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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41화 (341/373)

학사재생 341화

제 341화

“아……!”

손을 내민 채 멍한 신음을 흘리는 황준우를 보며 우마왕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약육강식. 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승부법 아닌가?”

“그걸 몰라서…….”

우마왕을 향해 성을 내려던 황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알면 저런 말을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황준우가 주연하를 따라 방을 나섰다.

달기와 우마왕.

둘만 남은 방.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달기의 곁으로 다가간 우마왕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쉽군. 대결할 수 있었다면 네가 이겼을 텐데.”

조심스럽게 들어 올린 손으로 달기의 어깨를 두드리려 할 때였다.

“건들지 마.”

스산한 목소리가 달기로부터 흘러나왔다.

그 무서운 기세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린 우마왕이 헛기침을 했다.

“큼, 큼. 거…… 생각지 못하게 승부를 못 내긴 했지만…….”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해.”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답한 후, 몸을 흠칫 떤 우마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소 살벌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답하고 보니 억울한 탓이었다.

“아니, 근데, 잠깐만. 이게 내가 뭐 잘못한 일인가?”

“우마왕.”

“그렇잖아? 난 그냥 네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에 나름대로 도우려 했던 거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달기 너만큼은…….”

“닥쳐.”

기세가 차갑다 정도를 벗어나서 서늘하다.

등골에서부터 뒷목까지 얼어붙는 기분에 기세등등하게 입을 놀리던 우마왕의 말소리가 옅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마왕이 된 이후 처음으로 딸꾹질하는 경험을 했다.

“……흑-!”

“주연하.”

“돌아가거라.”

“잠시만 이야기를…….”

“난 할 말이 없구나.”

“…….”

주연하는 방문 앞까지 쫓아온 황준우에게 명백한 축객령을 내렸다.

결국 문 너머에까지 전해지는 시무룩한 느낌을 남긴 채, 황준우가 멀어졌다.

홀로 드넓은 방, 침상에 누운 주연하의 표정이 곱게 일그러졌다.

“달기, 달기라…….”

그 이름을 읊는 연분홍빛 입술은 새침하게 튀어 오른다.

황준우에게 조금 미안한 사실을 말하자면, 사실 주연하는 달기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주의해야 할 연적(戀敵)이라고는 하셨지.’

연적이라니.

사실 생각도 못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감상을 느끼지 못했다.

사람을 두고 누구랑 다투다니?

심지어 연적이라는 건, 주연하의 인생에 있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때문일까?

아무렴 상관없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내가 황준우를 좋아한다.’

그리고 황준우 역시 주연하를 좋아한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그 감정에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하였다.

적어도 사랑에 한해선 두려운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흔들림 없는 강물처럼 달기를 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갑작스럽게 방문을 연 그녀가 나타나서 황준우의 이름을 부르더니, 향긋한 분향을 풍기며 옆을 스쳐 지나간 순간 그런 생각은 싹 사라졌지만 말이다.

‘아름답더군.’

다시 한번 자신이 목도했던 달기의 모습을 떠올린 주연하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같은 여자가 봐도 놀랄 정도로 예쁘다.

과연 오랜 요녀, 구미호 달기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할머니께서 많이 회개하셨다고 했지만, 그래 봐야 악녀 아닌가?’

문득 또 심술이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그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고 만다.

‘몸매도 훌륭하고.’

결국 다시 이어지는 것은 달기라는 ‘여인’에 대한 생각이다. 눈은 밤하늘의 별을 담은 것처럼 반짝이며, 피부는 은빛으로 빛나는 것 같다. 머리 위로 솟은 여우 귀는 왠지 모르게 만지고 싶은, 알 수 없는 욕구를 자극했으며 당당하면서도 요염하게 느껴지는 걸음걸이는 고아하기까지 해 보였다.

작고 고운 손과 발은 또 어떻던가?

문득 침상에 누운 채로, 제 손을 천장을 향해 들어 확인한 주연하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거칠어졌군.”

한때 섬섬옥수(纖纖玉手)라고까지 불렸지만 오랜 시간 무공을 단련하며 제법 거칠어진 무인의 손이 그곳에 있다. 척 보아도 딱딱해 보이며, 제 손으로 쓸어보아도 거칠다. 먼 과거에는 분명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주연하는 그런 자신의 손에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 여우 계집은 고와 보였지.”

아주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문득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주연하가 방 안에 있을 동경을 찾기 시작했다.

전신을 볼 수 있을 정도의 큰 것은 없었지만, 다행히도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손 동경 정도는 서랍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어디…….”

조심스럽게 동경을 들어 스스로의 얼굴을 확인한 주연하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이지?’

평생을 황제가 되기 위하여 살았다.

동경 앞에 선 적은 많았지만, 그 안의 자신을 품평한 적은 없었다.

그녀가 동경을 볼 때는 늘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기 위할 때뿐이었다.

강해지려면 스스로와 싸워야 한다.

외부의 적과 다퉈서는 황제라는 자리에 오를 수 없다.

다독이고, 때로는 혹독하게 대하기 위해 보았던 동경이다.

마주했던 것은 검은 눈뿐이다.

한데 오늘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 전체를 보았다.

코 모양, 입술빛, 크기, 또 피부의 빛깔과 험한 곳은 없는지 하나, 하나 다 확인한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다행히 얼굴은 크게 상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잠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그때,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하지 않던 일을 하는 것이 어색한 탓이다.

또 스스로가 여인이라는 사실을 이런 식으로 자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아…….”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은 주연하는 이마를 짚었다.

왜 이제 와서 이러고 있냐고 스스로에게 되물어보니 답은 하나뿐이다.

‘그가 너무 좋아서 그럴 뿐이다.’

어색하여 표현하지 못하고, 할 줄 몰라 딱딱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감정마저 투박한 것은 아니다.

양 무릎을 모아 자신의 얼굴을 묻으며 몸을 웅크린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황준우의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이 귓가에 북소리처럼 아른거렸다.

“정말…… 황준우…… 이 바보 같은…….”

어쩌면 이 말은 스스로를 향해 하고 싶던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주연하에게 쫓겨난 이후.

힘없이 터덜거리는 걸음의 황준우의 눈에 어째서인지 자신과 비슷하게 걷고 있는 우마왕이 보였다.

“아…….”

황준우를 발견한 우마왕이 짧은 탄식을 흘린다.

두 눈은 묘하게 반짝거리는 빛을 토해내는 것 같다.

“황준우.”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어떠한 기대감이 있었다.

“응. 아니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냥 왠지 눈에 쓸데없는 생각이 가득 담긴 것 같아서.”

“쓸데없다니. 나는 네가 겪을 여난을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주기 위해서 한 말이었어.”

“응. 더 복잡해졌어.”

“……끙.”

부정하고 싶지만, 결과가 눈앞에 보인다.

확실히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짝이던 우마왕의 눈에 빛이 죽고, 어깨도 힘없이 처진다.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본 황준우의 입가로 피식 웃음이 흘렀다.

“어쩌겠어. 네 탓도 있지만, 애초에 내 잘못인걸.”

“달기에게 제대로 의사전달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녀가 착각하고 계속 이러는 것도 알 만해. 스승님 말대로 여유를 가지려다 이 꼴이 되었으니…….”

주연하가 오기 전에 정리했어야만 했다.

괜히 시간을 두고 생각하다가 복잡하게 일이 꼬여버렸다고 생각하는 황준우였다.

“아, 그런 의미였나.”

우마왕의 입가로 묘한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넌 달기를 응원하는 입장인 것 같던데.”

“딱히 부정은 하지 않아.”

허탈하게 웃은 우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하지만 내 입장도 어쩔 수 없어.”

“나에게 미안할 것이 어디 있겠느냐. 다만…… 영웅의 삼첩사첩은 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 말도 있지만, 아쉽게도 난 그렇게 연애에 능숙한 영웅이 아니라서.”

“나빠.”

“적어도 달기에게는 그렇게 되겠지.”

“아무렴 마음의 준비라도 할 시간을 주던가.”

“그럴수록 더 힘들어질 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어서.”

아무래도 마음을 독하게 먹은 것이 분명하다.

황준우와의 대화로 그 사실을 깨달은 우마왕이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말린다고 해도 의미 없겠지.’

아쉬운 이야기지만,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이게 최선이다.

물론 달기의 입장은 전혀 다를 테지만 그건 더 이상 우마왕이 끼어들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당장 그녀를 찾기는 힘들 거야.”

“응? 중앙 방에 있는 것 아니야?”

“아, 그게…… 조금 삐져서 마호 일족에게 돌아갔거든.”

“삐져서?”

의문을 내비친 황준우가 곧 짧은 감탄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준우와 주연하가 당황했던 만큼, 달기 역시 난감해하던 걸 느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그들에게도 저들의 왕이 무사한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말이야.”

“아, 하긴.”

천방지축에, 제멋대로, 그리고 소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달기는 왕이다.

왕에게는 왕의 책무가 있다.

이미 주연하를 통해, 그리고 스스로 남천맹을 이끌며 그런 것들을 제법 느껴보았지 않던가?

“참고로 말해, 그녀는 제멋대로인 요괴들 사이에서는 책임감이 굉장히 높은 편이지.”

“그래 보여.”

황준우의 단언에 우마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게 아닌데…….’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을 뜨자마자 황준우를 먼저 찾았다는 사실이었다.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황준우의 마음이 흔들릴까에 대한 기대감.

한데 황준우는 애초에 그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이건 완패(完敗)다.’

우마왕 역시 연애에 능숙하지는 못했다.

사실 굉장히 어색한 편이란 게 맞을 터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도, 이 사랑싸움에서 달기가 얼마나 불리한지를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절로 고개가 내저어질 일이다.

“그러면 기다려야 하나.”

확실하게 결론을 내리고 싶지만, 일족에게 무사 회복 사실을 알리기 위해 찾아간 왕에게까지 쫓아가 이야기할 일은 아니다. 아무리 결정한 일을 돌리지 않는 황준우라고 해도 그 정도 여유마저 없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지.”

“흠…….”

짧은 신음을 흘린 황준우가 턱을 쓰다듬었다.

다시 주연하에게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적어도 아직은 아닌 듯했다.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아 보였으니 말이다.

‘나도 상념을 정리나 좀 할까.’

항우와의 격전.

그로 인하여 얻은 심검.

새로운 우주에 대한 이해까지,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를 단숨에 깨닫고 흡수했지만 뭔가 정돈을 하다 보면 또 느끼는 것이 다를지도 몰랐다.

“이참에 제강의 조각에 다시 도전해보는 건 어때?”

황준우를 향해 던져진 우마왕의 생각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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