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32화
제 332화
‘아직, 아직은 아니야.’
치밀어 오르는 본능을 숨기기 위해 거친 콧김을 내뱉은 우마왕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눈이 가지만, 계속해서 달기를 보고 있으면 도저히 참지 못하게 될 듯했다.
“어디…… 무시무시한 구원자 녀석이 데려온 친구들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손으로는 뒷짐을 지고, 반대편 손으로는 부채질을 하고 있는 백교였다. 은은하게 그의 주변으로 기운이 몰려들고 있었지만 어떠한 행동도 보이지 않는다.
‘저놈, 저거…….’
지식의 보고.
천하의 시작부터 함께한 유일한 영물이라 불리는 백교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우마왕이었다.
‘유계의 영기를 잡아먹고 본신의 힘을 불리고 있었군.’
정확하게 말을 하자면, 힘을 복구하고 있는 것이 옳을 터였다.
오랜 시간 구원자를 찾아 지상을 헤맨 탓에 본래의 백교, 백택이 가지고 있어야 할 힘이 많이 줄었다. 나약해졌다고까지 생각했는데 유계에 온 이후 빠르게 회복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다만 그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다시 지상으로 돌아갈 때를 대비하는 건가.’
마음에는 드는 행태는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문득 우마왕과 시선을 마주친 백교가 웃음을 보였다.
마치 그런 그녀의 심경을 모두 다 읽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다.
“재수 없는 녀석.”
가볍게 혀를 차며 그에게서 시선을 뗀 우마왕의 시선이 이번에는 서문지언을 향했다.
“굉장히 마음에 들어.”
그의 무공은 패도적이고 강렬하다.
적이 앞에 있다면 가리지 않고 깨부순다.
피한다는 선택지는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도 않을 터였다. 우마왕이 가장 신임하는 종류의 인물상이었다.
“기합이 제법 많이 들어갔군. 직접 길러보고도 싶은데…….”
기운의 빛이 제법 밝은 것이 아무래도 유계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다.
“잘하면 손에 꼽히는 무선이 되려나.”
그런 인재를 선계에 주려니 절로 입맛이 다셔졌다.
‘꼬셔볼까?’
고민은 잠시였다.
방금 전, 그녀의 눈앞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 탓이었다.
“저 소녀…….”
연분홍빛의 강기를 꽃잎처럼 흩날리며 전장을 휩쓸던 황서연의 검극에 걸린 마왕 중 하나가 죽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황준우와 달기, 우마왕 등과 비교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지만 기본적으로 마왕이란 존재 역시 유계의 강자들 중 하나다. 그런 마왕을 아직도 소녀티가 남은 여무인이 죽였다.
놀라운 점은, 그 이후로도 황서연의 검이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더, 더 빨라지고 있다. 마치 전투를 통해 성장하고 있는 것만 같다.
‘아니, 분명히 성장하고 있어.’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벽을 넘어설지는 모르겠지만 애초부터 인간이라 불리기에 너무 멀리 와 버린 황준우를 제외하고는 최고의 재능이다.
‘황준우의 영향? 아니면 정말 모든 우연의 산물?’
경악하는 사이, 이윽고 하늘로 날아오른 황서연이 둘이나 되는 뇌신의 목을 떨어트리고는 주변을 휘감던 기운을 넓게 떨쳤다.
무거운 무게감이 전장을 짧게나마 짓누른다.
그 범위도 미약하고, 힘도 모자라지만 근본이 어디서부터 출발하였는지 모를 수준은 아니었다.
‘지금 저 꼬맹이가 항우를 흉내 낸 거야?’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지않은 미래 지상의 황씨 일가가 세계의 모든 방면을 지배했다고 하여도 납득해 버릴지도 모를 수준이다.
“이거 진짜 내가 나설 차례가 없어질지도 모르겠는데…….”
방금 전 달기에 의하여 또 하나의 요괴왕이 생을 마감했다.
이 상태면 말 그대로 나설 틈도 없이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전황이 너무 좋았다.
물론 불쾌한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힘쓸 일이 없어질지도 모르니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다소 무리를 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이 뒤에 진짜 전생자 놈이 있으면 혹시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그를 과대평가하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긴장이었나.’
별이 반짝이는 유계의 하늘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우마왕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황준우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거리에 대한 염두는 단 하나뿐이었다.
멀리, 최대한 더 멀리.
둘의 싸움에 어떠한 다른 영향도 없기를 바란 탓이다.
항우가 탄 오추마는 그런 황준우를 조금도 지체 없이 쫓았다.
그렇게 두 무신은, 적과 아는 물론 주변에 무엇도 남지 않은 유계의 거대한 황야지대에 섰다.
휑하다 못해 주변에 어떠한 생명의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삭막한 바람에는 죽음의 내음이 물씬 풍겼다.
“이곳이 네가 선택한 전장인가.”
오추마 위에 곧게 선 항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차가운 미소를 보이며 말한다.
“놀랍군. 무(武) 외에 무엇도 보지 않아도 그 경지에 다다르기가 쉽지 않거늘.”
“…….”
황준우는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소 거칠어진 숨결을 정리하고 우주를 관조한다. 그 끝이 없는 드넓은 무한의 영역에는 황준우와 항우, 오로지 두 무신만이 자리 잡고 있다.
“소녀 측은 네 혈육인가? 그녀에게도 자격이 있어 보이더군.”
항우는 그답지 않게 많은 말을 했다.
질문이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즐거운 일이다. 세상에 더욱 많은 무신이 생겨날수록, 더 다양한 무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은가. 또 그 넓은 세계에 나뉜 무신의 이름이 하나가 된다면…… 그 존재는 어떠한 신이 될 것인가.”
오추마 위, 양팔을 넓게 벌린 항우의 두 눈이 번쩍인다. 기대감 가득한 시선은 먼 미래를 직시하고 있는 듯했다.
“쓸데없는 주저리는 됐어. 휴식은 충분해.”
처음으로, 그런 항우의 말에 답한 황준우가 수왕검을 뽑았다.
“그런 것 같군.”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항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짱을 풀었다.
“와라.”
말은 짧았다.
어떠한 방비도 없는 행동은 오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무신 항우는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가려야지.”
오추마 위, 여유롭게 웃고 있는 항우를 향해 공간을 접히고 뛰어든 황준우의 검이 번쩍였다.
동시에 두 눈에서 광망이 쏟아진 항우의 양손이 움직였다.
다시 한번 세상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대기가 들끓었다.
투두둑-!
지면이 떨리고 하늘의 별빛이 휘청인다.
순간, 항우는 황준우의 신형을 놓쳤다.
다급하게 움직인 손길은 오추마의 고삐를 돌린다.
“그러게 여유 부릴 때는 아니라니까.”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복부에 묵직한 무게감이 전달되었다.
“흡……!”
배에 힘을 주어 버티려던 항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내 그의 신형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놀란 오추마가 항우를 쫓으려 하지만 그보다 황준우가 더 빨랐다.
내뻗어진 수왕검과 항우의 주먹이 허공에서 또 한 번 격돌했다.
폭음과 함께 지면이 움푹 파였다.
황금빛 기운이 주변으로 폭사되며 항우의 몸을 짓누른 것도 그 동시였다.
거대한 충격과 함께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지면 전체에 진동이 일며 하늘까지 닿는 먼지구름이 솟아났다.
그 틈새를 가르고 묵빛의 기운이 하늘을 찢어 놓을 듯 솟아났다.
그를 피해 단숨에 거리를 벌리고 수왕검을 정면으로 내세운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먼지구름 속,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항우의 미소가 보인다.
“과연, 가장 단시간 내에 이 몸을 오추마로부터 끌어내린 무신이로다.”
목소리가 하늘을 울린다.
눈빛에는 뜨거운 기운이 일렁인다.
“이제야 시야가 맞춰졌군. 그러게 오만 부리지 말고 진즉에 내려오지 그랬어.”
그를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열기를 일으킨 황준우의 입가로도 미소가 떠올랐다.
고작 이 정도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는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다.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서서히 걷히는 먼지구름 사이, 곁으로 다가온 오추마를 손짓으로 물린 항우가 등 뒤에서 거대한 대도를 뽑아 들었다.
도에서부터 솟아난 묵빛 강기는 순식간에 하늘까지 솟아났다.
“그럼, 조금 더 힘을 내 보지.”
별을 가르는 묵빛의 강기가 황준우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분명 압도적으로 유리한 전장이었다.
군의 기세 역시 하늘을 찔렀으니 밤이 끝나기도 전, 전쟁은 끝날 줄로만 알았다.
우마왕의 시선 끝자락, 마치 어둠의 물결처럼 나타난 대군세가 합류한 순간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너무 쉬웠던 전쟁.
간단하게 다가올 것만 같았던 승리.
무언가 석연치 않다고만 생각했다.
항우라면 모를까, 영악한 전생자가 손 놓고 두고만 보고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적이 온다.”
차가운 우마왕의 목소리는 전장 곳곳에 울려 퍼졌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저 멀리서 몰려드는 검은 군세의 파도를 향했다.
쿠구궁-!
지면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개미 떼와 같은 무수히 많은 망령과 요괴들이 성난 눈을 빛내며 전장을 향해 뛰어든다.
땅뿐만이 아니었다.
검은 하늘을 더욱 새카맣게 물들인 적의 군세가 갑작스러운 소나기처럼 우마 일족과 마호 일족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들 중에는 요괴왕, 마왕이라 불리는 고위 존재도 다수 섞여 있다.
마치 우마 일족과 마호 일족을 제외한 모든 요괴와 망령들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듯했다.
다행인 것은 그 당황스러운 사태에도 아군의 군세가 흔들림 없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황스럽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지금? 지금인가?’
우마왕은 한 손에 파초선을 꽉 잡은 채 고심 어린 눈길을 했다.
여기서 한번 밀리기 시작하면 끝장이다.
검은 메뚜기 떼와 같은 적들은 아군의 모든 군세를 순식간에 갉아먹고 성벽까지 쓰러트린 후 그녀의 영토를 짓밟을 터였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다 못해 피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르다.
역시 참아야 한다.
아직 가장 큰 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냐!’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마왕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전장에 바로 그가 있다.
세상의 모든 악의를 집어삼킨 것만 같은 마물.
그 끝없는 어두운 감정은 전장이 주는 공포보다 더 무섭게 우마왕의 전신을 잡아먹고 있었다.
‘놈을 잡아야 돼.’
놓치면 아주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파초선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문 우마왕이 붉어진 눈으로 그 악의의 근원을 쫓고 있을 때였다.
[캬아아악-!]
달기의 비명이 높이 울려 퍼졌다.
각기 금색과 은색의 뿔을 자랑하는 요괴가 달기의 주변을 맴돌며 빠르게 손을 쓰고 있다.
지면에서는 붉은 눈을 빛내는 뱀 요괴가 달기의 꼬리를 휘감고 있는 채였다.
‘상위 요괴왕 녀석들도 나섰구나.’
하나, 하나가 과거의 달기와 맞먹는 존재들.
아무리 더 강해졌다고는 해도 그녀 혼자 감당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자칫하면 달기가 영멸한다.
‘외면해야 하나?’
이성적인 생각이라면 그것이 옳다.
달기가 죽어도, 전생자를 물리는 측이 이득이다.
그녀의 모든 계산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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