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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342화 (342/373)

학사재생 342화

제 342화

아니, 오히려 좋았다.

“지금이라면…… 응. 해볼 만할 것 같아.”

몰라서 미루고 있던 게 아니다.

다만 이렇게 평범하게 웃으며 대화하고 있지만, 몸 상태도 좋지 않은 우마왕에게 무리시키고 싶지 않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데 그녀가 먼저 제안을 해온 것이다.

이럴 때는 가능하다면 미루기보다는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나을 터였다.

어찌 됐든 제강의 조각은, 우마왕의 입장에서도 계속 보관하고 있기 부담되는 물건일 테니 말이다.

“해볼 만한 게 아니라 해내야지. 항우마저 꺾은 무신이 그렇게 나약한 소리를 하면 어떡해.”

황준우의 가슴을 가볍게 친 우마왕이 진한 웃음을 보인다.

꽤나 사내다운 우애를 나누는 몸의 화법에 황준우의 입가로도 미소가 흘렀다.

확실히 이제는 둘 사이도 제법 가까워졌다는 것이 느껴진 탓이다.

“그럼 말을 다시 바꿔서,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주지.”

“멋진 자세야.”

다시 한번 우마왕이 활짝 핀 웃음을 보였다.

황준우와 우마왕은 그 길로 곧장 방과 방을 넘어, 복도를 지나, 벽 뒤에 숨어 있던 제강의 조각이 봉인된 문 앞에 섰다.

드르릉-!

기관이 작동하고, 벽이 밀리는 순간부터 강력한 기운이 주변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째 더 거세진 것 같은데?”

그 앞에 선 황준우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느껴지는 힘의 크기는 다를 바 없다.

다만 말 그대로 기운이 거칠어졌다.

본래부터 다소 제멋대로인 느낌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주 요동치며 폭발할 듯 제멋대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건…… 위험하겠군.”

우마왕도 그를 느낀 탓인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황준우가 대단한 조율을 할 수 있다고 하여도 이 정도의 막대한, 그것도 뒤섞인 힘이 난동 피우는 것을 잠재우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쯤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이전에 도전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될 정도다.

“아무래도 주변에서 일어난 전쟁, 특히 너와 항우의 싸움에 큰 자극을 받은 것 같다만…….”

우마왕이 제 생각을 말하며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또 한 번 다음 때를 기다린다고 해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다.

“해 보지. 미룬다고 더 나아질 것 같은 느낌도 아니거든.”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황준우가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나 천하의 무신 항우도 이긴 몸 아니야?”

“큭큭, 그건 그렇지.”

“시간은 조금 걸릴 것 같은데…….”

“그렇겠지.”

“주연하, 괜찮겠지?”

제강의 조각을 수거하는 건 어차피 해내야 할 일이다.

다만 그 일에 있어 걱정되는 점은 역시, 다소 속이 상해 있는 주연하였다.

마음 편히 풀어 주고 시작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그 부분은 잘 전달해주도록 하지.”

우마왕의 당당한 말에, 황준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

“……믿어 봐. 대체 나를 무엇으로 보는 건지.”

“우마왕.”

“그래, 천하의 우마왕이야.”

“눈치는 하나도 없는 우마왕이지.”

“에이, 진짜…….”

속상하다는 듯 툴툴거린 우마왕이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했다. 두 번 실수할 리는 없으니 한번 믿어 봐.”

“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준우의 의심은 풀릴 생각을 않는다.

“아니면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남기든가.”

결국 설득을 포기한 우마왕이 다소 토라진 표정으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라…….”

황준우의 침묵이 길어졌다.

“거봐, 딱히 생각나는 말도 없으면서.”

“아니거든. 단지 뭐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니 느낌이 이상해서…….”

“상황이 그렇지 않느냐.”

“그렇지.”

입맛을 다신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러면 간단하게 전해줘.”

“말해봐.”

“금방 다녀올게. 그때까지 조금은 화가 풀렸으면 좋겠어.”

“심심하군.”

“뭘 더 어떻게 특별하길 바란 거야?”

“아니, 딱히 그런 건 없었다만…….”

“그럼 간다.”

시선을 피하는 우마왕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든 황준우가 방 안을 향해 걸어 들어가 버린다.

“어, 그래. 건승을 기원…….”

대답을 다 하기도 전, 황준우의 모습이 회색빛 혼탁한 기운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장내에는 침묵이 흐른다.

“흠……”

홀로 남은 우마왕은 짧은 신음을 흘리고는 조심스럽게 벽을 밀어 방문을 닫았다.

우마왕의 성으로부터 천리 밖에 떨어진, 검은 지붕이 있는 장원의 정문으로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죽립을 깊게 눌러 쓴 채 다가간다.

조용한, 인적조차 잘 느껴지지 않는 문 앞으로 흑의를 입은 사내 둘이 나타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검을 뽑아 든 두 흑의 무인의 기세가 사납다.

“이곳은 귀왕(鬼王)의 거처다.”

딱히 돌아가라는 말도 없다.

협박도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통보였다.

유계의 금역(禁域)에 들어섰으니 순순히 포기하라는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귀왕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은 무섭다.

어지간히 유계에서 구른 영혼이라면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질려서 제자리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마계의 마왕들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인 그의 별명은 영혼 탐식자이다.

드넓은 유계에서 유일하게 영혼을 사로잡아 식용(食用)한다고 알려진 괴짜.

단순한 영멸보다 훨씬 더 큰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실제로 전장에 나선 귀왕이 영혼을 잡아먹는 모습을 본 이들은 그 이후로 한동안 몸서리치며 광기에 시달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하나 사내는 그 이름을 들었음에도 아무런 답이 없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우선 상대가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일 경우다.

이제 막 죽어 유계에 들어선 이들.

자신의 죽음을 불신하며 육체를 얻어 이 땅을 헤매고 있는 망자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는 유계 곳곳에 떨어지기 때문에 귀왕의 거처 인근에도 종종 나타나고는 했다.

물론, 그 결과가 좋은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덩치만 큰 사내를 보며, 흑의 무인의 입가로 비웃음이 흘렀다.

‘보아하니 지상에서 무공 좀 익혔다고 했겠군.’

제법 이름을 날리는 강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계에서는 그런 강자가 수도 없이 많다.

무림 백대무인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유계에 들어선 순간 삼류 무인과 다를 바 없는 신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계는 처음인가?”

차가운 목소리를 한 그의 질문에, 덩치 큰 사내가 자신의 죽립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동시에 움직인 검날이 사내의 목젖 언저리에서 빠르게 멈춘다.

달리 동정심이 생긴 탓은 아니다.

사내가 아는 얼굴일 리도 없었다.

흑의 무인은 죽은 지 벌써 삼백 년이 넘었다.

과거의 인연이 지금 도착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확실히 모르는 얼굴이다.

다만 흉흉하게 빛나는 보랏빛 눈동자만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섬뜩함이 흑의 무인의 뒷목에 차올랐다.

단순한 기운이 아니다.

어느덧 큼지막한 손이 그의 등을 쓸고, 목 언저리에 얹어진 탓이다.

“귀, 귀왕…….”

떨리는 음성에, 웃음을 보인 사내 귀왕이 웃음 지었다.

곧, 큰 입이 거대한 아귀의 수렁처럼 벌어졌다.

“제, 제발…….”

흑의 무인이 간절하게 빌며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영혼이 으스러지며 씹히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으적, 으적.

어찌 되었든 사람의 육신의 형태를 한 무인을, 머리부터 시작하여 천천히 씹어 삼키는 귀왕의 모습은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끄아아악-!]

주변으로는 육체의 형상을 완전히 잃은 영혼의 비명이 끔찍하게 울려 퍼진다.

그 영혼을 붙잡아 배에 이빨을 쑤셔 박은 후 그 속내까지 마구잡이로 탐식하는 귀왕의 모습에, 잡아먹히고 있는 이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던 또 다른 무인의 몸이 덜덜 떨렸다.

방랑벽이 심한 그들의 주인, 귀왕은 한 번 사라지면 최소 몇십 년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돌아올 때마다 모습이 바뀌곤 한다.

그리고 매 그 시기가 오면, 정문을 지키는 호위 무사는 영멸을 피해갈 수 없다.

영혼탐식자, 귀왕이 오랜만에 돌아온 유계에서 영혼의 식용을 즐기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때문에 귀왕의 장원, 정문 경비를 서는 일은 그를 따르는 영혼들이 순서를 번갈아가며 한다. 혹은 죄지은 누군가를 체벌하기 위해 세우기도 한다.

언젠가 돌아올 귀왕을 맞이하여 스스로 한 끼 식사가 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왕의 장원을 떠날 수 없는 것은, 운만 좋다면 유계에서 가장 오래 버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마왕, 귀왕의 뜰 안에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그 누구도 함부로 다가올 수 없다는 뜻이니 말이다.

“후우…….”

한 끼 식사를 마친 귀왕이 영혼의 배에 박았던 얼굴을 들어 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시선은 어느덧 덜덜 떨고 있는 또 다른 무인에게로 향한다.

“그대는 운이 좋군.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돌아온 덕에, 허기가 많이 지지 않아.”

그를 향해 웃음을 보인 귀왕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곁을 스쳐 지나간다.

‘사, 살았어?’

보통 돌아온 귀왕은 최소 둘 이상의 영혼을 잡아먹는다.

그래서 정문의 호위무사도 둘이 서는 것이다.

한데 이번에 그는 살아남았다.

꼼짝없이 끔찍하게 잡아 먹힐 줄로만 알았는데, 귀왕이 그에게 자비를 베푼 것이다.

떨리는 몸이었지만,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영멸 속에서 생환했다는 기쁨은 너무나 컸다.

또한 그 자극조차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하하…….”

입 바깥으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온 순간이었다.

괴상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전신에 마치 수억 마리의 벌레가 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입을 벌려 비명을 내지르려 하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대신하여 영혼의 울림이 주변을 휘감았다.

“아……, 남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아서 말이야. 이럴 때는 배가 불러도 조금 더 욕심을 내야지.”

잠시 식용을 멈추고, 고개를 든 귀왕이 웃음을 지으며 말한 후 다시금 영혼을 씹기 시작했다.

고통의 신음을 즐기는 지독한 악의가 주변에 내려앉는다.

“아아…….”

그렇게, 단숨에 두 개나 되는 영혼을 삼킨 귀왕 또는 전생자라 불리는 인물이 길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역시 맛있는 음식이라도 과식은 좋지 않아. 속이 더부룩하군.”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 차오른 채였다.

장원을 지키는 호위무사 둘을 집어삼키고 귀왕이 귀환했다.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시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습이 바뀌어서 왔다.

또한 주변을 맴도는 악의는 어째서인지 평소에 비해 몇 배나 지독했다.

자연스레 장원에 모인 귀왕의 추종자들은 몸을 움츠렸다.

자칫 잘못 걸린다면 영혼을 잡아먹힌다.

그런 괴로운 꼴이 되고 싶은 이는 누구도 없었다.

다행인 점은, 그 무시무시한 악의를 품은 귀왕이 주변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제 수련장 안으로 곧장 모습을 감추었다는 것이었다.

귀왕의 추종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감정, 기분을 느낀 귀왕, 전생자는 당장에라도 다시 수련관의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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