있음을 느끼고 있고, 또한 새끼 여우로만 보이던 모습에서 느꼈던 호감이 남아 있는 탓에 한발 물러나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황제 폐하?”
황서연의 말에 우마왕이 의문을 흘린다.
“지상의 제국에 아직 즉위하지 못한 새 황제가 그의 연인입니다.”
백교가 의문을 덜어주자, 우마왕의 표정이 더욱 오묘하게 변했다.
“연인? 새 황제가 여인이란 말이네.”
입맛을 다신 이후의 표정은 황준우가 처음 보는 다소 차가운 모습이다.
“……뭐, 네 마음까지 내가 왈가왈부할 것은 없겠지. 다만 그녀의 호의를 가볍게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용사에게 삼첩, 사첩이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 여우 요괴는 욕심이 많으니 말이다.”
“사랑이라니…….”
황준우는 당황하여 머리가 복잡해졌다.
달기에게만큼은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감정인 탓이다.
“마음에는 더욱 경계란 것이 없는 법이다. 종족은 우습고, 나이는 더 가볍지. 흐음…….”
묘한 콧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킨 우마왕이 기지개를 켰다.
“피곤하군. 나도 먼저 들어가겠다.”
우마왕마저 사라진 자리, 뒤를 따라 몸을 일으킨 황서연이 황준우를 향해 말했다.
“사실 난 저 말도 싫어. 남자든 여자든 서로를 향해 일편단심 해야 하는 것 아니야?”
표정은 물론 말투까지 다소 딱딱하다.
“아주 예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오빠는 조금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어.”
“…….”
변명할 틈도 없이 등을 돌린 황서연이 사라져 버린다.
이제 자리에 남은 사람은 백교와 서문지언뿐.
그중 백교는 부채를 펼치고는 웃음을 흘린다.
“큭큭, 이거 지금 항우가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여난(女難)이라…….”
그 말과 함께 서문지언이 묘한 신음을 흘린 이후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상황이 좋진 않아 이럴 때 말해야 하는가 싶지만…… 내 오랜 고민 끝에 과거의 잡념은 모두 털기로 하였소. 맹주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작금은 무협의 평화를 위해 힘쓰고 계신 마당이니, 대의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
“고마워. 부맹주.”
서문지언의 결심을 듣는 황준우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정말 기쁜 순간이었지만, 작금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그러니 내 쪽은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여난에 집중하시오. 큼. 참고로 나는 삼첩, 사첩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오.”
나름의 위로를 남긴 서문지언도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삼첩, 사첩.”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다.
어째서인지 황준우 역시 사랑이라면 단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스승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백교를 향했다.
그의 지혜는 언제나 황준우에게 큰 힘이 되었다.
바로 지금, 그런 지혜가 필요했다.
“고민할 이야기도 아닙니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세요. 스스로가 신이 아닌 인간이기를 결정하였듯 말이지요.”
“하지만…….”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법입니다.”
부채를 접은 백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다만 늦는 건 안됩니다. 그리고 대왕의 말씀대로 달기의 마음도 알아두시긴 해야 한다는 생각엔 저도 동의합니다. 저도 이만 들어가 쉬어야겠네요.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시는 게 더 좋을 겁니다.”
그렇게 모두가 떠난 자리.
홀로 남은 황준우의 눈에는 점점 더 깊은 고심이 어렸다.
‘책임을 지라니…… 그런 뜻이었어?’
문득, 팔선도로 떠나기 전 달기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런 뜻인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었으니 말이다.
“하아…….”
한숨은 계속해서 짙게 흘러나온다.
다만 백교의 말들은 확실히 마음속에 남았다.
‘결국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란 거지.’
다소 시간이 걸려도 좋다.
너무 늦지만 않으면 될 뿐이다.
‘사랑이라…….’
그저 귀여운 여우 요괴로만 생각했던 달기를 달리 보아야 할 때다.
달기가 돌아온 이후, 마호 일족과 우마 일족의 공식적인 동맹이 성사되었다.
오래도록 단 한 번도 손을 잡아 본 적이 없는 두 일족이었지만 서로의 능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당장 벌어진 유계의 대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두 세력이 함께라면 금오도까지 모두 평정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난 그런 쪽은 관심 없지만. 난 그냥 황준우 너랑만 함께 있으면 만족해. 물론 앞으로 선한 일도 많이 할 거고.”
돌아온 이후, 곧장 황준우를 찾아와 재잘재잘 상황을 이야기한 달기가 은근슬쩍 몸을 기대오며 말한다.
그러자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라 저도 모르게 살짝 팔을 뺀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흐음…….”
그런 황준우를 묘한 눈으로 보며 콧방귀를 뀐 달기가 고개를 끄덕인다.
눈매가 가늘어지고 수많은 감정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지만 황준우는 그를 외면했다.
“아, 그리고 쉬면서 고민해 봤는데 말이지. 항우 말이야.”
항우의 이야기가 나오자 달기의 눈빛이 또 한 번 변한다.
“결국 싸울 거지?”
“당연하지.”
걱정 가득한 질문에 황준우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근데 기다리라고 해서, 우리가 꼭 그럴 필요가 있나?”
“그럴…… 필요는 없지.”
달기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움직였다.
많이 죽었지만, 여전히 많은 것이 적의 병력이다.
하지만 우마 일족과 마호 일족의 연합은 그 병력을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는다.
수는 더 적을지 모르지만 오합지졸들에 비하자면 정예에 속했으니 말이다.
굳이 상대가 만들 판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
“우마왕하고 이야기를 해보자.”
결정을 내린 황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기가 그 뒤를 따라 우마왕의 방을 향해 찾아갔다.
“그러니까 먼저 치자는 거지?”
우마왕의 방 안.
찾아온 황준우의 말에 우마왕 역시 눈을 빛냈다.
두 번의 대승 이후 전황이 매우 좋아졌다.
거기다 마호 일족의 합류가 멀지 않았다.
확실히 굳이 안에만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상대가 좋아할 무대를 기다리는 건 멍청한 짓이지. 동의한다. 마호 일족은 언제쯤 합류 가능하지?”
“오늘 밤이면 올 거야.”
“수는?”
“칠만 정도.”
달기의 답에 우마왕이 눈을 반짝였다.
“힘을 많이 썼군. 마호 일족에서도 전사라고 할 녀석들은 십만 정도라고 아는데.”
“더 힘내보고 싶었는데, 아시다시피 눈 빨간 녀석들이 많아서.”
“여우 요괴 녀석들이 영악한 거야 잘 알지.”
현재 달기를 따르는 여우 요괴들, 마호 일족은 그 수가 제법 많은 편이다. 총 숫자는 이십을 훌쩍 넘고, 전사가 십만 이상이다.
반면 그녀를 따르지 않은 여우 요괴들도 있는데, 그들의 숫자가 약 삼만이 넘는다.
호시탐탐 여우 일족의 지배구조를 바꾸고 싶어 하는 그들은, 마호궁이 완전히 비어버린다면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오늘 밤, 칠만이 더 합류라. 우리 일족의 살아남은 전사는 삼천이다.”
본래 우마 일족의 전사는 삼천오백 정도였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천이 넘게 죽었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적은 숫자로 잘 버텼네.”
“우마 일족의 전사 하나는 어지간한 요괴 일만과 같다.”
우마왕이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도, 우울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 대단한 전사 중 오백이 죽었다.
생각지 못했던 초반 기습에 그 절반이 죽었다지만 큰 손실이었다. 우마 일족의 씨 자체가 귀한 것도 큰 문제였다.
“그래도 아직 삼천이나 있으니까, 마음이 든든하네.”
달기가 그녀답지 않게 그런 우마왕을 두둔했다.
일족의 죽음이 주는 고통에 대해 잘 알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그녀 역시 유계에서는 한 일족을 이끄는 왕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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