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47화
제 347화
축제는 자그마치 이레(7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동안 신나게 놀고,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든 우마 일족과 마호 일족은 눈에 뜨일 정도로 관계가 가까워졌다. 몇몇 우마 일족은 친해진 마호 일족과 함께 우마성을 떠나 마호 일족의 본성으로까지 향했다. 색다른 그들의 삶을 구경하고 싶다는 명목인 것이다.
전쟁이 있기 전에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콧대 높은 우마 일족과 자존심 강한 마호 일족.
서로 쉽게 양보하지 않던 두 일족이 이렇게 가까워질 줄은 누구도 몰랐던 일이니 말이다.
반대로, 축제가 끝난 이후 더욱 서늘해진 관계도 있었다.
달기와 주연하.
축제 첫날 밤, 둘은 어떠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 다퉜는지 자잘한 상처를 입은 채 궁으로 복귀했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서로를 소원해하다 못해, 아주 신경도 쓰지 않게 될 정도로 멀어진 것만은 분명했다.
일행들 입장에서는 그 냉랭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어찌 해결할 방안도 없기에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황준우가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점점 더 함께 모여 있는 것이 어색해질 때쯤, 사건이 일어났다.
“……!!”
언제나처럼 우마궁 곳곳을 누비며 책을 읽던 백교의 가는 눈이 크게 뜨였다.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심장은 터질 듯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숙…….”
작은 목소리로 하얀 신의 이름을 부른 백교는 곧장 우마왕을 만나러 갔다.
“숙이 위험합니다.”
“뭐……?”
창백한 안색.
눈에 뜨이게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을 감추기 위해 방에서 두문불출하던 우마왕이 놀란 음성을 흘렸다.
“전생자, 그가 뭔가 끔찍한 것을 만들어 냈습니다.”
굳은 얼굴의 백교가 말했다.
“그가…… 벌써 움직였다고?”
전생자는 얼마 전 죽었다.
그리고 죽은 이후로는 대체로 몇십 년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한데 벌써 무언가 또 다른 일을 벌였다고 한다.
심지어 그 일 자체가 자그마치 상위 신, 숙을 위협할 정도였다.
굳은 얼굴의 우마왕은 시녀들을 시켜 궁에 있는 손님들을 모두 소집했다.
황준우를 제외한 일행들이 한데 모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백교는 우마왕에게 전했던 것과 같은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생자가 숙을 죽일 무언가를 만들어 냈습니다.”
“미친…….”
달기가 욕설을 흘렸다.
반면 황서연과 서문지언, 주연하, 경호, 홍산 등 인간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의문을 표했다.
“그러니까…… 오빠한테 대충 듣기는 했는데, 숙님은…… 신인가요?”
황서연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예. 신입니다. 현재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상위 신이시죠.”
“유일한 상위 신…….”
조심스럽게 읊조린 황서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이런 말만 들어서는 백교의 굳은 얼굴과 우마왕, 달기 등의 반응을 이해하기 힘든 터였다.
“자세한 건 도착해서 이야기하죠. 우리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 처음 보는 백교의 다급한 모습은 일행들 모두의 경각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지금 곧장, 선계로 이어질 문을 열 겁니다.”
백교의 말에 일행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이후 움직일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창백한 안색의 우마왕도 함께였다.
“넌 뭐하는 거야?”
달기의 질문에 우마왕이 고개를 들고는 말한다.
“함께 갈 것이다.”
“그 몸으로?”
“이전 전쟁에서도 말했듯 짐은 안 될 것이다. 충분히 증명했고…….”
“헛소리 마. 너 이번에 가서, 뭐라도 하면 분명히 죽어. 남은 시간 따위는 없어질 거라고.”
“그래도 멍청하게 손만 놓고 있을 수는…….”
“그만!”
중재자 역할을 맡은 것은 백교였다.
“말했듯 시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마왕께서 이번 일에서 빠지는 것은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뭐가 하지만이야! 다시 말해서 죽는다니까, 멍청아!”
“죽어도 괜찮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나는 우마왕이다. 목숨이 아까워 침대 위에서 졸렬한 죽음을 맞이하느니, 싸우다 영광스럽게 전장에서 떠날 것이란 말이다!”
“네 백성은 생각 안 해?”
“다섯 용사가 있지 않느냐! 그들이라면 충분히 우마 일족을 잘 이끌어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병신 같은 년이…….”
참지 못한 달기가 욕을 내뱉으며 우마왕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간다. 한 손은 뺨이라도 내려칠 듯 높이 들어 올려진다.
[그만.]
다시 한번 백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백교의 음성이 아니다.
새하얀 빛.
주변으로 퍼지는 따스한 온기에 모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백교의 모습에는 어느덧 하얀빛을 띤 여인의 형상이 겹쳐져 보였다.
[우마왕.]
“하얀 신.”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등장에 우마왕의 미간이 깊게 팼다.
[이미 너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잘해주었단다.]
우마왕의 두 눈이 흔들린다.
[부탁이야, 우마왕. 난 네 죽음을 원하지 않아.]
“하지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폈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던 우마왕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국 난 아직도 부처가 되지 못했어.”
[그건 네가 모자라서가 아니야. 오히려 내 욕심 탓이 컸지. 지금에 와서는 여력이 모자라고…….]
숙의 또 다른 이름은 석가여래다.
또한 원시천존이다.
이 세계에는 오직 창조자인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자면 별을 만드는 것이다.
별의 목적은 다양하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방법은 누군가의 새로운 터전이 되는 것이다.
별은 곧 완전한 새로운 땅.
최초로 뿌리내린 이들이 작은 텃밭부터 가꾸어 나갈 수 있는, 고향(故鄕)을 만든다.
“알아. 나도. 내 원죄(原罪)가 깊어 오랜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 척박한 땅에서 우리 일족을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아.”
우마왕은 최초로 자신이 유계로 향하기로 한 그 날을 기억했다.
자신의 원죄와, 모든 업보를 등에 업고 시작한 일.
홀로 하고 싶었던 일이었지만 불가능했다.
그녀를 위해 모든 우마 일족이 희생했다.
때문에 보답을 받게 해야만 한다.
한 몸이 으스러져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멸의 길을 떠나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우마왕이 가진 진정한 업보였다.
[보상이 미뤄져서 미안해. 하지만 거듭 말해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야. 꼭, 모든 것이 끝나면 합당한 보답을 할 터이니, 제발 이제는 그만 쉬어. 내가 이렇게 부탁…….]
무언가를 이어서 말하는 숙의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 백교의 모습에 겹쳐졌던 여인의 형상은 흐릿하게 흩어지고, 뭉치기를 반복한다.
우마왕이 놀란 음성을 흘렸다.
[시간이…… 없어……. 약속…… 존재를…… 걸고…….]
숙이 사라졌다.
대신하여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지친 표정의 백교였다.
“굳이 직접 오실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아랫입술을 질근 깨문 백교가 고개를 내젓는다.
방금 전 그 짧은 시간의 대화를 위해 숙이 희생한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무엇보다 시간이 또 흘렀다.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빌어먹을, 내 고집 탓에…….”
한숨을 내쉰 우마왕이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는다.
“미안하다.”
사과를 건네는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자괴감마저 어려 있었다.
“달래주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군요.”
그런 우마왕을 보며, 묘한 표정과 함께 한숨을 지은 백교가 부채를 들어 올렸다.
“자, 진짜 갑시다. 시간이 없으니까요.”
부채가 아래로 그어지고, 백교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이윽고 허공에 하얀 공간이 떠올랐다.
백교가 먼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나머지 일행들도 그 뒤를 따른다.
마지막,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홀로 남을 우마왕을 바라본 달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멍청아. 그런 자책도 살아 있으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미안해하지 말고, 고마워해.”
그 말과 함께 달기도 공간 너머로 몸을 던진다.
단숨에 문이 닫히고, 이제는 정말로 홀로 방 안에 남은 우마왕이 조금은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안해 말고, 고마워하라고?”
평생을 일족에게 죄책감만을 가지며 살아왔던 그녀로서는 전혀 생각도 못 했던 말이었다.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게 얽히는 것만 같았다.
백교와 함께 넘어온 일행들을 맞이한 서왕모와 태상노군의 주변으로는 수많은 선인이 모여 있었다.
이미 선계 전체는 비상사태에 돌입한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황서연이 또 한 번 의문을 흘렸다.
몇몇 이들에게서는 긴장감을 넘어 숭고함까지 전해지고 있다. 도저히 그 분위기를 이해할 수가 없는 탓이었다. 다행히도 굳이 황서연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상황은 아니었다. 신선들 대다수도 일단 모였지만, 이유를 모르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모두 다 왔군.”
그런 의문을 끊어낸 서왕모의 음성이 이어졌다.
“최대 위기다. 숙…… 아니, 원시천존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
웅성웅성.
신선들 사이로 떨림이 일었다.
모두가 경악한 느낌이다.
“다들 알겠지만, 원시천존께서는 세상에 하나 남은 상위 신이시다. 다가오는 멸망의 때를 홀로 늦추고 계시지. 만약 그분까지 소멸한다면…… 이 세계에는 당장 멸망이 도래한다.”
“멸망이 당장?”
황서연이 놀란 음성을 흘렸다.
그제야 신선들이 놀란 반응을 보인 것이 이해된 탓이다.
주변에서 느껴지던 숭고한 정신도 이해가 되었다.
멸망이 무엇인가.
황준우가 말하길 세계가 사라지는 것이라 하였다.
좋아하는 음식도, 옷도, 무공도, 가족들도 모두 사라진다.
‘막아야 해.’
자연스레 황서연의 눈빛에도 독기가 머금어졌다.
작금의 사태가 엄청난 상황이란 것을 확실히 인지한 것이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상황을 헤매고 있던 일행들 모두의 눈빛에 결연한 의지가 새겨졌다.
“최대한 막으려고 하겠지만, 상대가 좋지 않다. 독고상완이다.”
“독고상완, 그가!”
“설마 아직 살아 있을 줄이야.”
신선들 사이에서 또 한 번 큰 소란이 일었다.
대다수가 아주 오래전부터 선계에 머물던 이들이다.
아주 오래전, 선계로 들어와 세계를 구원해줄 것이라 믿었던 악인의 모습이 그들의 뇌리에 그려졌다.
숙이 자신을 낳고 버렸다고 믿던, 다소 불쌍한 줄로만 알았던 아이의 모습이다.
“놈은 영혼을 이전하는 술법을 익혀 자신을 감추고 오랜 세월 힘을 쌓았다. 그리고 얼마 전에 결국 큰일을 벌인 듯하다.”
쓴 신음을 흘린 서왕모의 시선이 백교를 향했다.
그녀의 정신으로 곧바로 이어진 숙의 말을 들었음에도, 아직 도저히 믿기지 않는 탓이다.
하나 백교의 고개는 무심히도 끄덕여진다.
잘못 들은 이야기가 아니란 뜻이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으면 이 많은 신선을 모아놓고 이런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믿고 싶지 않은 것을 부정하고 싶은, 참으로 본능적인 발악에 불과한 일이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