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340화 (340/373)

학사재생 340화

제 340화

그를 충분히 이해한 황준우가 입을 열었다.

“급하면 먼저 지상으로 돌아가도 될 텐데. 더 이상 방해할 영정도 없고.”

“나쁘지 않은 선택 같다만, 지금은 거절하겠다.”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은 주연하가 이어서 말했다.

“네가 싸우는 이유에 대해서 더 자세히 들었다.”

“아, 그래?”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범인을 떠올리려니 너무 수가 많았다.

선계에 있는 대다수가 제강, 그리고 세계의 멸망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네가 구하고자 하는 세상에는, 나의 백성들도 있다. 물러서서 지켜만 볼 수는 없지. 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돕고 싶다.”

“음…….”

황준우의 신음에 옅은 미소를 보인 주연하가 질문을 건넸다.

“황준우, 넌 국가가 어떻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국가라…….”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무의 신이라고 불릴 정도였지만, 왕이 되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고민을 해도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황준우를 향해 웃음을 보인 주연하가 말한다.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세 가지의 요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영토.”

당연한 말이다.

땅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가 없다.

대단한 무공 고수가 물 위를 땅처럼 노니는 수상비를 펼친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다음은 백성, 마지막은 주권(主權)이다.”

“그렇군.”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상 그에게 깊은 관심이 있는 이야기는 아닌 탓이다.

반면 백교는 눈을 반짝이며 주연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꽤나 열심히 공부하신 것 같은 느낌이군요.”

자연스럽게 칭찬이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정 하나 변화시키지 않은 주연하가 검지와 중지를 펼쳐 황준우의 앞에 보였다.

“그중에서도 둘째, 백성이 없으면 주권도 형성할 수 없게 된다.”

애초에 권력이란 것은 홀로만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외딴 섬에 황제가 홀로 떨어진다 한들, 그의 위엄에 몸서리치고 명령에 고개 숙일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스스로를 지킬 무력이 없다면 야생동물에게조차 잡아 먹혀도 이상하지 않다.

“거대한 주권과, 그를 아우르는 힘. 그 모든 것의 기반이 백성이다. 나는 백성이 있기에 땅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황준우. 내가 지금 이 말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느냐?”

“…….”

황준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가 빠른 편이다 보니,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던 탓이다.

“작은 힘이라도 모이면 크게 되어 도움을 줄 수 있단 뜻이겠지.”

“예시라고 하기는 뭐하다만, 우리는 홀로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적을 한 번 쓰러트렸다.”

황준우조차 놀란 강자가 일행들의 합공에 무너졌다.

물론 이유는 많았다.

그는 방심했고, 또한 오만했다.

하나 결국 일행들이 놈을 이긴 가장 큰 요인을 뽑자면, 시기적절하게 등장한 일행들이 계속해서 그의 심기를 흩트려 놓으며 괴롭혔다는 점이었다.

하나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 그의 정신을 산만하게 분산시켰고 훌륭한 기회를 만들어 내었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종의 업적이다.

“황준우. 우리는 분명 너에게 힘이 될 수 있다.”

“알아.”

닫혀 있던 황준우의 입이 열렸다.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또 그 손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다만 나는 걱정이 될 뿐이야.”

“우리도 홀로 싸우는 네가 걱정된다.”

그 담담한 말에 황준우의 입가로 웃음이 떠올랐다.

“고마워.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한 거야.”

한 손으로 열 손을 막을 수는 없다.

영정과의 싸움 때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아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일행들은 실제로 이번 전투에서 수련을 통한 성과로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

“이제 와서 그걸 바꿀 생각은 없어. 다만 이렇게 힘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미안한 거지.”

“미안할 일이 결코 아니다. 너는 쓸데없이 홀로 많은 짐을 지려 하고 있구나.”

미간을 찌푸린 주연하의 말에 황준우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

“황준우. 언제나 말했듯 나는 네 옆에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런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홀로 완전할 필요 없다. 하물며 신선들도 그럴진대…… 인간이란 본래 그런 존재이지 않느냐?”

“그렇지.”

신조차도 완벽하지 않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빈틈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미 깨달은 사실을, 주연하의 일침으로 되새김한 황준우가 웃음을 보였다.

“알겠어. 쓸데없이 무리하지 않을게. 도움받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꼭 그렇게 해야겠지.”

“훌륭한 선택이다.”

이제야 주연하의 표정이 밝게 펴졌다.

환한 태양 같은 그 웃음에 황준우의 눈에도 빛이 반짝인다.

누구나 그렇듯, 사람은 웃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

주연하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실상 이 이야기를 하려고 이 자리에 남은 거야?”

즐거운 표정을 한 황준우의 물음에 주연하의 고개가 단호히 내저어졌다.

“아니, 이건 얼굴을 보고나니 나도 모르게 나온 잔소리. 목적이 있다면…….”

잠시, 입을 닫은 주연하의 눈에 망설임이 깃든다.

자리에 앉은 백교를 곁눈질로 보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아이고, 이런. 제가 눈치 없게 여기 너무 오래 있었군요.”

백교가 호들갑을 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재빨리 방 바깥을 향한다.

이 분위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가 모를 리는 없었으니 말이다.

“흠흠…….”

그렇게 백교가 사라진 방 안.

둘만 남은 상황이 되었음에도 주연하는 내뱉던 말을 못 한 채 헛기침만을 계속해서 흘렸다.

시선은 계속 천장을 바라보고, 목은 점점 더 붉게 달아오른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차를 몇 번이고 들이킨 후에야 주연하의 입이 열렸다.

“……뭐, 그냥. 더 오래 보고 싶었다. 내게 있어서는 황준우 너를 보는 것이 가장 큰 휴식이고 행복이니 말이다.”

조심스럽게 말을 끝맺은 주연하가 다시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따뜻한 찻물을 입술 가까이 가져다 대고, 시선은 그 위로 살짝 들어 황준우의 표정을 바라본다.

여전히 웃고 있다.

“기분 좋네.”

한참을 기다려 들은 그 말의 솔직한 감상에 주연하의 표정이 더욱 붉어졌다.

그를 감추기 위해 더욱 찻잔을 기울여 보았지만, 어느덧 다 떨어진 차를 계속해서 마시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찻잔의 열기가…… 제법 과하구나.”

결국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차를 내려놓은 주연하가 변명을 둘러댄다. 얼굴은 살짝 나른해 보이고, 눈은 묘하게 풀린 것 같은 느낌이다.

황준우는 그 모습이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실상 그 누가 주연하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황궁에서조차 철혈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주연하다. 어릴 때부터 딱딱했던 모습을 생각하자면 가족들조차 보기 힘든 얼굴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오래 볼 수 있으면 좋아. 한동안 바빴잖아?”

연인이 되었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지만 함께한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서로의 감정을 나누고 싶었지만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의 휴식.

지금이라면 그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나누며,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달기에 대해서는…….’

황준우라는 사내의 이성은 그냥 이야기하라고 한다.

숨기고 있는 것이 더 마음에 걸리는 탓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본능 어딘가에서는 차라리 이야기를 안 하는 것이 좋다고 외쳤다.

‘내가 연하를 속이고 싶은 건가?’

그 사실이 황준우를 조금 혼란스럽게는 했다.

하지만 마음만은 확실했다.

‘아니. 단지 쓸데없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달기 문제는 스스로 알아서 잘라내면 될 뿐.

애초에 주연하가 마음 쓰이게 할 일이 아니다.

황준우는 그런 결론을 내렸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황준우!”

둘밖에 없는 방문이 활짝 열리며 여우 귀를 팔딱거리는 달기가 목소리를 높인다.

“여-!”

그 뒤를 따라 우마왕이 손을 흔들며 나타난다.

“아…….”

둘만의 달콤한 시간이 순식간에 깨어진 아쉬운 마음에 황준우의 입가로 짧은 탄식이 흘러나올 때였다.

방으로 들어서며 주연하를 보고는 눈웃음을 흘린 달기가, 순식간에 황준우의 옆자리로 찾아와 앉아 버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황준우의 몸에 기대려 하였다.

물론, 그 전에 황준우의 동작이 더 빨랐다.

덕분에 계획에 실패한 달기의 눈에 안타까움이 흘렀다.

맞은편에 앉은 주연하의 눈썹은 잔잔한 듯, 무겁게 꿈틀거렸다.

“누구?”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주연하치고는 제법 날카롭다.

“아…… 그게…….”

황준우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생각이 정리가 되지는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마뜩잖다.

그렇다고 진실을 밝히자니 방금 한 다짐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그 두 가지 생각이 어우러지니 입이 열리지를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몸이 따르지 않은 것이다.

그 어떤 강적, 심지어 항우와 싸울 때도 이토록 복잡한 느낌은 없었다.

말 없는 침묵 사이, 주연하의 두 눈이 점점 가늘어진다.

“흐음…….”

그 묘한 분위기를 깬 것은 달기의 콧소리였다.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는 제법 긴장했지만, 황준우와 주연하의 분위기를 본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으며 모든 것이 변했다.

굳이 얕잡힐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다.

“난 달기. 마호족의 왕이야.”

달기가 먼저 인사말을 건넨다.

황준우를 바라보던 시선을 잠깐 옮겨 달기를 바라본 주연하가 입을 열었다.

“주연하. 대 명의 황제다.”

“아직은 황제가 되지 못했지 않나?”

“…….”

“즉위식 하던 도중에 사라졌잖아.”

나서는 말이 날카롭다.

‘이거 좋지 않은데?’

황준우가 식은땀으로 온몸을 적시려 할 때였다.

“자자, 그만. 그리고 주목.”

둘 사이에 서 있던 우마왕이 중재자로 나섰다.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우마왕을 향했다.

그를 받아들인 그녀는 제법 시원한 웃음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간단한 상황이다. 수컷을 놓고 암컷끼리 경쟁하는 거지.”

“……뭐?”

달기가 당황한 음성을 흘렸다.

도와준다더니 갑자기 이렇게 나설 줄은 몰랐다.

“수컷…… 암컷…….”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주연하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진다.

황준우의 동공은 더욱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길게 말할 것 없지. 우리 우마 일족은 예로부터 강자가 모든 것을 가졌다. 전투로 결정하는 거다!”

힘차게 상을 내려치는 우마왕의 모습은 굉장히 당당해 보였다.

그래서 더욱 황준우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황준우를 둔 싸움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인간인 황준우와 주연하의 상식에서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며, 요괴들 중에서 나름 고아하다는 마호 일족에도 어울리지 않는 방법이었다.

분위기는 더욱 싸늘해졌고, 기세 싸움을 하려던 달기는 맥이 풀려버렸다.

주연하는 더 이상 이런 일에 무슨 말을 할 엄두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난 먼저 가지.”

이후 황준우를 곁눈질로 바라보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어찌 붙잡을 틈 따위는 없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