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37화
제 337화
본래라면 이 육신에 조금 더 적응하며 성장의 시간을 보냈을 터였다.
하나 작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본신에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분신을 죽이는 일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스스로의 미간 중앙을 향해 주먹을 놓은 채 환한 웃음을 보인 전생자의 주먹이 매섭게 휘둘러졌다.
사람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지며 사방으로 핏물이 비산한다.
그 광경을, 유계로 흘러가는 영혼의 의식 속에서 바라보는 전생자의 영혼이 기쁨을 표현하며 부르르 떨었다.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한다는 것은 설령 자신의 육체가 되었다 한들 그에게 있어서는 큰 쾌감인 탓이었다.
하나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아직 그의 악의는 너무나도 허전하게 텅 비어 있었다.
더 많은 파괴와 죽음, 그리고 절망이 필요했다.
‘심한 갈증이 나는군.’
짜증 어린 생각을 마지막으로, 전생자의 의식은 잠시 암전되었다.
심검, 무한의 반동은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육신은 물론 정신에까지 균열이 생기니 단순한 운기조식으로는 회복할 수가 없다.
덕분에 생각보다 오랜 시간 의식을 집중해야 했던 황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곧장 몸을 날렸다.
직후 황금안을 통해 상세를 살핀 이후에는 의문을 느꼈다.
‘전생자는?’
굉장한 살의와 악의.
항우에는 못 미치지만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지던 전생자는 일행들이 감당하기 벅찬 적이었다.
한데 전장 어디에서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다소 지친 상황에서도 승리로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놈이 물러났나?’
황금안은 곧장 환자들을 찾아 헤맸다.
그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이 너무나 이 자리에 많이 모여 있는 탓이다.
“모두 무사하구나!”
어찌나 기뻤던지, 육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다소 다치고, 지쳐 보이기는 하지만 죽은 이는 누구 하나 없다.
반신불수가 될 정도의 중상을 입은 인물도 없었다.
안도하는 마음에 표정에 미소가 떠오른 순간, 이미 황준우는 정리가 끝나가는 전장에 도달해 있었다.
‘시간을 끌 이유가 없지.’
정리가 끝나간다지만, 아직까지 상황을 밀고 당기려고 노력하는 적의 주요 인물들이 몇 남아 있었다.
여기서 패배한다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남지 않은 마왕, 요괴왕들이다.
하늘에 떠 그런 그들을 확인한 황준우는 망설임 없이 다소 화려한 암살자가 되는 것을 자처했다.
황금빛이 전장을 스쳐 지나갔고, 마왕 혹은 요괴왕 급의 고위 존재들이 칼바람을 맞은 대나무처럼 삽시간에 쓰러져 버렸다.
“오빠!”
지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굳은 표정으로 전장을 헤쳐 나가던 황서연이 가장 먼저 그의 등장을 알아보았다.
그 목소리를 들은 다른 이들도 함께 시선을 돌렸다.
“황준우?”
주연하가 눈을 반짝이며 전장을 가로 지르는 황금 혜성을 쫓았다.
“도련님이 오셨다!”
“주군!”
경호와 홍산 역시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단지 그뿐임에도 불구하고 기세가 더욱 높이 솟았다.
간단한 이유다.
황준우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것.
무신, 항우가 쓰러졌다는 뜻이다.
밀리고 있는 상황에 마지막 희망으로 그를 떠올리고 있던 적의 기세가 밑바닥을 쳤다.
결국 그의 등장은 안 그래도 유리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마지막까지 눈치를 보며 전장의 일선을 막아서던 마왕 하나가 무기를 버리고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
한때 중원에서 천살검(千殺劍)이라 불릴 정도의 이름 높은 대마두였지만, 황준우에게서 도망친다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항복……!”
살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하던 그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한다.
‘아, 안 돼…….’
영멸이라는,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감각에 그의 뇌리가 공포로 가득 차올랐다.
남은 것은 끝없는 공허뿐이었다.
길었던, 큰 전쟁이 끝이 났다.
우마 일족의 전사 전원은 하늘을 향해 높이 포효하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전장 곳곳에 지친 표정으로 각자의 병장기를 든 채 거친 숨을 흘리고 있는 일행들을 바라본 황준우의 입가로도 미소가 떠올랐다.
“다들 고생했어.”
그 누구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황준우는 그 사실에 너무나도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곧장 뛰어들어 황준우의 품에 안긴 황서연이 볼을 마구잡이로 비볐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죽음을 가까이 두었었다.
전쟁이 끝나고, 황준우와 직시하자 그 순간이 다시금 떠오르며 가슴 한편이 서늘해진 탓이다.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 온기, 앞으로 가지게 될 수많은 무언가가 모두 사라져 버릴 뻔했던 공포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제야 절실히 깨달은 그녀였다.
“고생 많았지?”
그런 황서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내린 황준우가 물었다.
그 역시 아찔했던 순간을 멀리서나마 두 눈으로 보았다. 당장 달려가지 못해 어찌나 마음이 조급했는지 모른다.
“괜찮아. 괜찮아. 이렇게 다시 봤으니까 충분해.”
당장 울 것 같은 얼굴이면서도, 눈물 한 방울 비추지 않은 황서연이 황준우를 안은 손에 힘을 더욱 주며 말했다.
“황준우.”
“주연하.”
또 한 명, 근처로 다가와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황준우가 고개를 돌렸다.
거친 전장에서도 미색이 하나 죽지 않은 그녀가 부드러운 미소로 그를 반기고 있다.
“너도…….”
“고생 많았다.”
황준우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오히려 위로를 먼저 건넨 것은 주연하 측이었다.
선계에서 유계로 넘어오기 전, 서왕모를 통해 상황을 일부 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황준우가 무시무시해 보이는 무신, 항우와 결전을 펼치기 위해 나서는 장면도 있었다.
심장이 철렁하고 겁이 나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스스로가 해낼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전생자에게 습격당한 일행들을 돕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네가 이길 거라 믿었다.”
“모두와 약속했으니까.”
자신감 있게 말한 황준우의 시선이 아군 진영의 끝자락에 향했다.
지친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부채를 흔들고 있는 백교의 모습이 보였다.
양옆으로는 또다시 의식을 잃은 우마왕과,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달기가 보였다.
“우선 저곳으로 가자. 나 먼저 가 있을게.”
황준우의 말에 어느덧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또 다른 일행들, 경호와 홍산, 서문지언등도 함께 몸을 움직였다.
그 사이,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 전장이었던 장소를 넘어 백교의 앞에 선 황준우가 물었다.
“검선은요?”
검선 여동빈.
황준우의 몸과 연결해 놓았던 인연의 끈을 통해 선계의 문을 지나 유계에 강림했던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이 주변에 함께 지친 모습으로 앉아 있었는데 말이다.
“선계로 돌아가셨습니다. 부상을 치료하기도 하셔야 하고, 애초부터 인연의 끈으로 강제로 넘어오신 탓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일단은 확실히 무사하다는 뜻.
혹시나 하는 걱정도 사라졌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금안을 빛내 두 여인을 살펴보았다.
‘달기는 괜찮아.’
어떠한 중독의 흔적이 있었지만 이미 말끔히 치료된 상태다.
아무래도 백교가 힘을 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우마왕…….’
실제로 황준우가 이곳에 먼저 달려온 이유였다.
잠시 눈을 뜬 후, 또다시 의식을 잃은 그녀의 상태는 굉장히 심각했다.
‘영혼의 구멍이 훨씬 커졌잖아.’
아마 전생자와의 싸움에서 무리해서 힘을 쓴 탓일 터라고 짐작한 황준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우마왕은 방법이 없을까요?”
기왕이면 돕고 싶다.
하지만 황준우는 영혼의 구멍을 메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혼은 정신이고, 곧 소우주다.
신이라고 한들 스스로 외, 남의 세계를 어찌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저로서는 불가능합니다.”
백교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가능했다면 진즉에 그가 손을 썼을 터였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라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네요.”
황준우가 눈을 반짝 빛내며 묻자, 묘한 표정의 백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숙이 직접 온다면 어떻게든 되겠지만…….”
그럴 상황이었다면 애초부터 고민도 하지 않았단 것은 마찬가지였다.
“뭐 또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난감한 표정의 백교가 부채를 펼치며 조심스럽게 말할 때쯤, 뒤따라오던 일행들이 도착했다.
“무슨 일이에요? 심각한 상황?”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일행들 사이, 황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게…….”
미간을 찌푸린 황준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난…… 괜찮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우마왕이 입을 연다.
아무래도 일행들이 도착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했다.
“무리하지 마.”
걱정된 시선을 한 황준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몸은…… 우마왕이다. 그리고 우마 일족은 유계 제일이지.”
인상을 찌푸린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된 우마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뒤로 넘기는 행동에는 힘이 가득해 보인다.
“동정이나 받을 만큼 나약해진 적은 없어.”
처음부터 끝까지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행동에 결국 황준우는 입을 닫았다.
“그렇게 표정 굳히지 마. 어찌 됐든 승리했으니까. 한동안은 이 기쁨을 만끽해야겠지.”
오히려 황준우를 향해 미소를 보인 우마왕이 터벅터벅 걸어 함성을 내지르고 있는 우마 일족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힘내서 싸워준 용맹한 전사들아.”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힘도 그리 실려 있지 않았다.
전장 곳곳을 울리는 신묘한 느낌도 없었다.
한데도 모든 우마 일족이 그녀를 주목했다.
마치 그들의 왕이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같은 모습이다.
“집으로 돌아가자.”
그 소박한 말에, 우마 일족 전원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쟁의 끝이 주는 보상 중 가장 달콤한 것은 승리가 아닌 휴식.
그중에서도 가족이, 동료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 쉴 수 있다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힘없는 터벅 걸음이었지만, 전열의 가장 앞에 선 우마왕이 모두를 이끌고 성으로 돌아왔다.
승리 소식과, 귀환 소식에 우마왕의 성이 다시 한번 들썩였다.
하지만 곧장 축제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함께 전장에서 힘내서 싸운 마호 일족의 왕, 달기가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상태였던 탓이다.
그리고 다음 날.
달기가 눈을 떴다.
“황준우는!?”
“아, 지금은 중앙 방에…….”
중앙 방은 우마왕이 일행들 모두를 불러 모을 때마다 사용하던 장소다.
“이겼구나!”
그 장소에 황준우가 있다는 이야기는 간단했다.
황준우가 항우를 쓰러트렸다.
애초부터 자신이 우마왕의 궁에서 눈을 떴다는 것만으로도 눈치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그런 생각을 정리할 틈이 없었다.
‘황준우가 이겼어. 무사하다고.’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것보다, 그 사실을 기뻐한 그녀가 곧장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는 곧장 뛰어나가려다 말고 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