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338화 (338/373)

학사재생 338화

제 338화

“참, 동경(銅鏡)!”

시녀들이 건네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달기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당장에라도 뛰어가고 싶었지만 독에 중독되었던 데다 오랜 시간 의식이 없었던 만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 상태론 절대 안 돼!”

적어도 그녀의 기준에 있어 좋아하는 남자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벼운 술법 몇 개를 통해 다소 퍼석해 보일 수 있는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피부도 최대한 깨끗해 보이게 다듬었다. 그러고 나서도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한참을 가는 눈으로 동경 속 자신을 바라보던 달기가 살짝 물러난 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시녀들에게 물었다.

“이 옷, 지금 어때?”

작금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우마 일족 측에서 준비한 단색의 깔끔한 복장이었다. 화려한 장식도 없고 이렇다 할 문양도 없지만 여백의 미(美)는 있는 형식.

“아름다우십니다.”

그런 그녀의 옷을 향해 우마 일족의 시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정말?”

시녀들은 마치 이미 저장되어 있는 목소리를 내뱉는 것만 같이 담담해 보였다.

‘우마 일족의 미적 관점을 믿을 수가 있나.’

그런 시녀를 달기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머리 위로 작은 뿔이 솟은 것을 제외하자면 인간 여성과 큰 차이가 없다지만, 꾸민 느낌은 없다.

우마왕 본인이 그러했듯 시녀들 역시 활동하기 편하고 가벼운 느낌이 가득해 보였다.

꾸미길 좋아하고 화려한 멋을 사랑하는 달기와는 엄연히 다른 편이다.

결국 시녀가 말하는 평가는 믿지 않기로 결정한 달기는 대신해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내 원래 옷은?”

“피가 많이 묻고 찢어진 곳이 많아 버렸습니다.”

물론 들고 온 옷이 하나뿐일 리가 없었다.

“그것 말고 원래 가져왔던 것들.”

“아, 그거라면 지금 중앙 방에…….”

“중앙 방에는 황준우가 있잖아?”

“예. 아직까지는 계신 걸로 압니다.”

시녀가 이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애초부터 황준우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인데, 거기까지 이 꼴로 가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달기였다.

‘가서 갈아입을 옷 가져오는 것도 이상하고.’

절로 눈매가 가늘어졌다.

“애초에 내 방에 놔뒀으면 좋았잖아.”

그녀의 투덜거림에 시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오셨을 때 그냥 편한 데 두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야 내가 손 가기 편한 곳에…….”

투덜거리며 말하던 달기는 대신해서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 우직한 우마 일족한테 바랄 걸 바라야지.”

결국 고민하던 달기는 다른 선택을 했다.

“우마왕 방이 어디지?”

“여기서 우측으로 방 두 개를 넘어가면…… 어디 가십니까?”

“질문한 이유가 뭐겠어?”

깔끔하게 답한 달기가 망설임 없이 우마왕의 방을 향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시녀는 그녀를 말릴까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입을 다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말린다고 들을 달기가 아니란 사실을 제법 잘 아는 탓이었다.

“우마왕!”

달기는 그 상태로 단숨에 우마왕의 방 입구에 도착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그 동작은 포기한 시녀의 미간마저 찌푸리게 할 정도였다.

“예의는 차려주셔야지요.”

꽤나 큰 목소리로 말했지만 달기는 뒤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하여 방 안에 있는 우마왕을 보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깜짝이야.”

먼저 입을 연 측은 오히려 불시의 방문자인 달기였다.

작금 그녀의 눈에는 황준우와 함께 이 방을 방문했을 때에는 보지 못했던 지상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귀여운 동물 인형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속에 파묻힌 듯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우마왕의 모습은 조금의 괴리감도 없어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양 볼이 붉어질 정도로 즐거워 보였고, 지금은 터질 듯이 빨갛다.

마치 힘을 쓸 때의, 성난 황소와 같은 모습이다.

“너…… 너……!”

그 뜨거운 목소리에 살짝 물러난 달기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 그 와중에 여우 인형은 없네?”

“내가 꼭 네년을 죽여 버릴 거야!”

결국 참지 못한 우마왕이 성난 황소처럼 뿔을 정면으로 세운 채 달려오기 시작했다.

“꺄악-!”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뒤틀어 피하려던 달기의 옷자락을 누군가 움켜잡았다.

소리 없이 그녀의 뒤편으로 접근한 건 암살자와 같은 우마 일족의 시녀였다.

“너……?”

“그러게 예의는 지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황스러웠지만, 이미 때는 뒤늦은 후였다.

작은 뿔에 어딘가 뚫리고는 하지 않았지만 제법 둔탁한 머리의 감촉이 복부로 파고드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아파!”

달기가 소리쳤고, 그러거나 말거나 분하다는 듯 몇 번이고 더 달기의 몸에 머리를 박은 우마왕이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죽어! 죽으란 말야!”

그렇게 오랜만에 깨어난 달기는 한참 동안 우마왕의 박치기에 당하며 비명과 신음을 내지르는 꼴이 되었다.

일련의 소동이 지나간 이후.

조금은 분이 풀렸는지 씩씩거리는 숨결을 내뱉으면서도 이어가던 박치기를 멈춘 우마왕이 무릎 꿇고 주저앉은 달기를 바라보며 쌍심지를 세웠다.

“한 번만 더 남의 방문 제멋대로 열기만 해봐.”

“끄으으…….”

꽤나 괴로운 표정으로 복부를 잡고 있는 달기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즐기는 시선을 보내던 우마왕은, 이 일의 일등공신에게 잊지 않고 칭찬을 건넸다.

“잘했어. 우향. 나중에 꼭 내가 선물 하나 줄게.”

“기왕이면 저 토끼 인형으로 부탁드립니다.”

“어? 저 녀석은 내가 가장 아끼는 인형 일곱 번째인데……. 뭐, 이 건방진 여우 계집을 혼내줬으니 충분히 가치가 있는 것 같네. 그래, 너 줄게.”

“감사합니다.”

두 우마 일족의 대화에 무릎 꿇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달기의 뇌리에는 어이없다는 감정이 연신 스쳐 지나갔다.

‘이 미친 우마 일족은 뭐라는 거야?’

고작 인형 따위 때문에 이런 비참한 꼴이 될 줄이야!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는 건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해 당장에라도 술법을 부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우마왕을 괴롭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마왕 달기가 아니었다.

업보를 씻고, 성스러운 존재로 거듭나기로 서왕모와 약속까지 하며 마의 틀을 벗어던졌지 않은가?

무엇보다 제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 혼난 주제에 그런 일까지 한다면 황준우가 좋아하지 않을 거다.

‘분명 혼날 거야.’

그 사실에 어쩔 수 없이 분을 삭인 달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뭐? 왜? 해보자고?”

그 기세가 제법 스산해 우마왕이 더욱 쌍심지를 세우며 외쳤다.

“됐다. 인형이나 좋아하는 어린애하고 내가 다툴 이유는 없지.”

“한 번만 더 그 말 입 바깥으로 내뱉으면 박치기 일만 번 형이다.”

“일만 번 하다 네가 먼저 쓰러질 것 같은데?”

이를 간 우마왕의 눈에 또다시 분노가 솟으려 할 때였다.

“어쨌든, 멋대로 열고 들어간 건 미안. 그리고 방 안에서 본 것도 일단은 비밀로 할게.”

“……뭐?”

자신의 귀를 순간 의심한 우마왕의 말에 달기가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 비밀로 한다고! 너도 부끄러우니까 이렇게 화내는 거일 것 아냐.”

“아니, 그것 말고 다른 말 했잖아?”

다른 말을 의도하는 우마왕의 질문에,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고, 몇 번이나 아랫입술을 깨물던 달기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하다고. 네게 이런 취미가 있는 줄 알았으면 나도 함부로 보지 않았을 거야.”

다소 불쾌한 표현이 섞이긴 했지만 사과는 분명 사과였다.

평생을 살면서 그 자존심 높은 구미호, 달기에게 사과를 들을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우마왕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얘가 그 달기라고?’

사과는커녕 저 화났다고 방 안의 인형을 여우 불로 태워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고약한 성격의 소유자가 우마왕이 아는 달기다.

한데 지금 그런 달기가 분명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를 건넨 것이다.

얼떨떨한 기분의 우마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 그래.”

머릿속에는 곧장 황준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다 그 녀석 탓인가?’

문득 황준우를 무력만 높은 무신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 아니 여우 요괴 마왕을 이쯤이나 갱생시킬 수 있으면 뭘 해도 될 인물이지 않을까?

“그 표정 짜증 나.”

“그냥 그렇다고.”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린 달기의 눈꺼풀이 떨린다.

생각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당장 등을 돌려 벗어나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부탁 하나만 들어줘.”

“부탁?”

“……옷 좀 빌려줘.”

“그래도 너도 대왕인데 다른 우마 일족보다는 상황이 나을 거 아니야.”

“뭐, 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다만은…….”

“체형이야 살짝 조절하면 되니까.”

굳이 키를 제외하고도 특정 몇몇 부위가 전혀 맞지 않을 수준이었지만, 변신이 주특기인 달기 입장에서야 어려운 일도 아니다.

“뭐 그렇다면야…….”

우마왕이 고개를 끄덕이고, 달기는 기다렸다는 듯 방 안에 들어가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리쳤다.

“꺄악-! 우마왕 너! 굉장하잖아!”

달기가 우마왕의 방을 찾아가서 옷을 빌려 달라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어찌 됐든 우마왕 역시 한 일족의 왕이고,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어쩔 수 없이 입을 수밖에 없는 공식적인 복장이 몇 있을 것이다.

그런 곳이라면 일반적인 우마 일족의 옷보다는 화려할 테고 제법 예뻐 보일 것이다.

어찌 됐든 우마왕 역시 여성이었으니 말이다.

그 생각은 반만 맞았다.

우마왕은 공식 석상에서도 언제나 편한 복장으로 돌아다녔다. 애초부터 우마 일족과 꾸민다는 행위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탓이다.

하나 그것과 별개로 예쁜 옷을 모으는 취미 정도는 있었다. 그중에는 과감하다 할 만한 독특한 것들도 많았다. 자신의 새로운 취미를 들켰지만 우마왕은 기분이 나쁠 틈도 없었다.

달기는 정말로 꽃이 피듯 활짝 웃었고, 심지어는 우마왕을 끌어안고 너무나 기뻐하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는데 타박을 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이 옷은 장식도 화려한데 색상도 너무 튀어서 좋지 않아. 언뜻 보면 예뻐 보일 수도 있지만 어울리기 힘들지.”

“그런가?”

“응, 나쯤 되면 어떻게든 소화하겠지만 이럴 때 입을 옷은 아니야. 그래도 감각 자체는 훌륭하네.”

“그렇군.”

자신이 모은 옷 하나, 하나에 평을 하며 자신의 몸에 빗대는 달기의 모습에 맞장구를 치는 우마왕의 표정은 오묘했다.

“꺄아! 이건 완전 귀여워. 일부 취향에게 아주 제대로 먹히겠는데?”

“저, 정말?”

“응. 중원에서 보던 느낌은 아닌데? 이건 대체 어디서 구한 거야?”

때로는 신랄할 만큼 모욕적인 말도 했지만, 어쩔 때는 아주 기쁜 듯이 칭찬도 건넨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