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39화
제 339화
“서장에서 건너온 물품 중 하나다. 내가 지상에 있을 때…….”
덕분에 우마왕 역시 저도 모르게 신이 나서 떠들고는 했다.
정신을 차린 이후에는 자신이 웃고 있단 사실에 황당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그러는 사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옷을 걸쳐 입은 달기가 동경 속 자신을 바라보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 크게 돌았다.
“흠. 이 정도면 괜찮아.”
이후 흡족한 듯 웃음을 보이고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의 그이를 보러 가 볼까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우마왕은 잊고 있던 사실 중 하나를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황준우랑 연애한다던 지상의 황제도 이곳에 왔는데…….”
마냥 즐거워 보이던 달기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삽시간이었다.
“말 그대로다. 황준우와 연인 사이인 지상의 황제…….”
“예뻐?”
“상당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 우마왕이 팔짱을 꼈다.
“연인이라…….”
달기의 두 눈에 감출 수 없는 동요가 떠올랐다.
“생각도 못 했나 보지?”
“뭐…… 아니. 그럴 리가. 솔직히 우리 준우 정도면 굉장히 매력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용은 담담한 듯하지만 목소리는 떨린다.
움켜쥔 두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 역시 감출 수 없었다.
“천하의 여우 요괴가 사내를 홀리다 못해 오히려 홀려서 이러고 있는 꼴이라니…… 쯧쯧.”
혀를 차는 우마왕에게 쌍심지를 돋은 달기의 날카로운 시선이 향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다만, 대체 왜 좋아하게 된 거냐? 신격을 얻은, 인간이길 자처하는 괴짜를 말이다.”
“좋아하는 데 이유가 어디 있어.”
“네가 홀렸던 수많은 사내가 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로구먼. 첨언을 하자면, 그때마다 네가 코웃음을 쳤었지.”
“…….”
붉어진 달기의 얼굴이 이제는 새빨갛다 못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그, 그야…… 몰랐으니까. 애초에 나도 처음인걸.”
달기에게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가 낯설다.
말했듯 언제나 사랑받는 존재에 속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제야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법을 알기 시작했다.
이유를 묻는다면 참으로 난감했다.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생각해 보면 첫인상은 그저 무시무시하게 강한 인간이었다.
조금 더 알고 보니 성격은 제멋대로에 고집도 엄청나게 강하다.
한데 좋아졌다.
물론 잘생기기는 했다.
인간치고 상당히, 제법이다.
하지만 따지자면 고작 그런 사실이 달기의 마음은 흔들 것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살아오며, 그녀의 마음을 휘어잡고자 하는 사내 중에 황준우만 한 미모를 뽐내는 인물이 없었겠는가? 굳이 손가락으로 뽑자면 다섯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달기의 마음을 훔치지는 못했다.
“그냥…… 곁에 있고 싶어. 단지 그뿐이야.”
결국 이 정도의 답을 힘겹게 이끌어낸 달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스스로도 한심하고 답답한 답변이란 생각에 골머리가 아파 오는 기분이었다.
“난감한 녀석이야. 정말. 어쨌든, 녀석도 고민은 하고 있을 거다. 네 맘을 모르지는 않으니까. 다만 녀석은 너를…….”
“알고 있어. 그 정도 눈치쯤은 있으니까.”
달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또 쏟아져 나왔다.
“흠…….”
그 모습에 함께 신음을 흘린 우마왕의 눈에 고민이 깃들었다.
사실 우마왕과 이런 연애문제 자체가 거리가 너무 멀다.
오히려 전문가라고 볼 수 있는 달기가 속 썩고 있는 마당에 그녀가 해줄 수 있는 말이란 건 얼마 없지 않은가? 함께 고심하고, 나름대로 지혜를 짜내어 보려 했지만 역시 생각에 진전이 없다. 결국 우마왕은 달기의 마음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떠올렸던 생각을 던져 버렸다.
“그냥 확 잡아먹는 건 어때?”
“여우 요괴가 간 먹는 시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그런 헛소리를 하는 거야.”
“너야말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정말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건 아닐 테고.”
눈을 가늘게 뜬 우마왕이 달기를 바라본다.
잠시, 그를 멀뚱히 바라보던 달기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황준우를 덮치라고?”
“바로 정답이다. 침대에서. 방문이야 잠그지도 않을 테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네게 문제는 아니지 않아?”
“어, 어…… 그런가?”
“솔직히 너 정도면 상당히…… 매력적인 편이지. 여태껏 사내 녀석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는 것 아니냐?”
“그, 그런가? 하지만 황준우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아니, 놈도 사내다.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자부하는 한 본능을 어찌하지는 못하겠지.”
우마왕이 확신하는 모습에 달기의 두 눈에 어떤 갈등이 깃들었다.
“잘할 수 있을까?”
“네가 그런 걸 물으니 우스운 소리로구나. 너 자그마치 요녀 달기…….”
조심스럽게 말을 하던 우마왕의 눈이 길게 가늘어졌다.
“혹시, 믿을 수 없다만. 솔직히 말해 질문을 하는 내가 이상할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다만, 요녀라고 불린 주제에 경험이 적다거나?”
달기가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운다.
애써 붉은 얼굴을 식히려는 손부채가 딱해 보일 정도다.
아무리 보아도 이 반응의 답은 하나뿐이었다.
“……처음은 아니겠지?”
“…….”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우마왕은 그야말로 눈이 화등잔보다 더 커졌다.
할 수만 있다면 밤하늘의 달보다도 크게 뜨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도 안 돼!”
“뭐가!”
“요녀잖냐!”
“그건 지들이 멋대로 부른 거고!”
“하지만 분명……!”
“꼭 직접 할 필요는 없잖아! 대다수가 환술만 살짝 보여 줘도 넘어갔는걸.”
“이 악녀! 널 사랑한 수많은 남자의 마음을 그렇게 능욕한 거냐!”
“아무렴 어때. 내가 마음이 안 가는걸!”
서로의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댄 두 마왕이 콧김을 씩씩 내뱉으며 두 눈에는 불똥을 튀겨가면서까지 다툰다.
그 와중에 먼저 시선을 거둔 것은 달기 측이었다.
“어, 어쨌든…… 그래서 뭐, 넌 나름의 방법이 있어?”
“적어도 네가 나보단 나을 거 아냐. 넌…… 그 자식도 있고.”
달기의 질문에 눈을 가늘게 뜬 우마왕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오호라…… 지금 천하의 요녀가 내게 잠자리 조언을 구하신다.”
“나, 나름 공부한 건 있거든? 아무런 정보 없이 환술을 펼치는 건 무리니까.”
“그러면 그대로 하면 되겠네.”
“……실전은 다를 테니까.”
“내가 말해 줘도 다를 것 없다. 네 말대로 실전은 다르니까.”
“끙…….”
앓는 소리를 내는 달기를 조금은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본 우마왕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있겠어. 먼저 좋아하는 측이 지게 되어 있다고. 계속 노력해야지. 그러다 보면 녀석도 생각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려나. 요즘 더 불편해하는 것 같던데.”
“하여간에, 사랑만 받아온 여우 아니랄까 봐 서툴기는. 적당히 하란 거다. 적당히. 너도 마구잡이로 들이대는 녀석들은 부담스러워 했잖아.”
“음…….”
“그런 의미에 있어서, 지금의 너는 상당히 예뻐 보여.”
고민하는 달기의 어깨에 팔을 두른 우마왕이 마치 사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말이야. 부딪치잔 거지.”
“맞아.”
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회의로는 결코 사랑을 쟁취할 수 없다.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아니던가?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길었네. 나답지 않게. 우선, 그 황제인지 뭔지 하는 아이부터 직접 봐야겠어.”
걱정 가득한 표정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나름 시원하게 말을 한 달기를 향해 더욱 진한 웃음을 보인 우마왕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가 보자고.”
“좋아.”
서로를 보며 다투기만 하던 두 요괴 일족의 왕이 합심(合心)하는 순간이었다.
전날 꽤나 긴 휴식을 취했음에도 아직 지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일행들이 모두 모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눈빛만은 여전히 살아 있다.
또한 서로를 향해 바라보는 시선에는 끈끈함마저 느껴졌다.
어찌 되었든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힘을 합쳐 살아남았다.
몇몇은 그런 상황의 수가 적지도 않으니 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묘한 열의, 그리고 끈끈함이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제법 긴 침묵이 이어졌다.
우마왕 성의 시녀가 내오는 차를 천천히 마시는 일행들 각자의 머릿속에는 나름의 생각이 오가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입가에는 미소가 흘렀다.
‘뭐, 나쁜 느낌은 아니네.’
대다수가 각자 이번 전쟁에서 느낀 무공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애초에 다들 무사한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심산이 아니었으면 이 자리까지 나올 것 같지도 않은 느낌이 더 많았다.
실상 황준우도 다르지 않았기에 그 심정을 잘 알았다.
찻잔을 내려놓는 것으로 꽤나 긴 침묵을 깬 황준우가 입을 열었다.
“얼굴 봤으니 됐어. 유계에는 아직 조금 더 머물 것 같으니까 다들 들어가서 할 일 하라고.”
“아, 저! 얼마나 더 계실 것 같습니까?”
경호의 질문에 턱을 쓰다듬은 황준우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음, 나도 확실하게 답변하기는 어렵겠는데?”
아직 유계에서 할 일이 몇 가지 남았다.
우선 보물 창고에 있는 제강의 조각을 흡수하는 것.
그다음은 약속했던 보물들을 되찾아야 한다.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확정을 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조급할 필요는 없어. 필요에 따라 볼일이 끝나도 조금 더 있어도 되니까.”
황준우의 말에 일행들의 얼굴이 다들 밝게 펴졌다.
아무래도 깨달음을 갈무리하는 것에 꽤나 많은 시간을 소요할 것이라 생각한 탓인 듯했다.
“자, 그럼 해산.”
황준우의 말에 대다수의 일행들이 몸을 일으켜 각자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 고심이 끝나면 그들 모두가 작은 걸음이나마 한 발자국씩 더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기분 좋은 유쾌함으로 각자 방으로 향하는 일행들의 뒷모습을 바라본 황준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준우를 비롯해 남은 인물은 셋뿐이었다.
“스승님은…….”
“최대한 휴식이나 취해야 할 때지요.”
백교가 껄껄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자리에 앉아 차나 마시는 것이 제겐 최고의 휴식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주연하를 향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고심이 많은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주연하?”
혹여 깊은 생각에 빠져 말을 듣지 못했을까, 조심스럽게 부르자 주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듣고 있었다.”
“아, 그래?”
“남은 이유를 묻는다면 뭐…… 나도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완시의 방에서 내내 수련만 했는지라 한동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
“아…….”
그러고 보니 주연하는 아직도 지상의 황궁을 걱정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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