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48화
제 348화
“휴…….”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쉰 서왕모의 눈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찌 됐든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지금부터 선계 전체에 비상령을 건다. 놈은 유계에서 출발했으나, 어느 방향을 통해 상제께 오를지 모른다. 비록 한때 우리 품에 있었던 아이일지 모르나…….”
서왕모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선계에 도착하는 순간,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독고상완을 영멸시킨다.”
“설마하니 전생자의 정체가 독고상완이었을 줄이야.”
서왕모의 결의가 내뱉어진 이후.
싸울 줄 아는, 혹은 싸울 줄 모르는 신선들을 비롯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마음을 다지는 그 시기에 서왕모는 남모를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지만 대화할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잠시 바닥을 향했던 시선은 정면, 백교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그가 영멸하였다고 생각하였지요.”
백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독고상완.
아주 오래전, 필히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 믿었던 그들의 희망이자, 오랜 후회.
독고상완이 있었기에 그들은 희망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가 영멸하였을 때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었다.
“만약 그가 언령을 사용하지 않고 세계에 개입하여 스스로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다면 수백 년이 더 지나도 몰랐을 일이었겠지요.”
백교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사실 이는 그의 일이기도 한 탓이었다.
세계를 떠돌며 희망을 발굴하고, 혹시 있을 위험을 미리 감지하는 것.
지혜를 벗어나 지식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백교의 역할이었다.
그런 의미에 있어 이 시점까지 독고상완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뼈아픈 일이었다. 그가 이토록 일을 벌이기 전이었다면 훨씬 더 수월하게 방비할 수 있었을 터니 말이다.
“어쩌겠느냐. 이미 벌어진 일인걸. 애초에 숙이 품고, 홀의 조각을 담아 만든 영혼이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던 게지.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라. 그래도, 다섯 살배기 아이 때부터 품에서 키웠던 녀석이니까.”
서왕모의 눈은 먼 과거를 그린다.
회상이다.
어린 인간 아이의 몸으로 처음 선계에 들어왔던 독고상완.
숙이 자신을 버렸다는 비틀린 마음과, 다소 이기적인 태도가 문제였으나 다소 혹독한 교육이 이어진다면 돌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나 독고상완은 조금 달랐다.
그는 생명의 죽음에 무심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즐겼다.
자신의 고통에도 어떠한 희열을 찾는 듯했다.
누군가가 기뻐하는 것을 불쾌해했으며, 행복이란 단어를 증오했다.
그런 그가 신선들 몰래 사술(邪術)과 악법(惡法)을 배우고 있단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뒤늦은 후였다.
청년이 된 독고상완은 이미 거대한 악의로 물들어 있었다.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비틀려 있었듯, 그저 그의 본성이 악(惡)일 뿐이었다.
두 신이 언젠가 제강에게 가졌던 악의를 모두 물려받아 버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고,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선계의 최고 신선들은 결국 잔혹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손으로 기른 독고상완을 영멸시킨다.
누구보다 독고상완을 아꼈던 서왕모가 가장 앞장섰다.
영멸하는 것만 같았던 독고상완은 거대한 원망과 저주를 내뱉으며 사라졌다.
서왕모는 그런 그의 영멸을 끝까지 직시하지 못했다.
가슴 한편이 무너지듯 아픈 그 느낌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서왕모의 탓이 아닙니다. 아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요. 우리는 이미 먼 과거에 말하였지 않습니까. 그저…… 독고상완이 악일 뿐입니다.”
“그런 단순한 결론으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백교는 어설픈 위로가 서왕모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매정해 보이는 인상을 한 서왕모가, 사실 선계의 누구보다 따뜻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괜히 그녀가 수많은 신선 중에서 삶과 죽음을 함께 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마음이 있기에 누구보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것이다. 때문에 괴롭기도 할 테지만 말이다.
“그래도 서왕모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숙께서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요.”
서왕모의 입가로 자조적인 웃음이 머금어졌다.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자조적인 후회가 아닌, 어떻게든 독고상완을 막는 것이겠지.”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독고상완이 스스로의 존재를 자신 있게 밝히며 선언한 일이다. 대체 얼마나 큰 힘을 얻게 된 것일까? 숙으로부터 어렴풋이 들은 바로는 삼황오제의 힘이 그와 연관되었다고 했다.
‘삼황오제.’
가장 오랜 과거, 지상의 거인 반고를 쓰러트리고 세상에 군림하였던 존재들.
너무나 강했기에 오만하였던 이들이다.
언제든 자신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멸망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하였던 그들은, 서로 간의 다툼 끝에 멸망을 가속화하기까지 했다. 숙이 중재하였지만 이미 때는 뒤늦은 후였다.
누군가는 물러설 수가 없는 입장이었고, 또 누구는 자신의 야망에 이미 눈이 멀어버린 채였다.
생각해보면 세계는 이미 수많은 기회를 얻었었다.
이 세상은, 굳이 숙이 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사라지지 않기 위해 걸출한 인물을 늘 토해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좋지 않았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그리고 어느새 세계조차 지쳐 쓰러지고 있던 때에 그가 태어났다.
“황준우.”
마치 서왕모의 생각을 읽은 듯, 백교가 그의 이름을 언급했다.
“특별한 인물이지.”
“숙의 마지막 염원이 담겼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하여도 위태위태했어. 그가 독고상완과 다르지 않을 길을 걸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이었지.”
“동감합니다.”
숙의 마지막 염원.
그리고 세계의 마지막 희망이 될지도 모를 인물.
때문에 전력을 쏟았다.
숙, 백교, 선계의 최고 신선들까지.
이미 독고상완 때에 범한 우가 있기에 더욱 조심스러웠지만, 알게 모르게 그들은 언제나 황준우의 곁에 있었다.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 세계를 사랑하게 되어서.”
“그의 재생을 누구보다 반대했던 분답지 않은 이야기로군요.”
“믿지 못했으니까. 전생의 황준우는 홀의 파괴적인 영혼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이었다.”
황준우라는 인물이 품은 재생의 비밀.
그를 잠시 입에 올린 두 사람이 침묵했다.
문득 기묘한 위화감을 느낀 탓이었다.
“그나저나 늦는군.”
말은 서왕모가 먼저 꺼냈다.
“모인 신선들이 두려워서라고 믿고 싶지만…….”
그럴 리가 없다.
신격을 얻은 독고상완.
그가 삼황오제라는 날개를 달았다.
사실 신선들 모두가 영멸을 각오해야 할 싸움이었다.
부채를 들어 올려 얼굴의 반을 가린 백교의 눈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미간은 크게 팬다.
“찾을 수 없습니다.”
“삼황오제의 비호가 그를 감추고 있는가?”
삼황오제의 힘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는다.
이쯤 되니 역시 또 다른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인상을 와락 일그러트린 서왕모의 눈에 당황이 어렸다.
독고상완은 스스로가 숙을 죽이겠다고 언령을 통하여 선언했다.
스스로를 감추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내 위협을 가한 것이다.
당당한 행보에, 그의 분노가 느껴지니 의심할 여지를 가지지 못했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모습을 감추었다고?
“함정…….”
더 이상 말문을 잇지 못한 백교의 손에서 부채가 떨어져 내렸다.
서왕모의 시선은 결의를 다지고 있는 신선들에게로 향했다.
선기가 넘치는 선계에서 모인 결전의 병력.
“전장을…… 잘못 골랐군.”
독고상완의 수작에 놀아나 버렸다.
미안함이 아닌 고마움을 알라.
달기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을 몇 번이고 떠올리던 우마왕의 입가로 조소(嘲笑)가 맴돌았다.
“과연, 달기 년의 말대로 난 참으로 어리석었구나.”
한숨이 푹 하고 흘러내렸다.
아마 숨이란 것이 형상화되어 보인다면, 마치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을 터였다.
“한 번도 고맙다고 말한 적이 없었지.”
물론 미안하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언제나 최전방에서, 가장 앞에서, 등으로, 몸으로 말하던 것이 그녀의 선택이었으니 말이다. 그 모습에 담긴 감정을 모두가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리고 실제로 일족 모두가 느끼고 있었을 터였다.
‘그저 미안해하였지.’
속죄의 심정으로 싸웠고, 버텨왔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우마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는가?
“망할 년, 그게 말처럼 쉬울 리가 없을 텐데.”
몇천 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늘 미안함을 표현하는 법만 배웠다.
한데 이제 와서 고마움을 표현하라고?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우마왕이라도 단번에 그런 변화를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변화하면 된다.
“얕보일 이유는 없지.”
열 받지만, 건방진 달기에게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힘을 낼 생각이었다.
정신을 조금 수습하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 순간이었다.
큰 울림과 함께 우마왕의 궁궐 전체가 떨렸다.
‘습격?’
동시에 우마왕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우마왕은 무언가에 홀린 모습으로 미친 듯이 달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유계의 척박한 평야다.
‘성벽이 사라졌어.’
성을 견고하게 지켜주던 성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먼지조각이 된 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한 것이다.
주변으로는 끔찍한 악의가 번지고 있다.
우마왕은 이 느낌을 아주 잘 알았다.
‘설마…….’
갑자기 머리 위가 유달리 뜨거웠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녹아내릴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태양이 유계 근처에 가까이 다가온 것만 같은 느낌이다.
‘착각이 아니야.’
시선을 돌린 곳에 작은 태양이라고 하여도 의심하지 않을 거대한 화염의 공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떨어진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우마왕은 혹시 하는 마음에 황준우에게 돌려주지 않았던, 파초선을 집었다.
창문을 부수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고오오-!
머리 위로 작은 태양이 떨어져 내린다.
우마궁의 높은 뿔이 흐물흐물, 마치 액체처럼 변해버리기 시작한다.
파초선을 쥔 우마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높이 솟은 뿔에서 불꽃이 튀긴다.
곧 머리카락 끝자락에서도 불길이 피어 올라왔다.
당장에라도 녹아버릴 것 같다.
우마왕이 이럴진대, 다른 일족은 어떻겠는가?
‘나의 일족은, 내가 지킨다.’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거친 콧김이 내뿜어진다.
“으아아-!”
비명일까? 기합일까?
스스로도 몰랐다.
다만 몸이 타오르는 것을 벗어나 찢어지는 것 같다.
영혼은 버티다 못해 조각난 유리처럼 산산이 깨져버리며 흩어진다. 그래도 상관없다.
‘휘두를 수 있다.’
몸이 부서지고, 영혼이 개박살 나겠지만 아무렴 무슨 상관인가?
지키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낼 것이다.
미안해서?
그런 감정은 버리기로 했다.
고마워서?
이런 상황에 와서 그딴 감정은 사치다.
이유는 단순하고 간단하다.
비록 황폐하고 삭막하지만 이 땅은 우마 일족의 대지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곧 존재를 의미하고 있다.
“내가 바로 우마왕(牛魔王)이다!”
우마 일족의 대왕(大王)이 바로 그녀의 이름이자, 존재다.
전력, 그 이상을 벗어난 초월적인 염원의 힘을 담은 파초선이 휘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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