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46화
제 346화
한편 유계의 넓은 땅, 그중 서북부 지역에 세워진 우마왕의 성에서는 축제가 벌어졌다.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걱정하였던 우마 일족과 마호 일족의 왕 모두가 건강한 모습으로 모두의 앞에 섰다. 모두가 환호했다. 다투기만 하였던 두 일족은 이번 전쟁을 통해 서로에게 ‘전우애’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고, 나란히 선 두 왕의 모습은 서로에 대한 협력 의지를 나타냈다.
더 이상 서로를 상대로 싸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긴 이 시점에,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기쁨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축제가 시작되었다.
달기가 깨어난 이후로도, 전쟁의 큰 축을 담당한 인간의 무신이 어떠한 연유로 모습을 감춘 탓에 한 달 이상 미루었던 축제였다.
성 곳곳에 마호 일족이 마련한 화려한 장식과 볼거리가 놓였다.
평소 자랑하던 노리개나 장식품 등을 판매하는 이들도 생겼다.
마호 일족에 비해 다소 투박한 우마 일족도 나름의 성의로 여러 가지를 준비했다.
나름의 솜씨를 발휘한 요리와, 우마 일족이 자랑하는 병장기 몇 가지, 하지만 그중 가장 특출난 것을 뽑자면 다름 아닌 술이었다.
금오도를 비롯한, 요괴들 중 가장 술을 잘 담그는 일족을 묻는다면 보통 대답은 둘로 갈린다.
원후일족(猿?一族), 혹은 우마 일족.
이 중 원후일족은 오래전 그들을 이끄는 미후왕(??王)과 함께 하얀 신의 인도를 따라 금오도를 떠나 새로운 별로 향했다.
결국 실질적으로 세계의 구성원으로 남은 우마 일족이 요괴 중에서는 최고의 주조(酒造)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덕분에 유계와 금오도 내에서는 가끔씩 바깥으로 흘러나온 우마 일족이 담근 술이 꽤나 비싼 값에 비밀리에 거래되고는 했다. 죽은 인간이든, 요괴든, 술을 좋아하는 종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마호 일족은 그런 우마 일족의 술이 항아리째로 수백 통이나 바깥에 나오는 것을 처음 보았다.
술이 달아오르다 못해 머리끝까지 차올라 얼큰해지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맛있는 술은 마치 요부(妖婦)와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축제에 참가한 우마 일족과 마호 일족의 일원들은 술이 자신을 먹는지, 본인이 술을 마시는지 모를 지경이 되어 축제를 즐겼다. 아무리 요괴라고 하여도 숙취는 어쩔 수 없기에 다음 날 꽤나 고생을 하겠지만, 마음을 완전히 놓고 그렇게 놀 수 있다는 것도 엄연한 축복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덕이지.”
미친 듯 술을 마시고, 먹고, 떠드는 일족들의 모습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는 우마왕의 말에 곁에 선 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을 했기 때문에 저렇게 마시는 거고.”
그 말과 함께, 잔에 채워진 우마 일족이 담근 우마주(牛魔酒)를 가볍게 입술에 가져다 댄 달기의 얼굴이 살짝 풀어진다.
“정말이지. 다른 건 몰라도 술 담그는 솜씨 하나만큼은 최고인 것 같아. 나 어쩌면 우마 일족을 사랑하게 될지도.”
“헛소리.”
혀를 차며 달기의 말을 곧장 쳐낸 우마왕 역시 술을 입에 머금는다.
두 요괴는 그렇게 말없이 술잔을 몇 번 기울였다.
그렇다고 과하게 퍼붓지는 않았다.
축제를 즐기는 다른 일족들과 같이 마음껏 기분을 내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탓이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달기의 질문에 또 한 번 술잔을 기울이던 우마왕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무슨 말이냐?”
“너 말이야. 영혼이 흩어지고 있다고.”
달기가 눈을 께름칙하게 뜨고는 우마왕을 바라본다.
다소 어려 보이는 소녀의 모습을 한 우마왕이 그곳에 있다.
전쟁이 막 끝났던 시점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당시의 우마왕은 숙녀는 아니지만 소녀는 넘어선, 어떤 지점에 있는 느낌이었다.
한데 눈앞의 우마왕은 엄연한 소녀의 모습이다.
달기 역시 그와 비슷한 형태가 되어 본 적이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마왕은 힘이 아닌 영혼 자체가 흩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 년은 어떻게든 더 버티겠지.”
“고작 몇 년?”
“그 이후는 원숭이 놈을 따라 별이 된다거나. 큭큭.”
스스로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다소 자조적인 웃음을 남긴 우마왕이 시선을 돌려 달기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거야. 그러니까 너는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걱정하는 게 아니라…….”
미간을 깊게 찌푸린 달기가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푹 내쉰다.
“그래, 걱정이 될 수밖에 없잖아. 어쨌든 너랑 나도, 그 뭐냐. 전우라고.”
“전우…….”
제법 솔직한 그 말이 꽤나 흡족한지, 짙은 미소를 그리고는 술잔을 단숨에 기울인 우마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크…….”
“미쳤어? 최대한 존재를 유지하는 데 힘써도 모자랄 놈이 무슨 술을…….”
“기분이 좋으면 취해야지.”
그런 달기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는, 또 한 번 잔을 가득 채우고 단숨에 삼킨 우마왕이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봐라. 이렇게 술을 마시고도 멀쩡한 몸이다. 아무리 영혼의 존재가 흩어지고 있다 해도, 거력대왕의 육체의 격이 어디 가는 건 아냐.”
자신의 가슴을 텅텅, 두드린 우마왕이 진한 웃음을 보인다.
애초부터 말이 통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던 달기의 고개가 좌우로 크게 내저어졌다.
“무식한 년.”
귀결은 언제나와 같다.
“무식한 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 네가 걱정한다고 바뀔 일도 아니고, 또 하나 말해서 오히려 지금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지 않나?”
우마왕의 시선이 축제 마당 외각에 서 흥미로운 눈을 빛내고 있는 주연하에게로 향했다.
“음…….”
함께 주연하를 바라본 달기가 쓴 신음을 흘린다.
확실히 그녀와는 해야 할 이야기가 제법 있다.
우마왕의 괴상한 논리 탓에 꺼내보지도 못한 이야기들이 마음 한구석에 가득 쌓여 있지 않은가?
“벌써 한 달째 소식이 없다.”
“황준우?”
“그놈에 대한 이야기는 또 귀신같이 알아듣는군.”
“어쨌든.”
“뭐, 그렇다는 거다. 꽤나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지.”
“그쪽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 아니야?”
“난 걱정하지 않아. 놈이라면, 황준우라면 분명 웃으면서 나타날 거다. 고작 조각 따위에 질 정도로 나약했다면 멸망을 막는 구원자라는 이름도 얻지 못했겠지.”
“…….”
“그러니 녀석이 돌아오기 전에, 이 상황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부딪치란 말이다. 뭐 결국 결정은 녀석이 하는 것이겠지만 둘이 이야기라도 해보라고. 첩 자리라도 어떻게 양보받아보려면…….”
“시끄러!”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는, 날카롭게 외친 달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술기운이 달아오르는지 얼굴은 붉게 물든 채다.
“오호, 드디어 가서 부딪쳐 볼 마음이 생겼나?”
“드디어고 뭐고, 원래부터 오늘쯤이 좋다고 생각했거든.”
“거짓말이 아주 능수능란해. 하긴, 그러니까 그간 그렇게 많은 사내를 속였겠지.”
“넌 정말 의외로 쓸데없는 말이 많아. 우마왕.”
“그, 그런가?”
당황하는 우마왕을 향해, 눈웃음을 보인 달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주. 시끄럽다고.”
“흠……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만…….”
“네 수다를 받아주기 귀찮아서 대다수 도망갔나 보지. 어디 원숭이처럼 말이야.”
“그놈의 원숭이 이야기는…….”
“어쨌든. 나, 간다.”
우마왕의 말을 끊은 달기가 앞으로 걸음을 내디딘다.
“오, 첩으로라도 받아달라고 말할 결심이 섰구나?”
“아니거든.”
나아가려던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한 달기의 눈이 곡선으로 아름답게 휜다.
그려진 미소는 세상 어떠한 꽃보다도 아름다운 매력을 뽐낸다.
“천하의 달기가 첩이라니, 넌 내 야망을 우습게 보고 있어.”
“오호…….”
“두고 봐. 그의 첫 번째는 내가 될 테니까.”
“……응원하마.”
쉽지 않은 일인 것을 안다.
하지만 그 일을 해낼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을 만큼 달기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그 응원에 여전히 밝은 미소로 화답한 달기가 손을 내젓고는 주연하의 앞으로 다가갔다.
우마왕 성에서 축제가 열리고, 궁에 머물고 있는 황준우의 일행들 모두가 그를 즐기기 위해 바깥으로 나왔다. 주연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하필 다툰 날, 말도 없이 사라진 황준우가 한 달째 소식이 없단 사실에 안절부절못하는 나날을 보내다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왔다.
유계의 공기는 썩 기분 좋다고는 못할 느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 전환이 되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면 주변의 화려한 볼거리와 축제의 분위기 덕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한동안 어딘지 모르게 답답했던 주연하의 마음은 꽤나 풀어지고 있었다.
아마 분위기를 더욱 즐기기 위해 곁들인 술 한 잔의 도움도 크지 않았을까?
‘황준우가 돌아오면…… 일단 사과를 해야겠어.’
그리고 자초지종을 들을 것이다.
애초부터 무작정 바보처럼 화를 낼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날을 되돌아보고, 기분이 좋아진 덕에 내릴 수 있던 결론이다.
하지만 황준우의 자초지종과는 별개로 해야 할 일도 분명히 존재한다.
‘달기는…….’
아름다운 여우 요괴의 왕.
그녀의 마음만큼은 진심이다.
적어도 황준우를 대하는 그 자세에 삿된 마음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은 주연하마저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몰랐다면 모를까, 얼굴을 부딪친 이상 그를 무작정 무시할 수만은 없다.
‘이야기는 나눠야겠지.’
서로의 입장에 대해 확실히 말해야 한다.
‘미안하지만 양보할 생각은 없어.’
처가 아닌 첩이라고 하여도 마찬가지다.
욕심이라고 해도 할 말 없지만 주연하는 황준우가 자신만의 남자이길 바랐다.
주연하 본인 외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것은 달기가 아무리 아름답고, 또한 진실 된 마음이어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그로 인하여 달기에게 꽤나 미움을 받겠지만 어쩌겠는가?
‘나라는 여자가 그런 사람이거늘.’
황준우가 다소 난감해도 어쩔 수 없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주연하였다.
생각을 정리하고는, 눈을 감고 또 한 번 술잔을 기울일 때였다.
“주연하.”
달콤하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다소 차갑게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보니 그 어느 때보다도 예뻐 보이는 달기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 이야기 좀 할까?”
거절할 것은 없다.
바라던 바다.
“좋은 생각이다.”
주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계, 귀왕의 장원에는 한동안 망령들의 비명이 무섭게 울려 퍼졌다.
귀곡성(鬼哭聲).
달리 표현할 바 없는 그 소름 돋는 음성은, 다른 곳도 아닌 귀왕의 장원에서 나왔기에 유계의 주민들 중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곁을 지날 때면, 혹시 자신에게까지 폐가 올까 몸을 웅크렸을 뿐이다.
그런 나날이 자그마치 한 달이 넘게 흘렀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강력한 기운이 귀왕의 장원 주변으로 요동치고, 폭발할 듯 날뛰다 급격하게 잠재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또다시 한참을 침묵하던 귀왕의 장원에서, 곧 거대한 광소(狂笑)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 크하하핫!”
유계의 하늘과 땅을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 뒤에는, 악의가 가득 담긴 언령이 섞여 나왔다.
“이 내가 곧, 널 죽이겠다. 숙! 크하하!”
신살의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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