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55화
제 355화
세계가 멈추었고,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독고상완 역시 그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심장 한편이 섬뜩해지고, 주변의 공기가 차가워지는 느낌.
“하…… 하하…….”
곧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실패했다.”
멸망환을 잃은 순간 더 이상 독고상완은 황준우의 적이 될 수 없었다.
같은 물건을 두 번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멸망환은 정말 수많은 우연과, 행운, 그리고 각고의 인내와 노력이 퍼부어졌기에 만들어진 신기다.
수천 번을 더 전생하면 그런 물건을 만들 수 있을까?
‘이미 그 전에 세계가 멸망하겠지.’
황준우가 보인 허무를 통해, 제강의 힘 일부를 엿본 독고상완이었다.
감히 어떠한 신격과도 비교할 수 없다.
‘제강…….’
이야기로만 듣던 태초의 새가 날아오르면 세계는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굳이 그가 멸망환에 목을 맬 이유도 없었다.
독고상완이 바라는 것이 바로 그 멸망이었으니 말이다.
“큭큭…….”
때문에 웃음을 흘렸다.
분명 그는 실패했지만, 어떠한 계기는 된 것이 분명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세계의 시간이 멈춘 동안 섬뜩한 존재가 이 세계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강.”
태초, 혼돈의 새.
그리고 멸망을 부를 새.
“제강이 오고 있다.”
입가로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크하하-!”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앙천대소를 터트릴 때였다.
포달랍궁 전체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넓은 동공의 천장이 무너졌다.
후두둑-!
돌무더기가 사방으로 떨어지며 독고상완의 또 다른 그릇이 될 육체를 모두 짓이긴다. 독고상완은 그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무더기만을 쳐내며 차가운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미 영혼이 귀속된, 그의 또 다른 육체들을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지만 굳이 그리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내 전생에도 끝이 왔거늘…….’
이곳을 찾아온 상대가 누군지 안다.
‘황준우.’
결국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
포달랍궁의 무승들이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드는 기운이 느껴졌다.
“부나방 같은.”
불이 무서운 줄 모르는 나방의 최후는 결정되어 있다.
비웃음을 지은 채 천장을 바라보던 독고상완의 검미가 꿈틀거렸다.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겠다고? 정말 화가 나는군.’
달려드는 무승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인가?
나방을 집어삼킨 불이 사그라지는 법은 없다.
한데 황준우는 그 수많은 나방을 단 하나도 죽이지 않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더욱 분노가 솟는다.
신격을 얻었음에도 신을 택하지 않고, 인간으로 남아 결국 모든 것을 뛰어넘어 버린 괴물. 그런 존재가 독고상완, 그의 적이었다.
‘단순한 재능 문제가 아니지.’
신격 자체가 이토록 순식간에 높아지기 위해선, 재능만으로는 부족하다.
영혼에 새겨진 운명이 그를 이토록 높은 경지까지 단숨에 이끌었을 터였다.
그 사실이 화가 났다.
‘내가 그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면…….’
제 손으로 멸망을 완성했을 텐데,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독고상완과 황준우.
두 사람은 운명이 정해준 적이었다.
그리고 결국 운명은 황준우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
세계가 아닌, 그보다 더 높은 대우주(大宇宙)의 뜻이다.
천장이 또 한 번 무너지고 밝은 빛이 독고상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왔구나.”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지금 독고상완 앞에 나타났다.
“황준우.”
그 이름을 읊고, 눈을 마주친 순간 또다시 적의가 부풀어 오른다.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다.”
때문에 전력을 다해 힘을 쏟았다.
선천지기.
생명을 유지하는 모든 힘을 쏟아내어 폭발시킨다.
“으아아아-!”
비명 같은 괴성이 동공을 크게 울렸다.
내뻗은 손바닥과 검이 맞닿는다.
동시에 부정의 힘이 사방으로 폭발했다.
멸망환을 다룰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독이 황준우의 검 끝을 잠식하려 든다.
참으로 보잘것없는 발악이다.
손바닥이 관통되고, 팔 전체가 검에 갈려 터지듯이 흩어진다.
“이 내가…… 독고상완이…… 이 세계에 멸망을 부른 것이다!”
온몸이 부서져 가는 가운데, 붉은 눈이 되어 크게 외친 독고상완의 몸이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음…….”
신음을 흘린 황준우의 수왕검이 원을 그리며 빠르게 막(膜)을 만들었다.
“멸망이 오고 있다! 크하하하!”
보랏빛이 폭발하며 저주가 담긴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놀랍게도 그 살점에는 치명적인 저주, 부정의 독이 담겨 있었다. 선천지기, 그리고 영혼마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터트린 덕일까? 심지어 그 위력이 멸망환을 사용할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황준우는 침착하게, 날아드는 피를 막아 내고, 살점을 쳐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단 하나도, 황준우의 옷자락도 스치지 못한 피와 살점, 그리고 저주가 지면에 녹아 사그라든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가슴 한편이 섬뜩해졌다.
“대지에까지 저주가 새겨지고 있어.”
불모의 땅.
사막에 새겨진 저주는 이 땅을 더욱 황폐하고 거칠게 만들 것이다.
그 끔찍한 과정을 황준우는 막을 수 없었다.
저주는 정말로 순식간에 대지에 파고들었고, 그 의지를 깊게 새겼으니 말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으로써는 되돌릴 방법도 없다.
“독고상완은…….”
마지막 온 힘을 폭발시킨 대가로, 영혼의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완전한 영멸을 맞이했다.
독고상완의 무한한 전생은 끝이 났다.
대적의 죽음을 목도한 황준우의 입가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쨌든, 끝이네.”
대적과의 싸움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새하얀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백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독고상완이 영멸했습니다.”
“진실로……?”
바로 곁에 선 서왕모의 물음에 백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황준우, 우리의 구원자가 해냈군요.”
지친 표정이었지만, 표정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
그만큼이나 큰 위기였었다.
서왕모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의 구원자.”
읊조리는 음성에는 묘한 감정이 담겨 있다.
처음 어린 나이의 황준우를 보았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이 고집불통에 제 잘난 맛에 큰 녀석이 해낼 수 있을까 싶었건만…….”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삶을 살아온 결과인가.”
분명 같은 이유로 태어났지만, 비틀어진 독고상완과의 차이점이라면 그것뿐이었다.
황준우는 인간으로 태어나, 좋은 사람들의 품에서 올바른 길을 배우면서 컸다.
그 결과 자신의 가능성을 개화하여 이토록 활짝 핀 것이다.
“네 선택이 옳았구나.”
서왕모의 시선이 백교를 향했다.
“사실 나는 이 계획 자체를 반대했었지 않느냐. 독고상완의 때에 얻은 경험도 있고 하니…….”
“이해합니다.”
“무슨 계획인지 들어 볼 수 있을까?”
대화를 나누는 둘 사이로, 어느새 나타난 황준우가 되물어온다.
“아…….”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다.
아니, 선계에 누가 들어섰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황준우를 바라보는 서왕모의 눈이 떨렸다.
‘이것이 상위 신격.’
숙과 같은, 이 세계를 수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을 갖춘 존재다.
저도 모르게 그 위엄에 고개가 떨어지려 할 정도였다.
“할머니.”
“아, 그게 말이다…….”
서왕모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감추기 위함은 아니었다.
이미 황준우 역시 충분히 눈치채고 있는 상황일 것이다.
저만한 격이 보여 주는 세계란, 분명히 다를 테니 말이다.
다만 그녀의 고민은 이 이야기를 자신이 해도 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숙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다행히 백교가 그런 서왕모를 구해 주었다.
황준우는 서왕모를 잠시 바라본 후, 시선을 돌려 백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서 뵙겠습니다.”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아, 잠시!”
서왕모가 다급한 음성으로 황준우를 붙잡았다.
“이것 하나만 믿어다오. 네 삶의 모든 결정에는 누구의 의지도 없었다.”
“…….”
잠시,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던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곧장 황준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치 허무를 떠올리게 하는 백색의 공간.
아주 오랜만에 그곳으로 들어선 황준우를 하얀 신, 숙이 반겼다.
“어서 와.”
목소리가 들린다.
새하얗기만 한 빛에 휩싸여 있던 숙의 모습 역시,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확연하게 보였다.
그리고 방 한구석에 놓여 있던 화려한 빛을 내뿜으며, 사람들이 움직이던 신기한 물건에서도 소리가 들려왔다.
[현재 당국에서는 이 결정을 두고…….]
숙이 손을 내젓자, 그 소리와 함께 황준우의 흥미를 자극하던 모습이 단숨에 사라졌다. 처음 보는 형태의 긴 건물, 그리고 괴상한 복장에, 처음 보는 두텁고 끝이 뭉툭한 물건에 대고 말을 하는 인간까지. 단 한 순간에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모두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곳에만 있으면 다소 지루해서 말이지.”
“연극을 송출하는 보구입니까?”
“음…… 대충 그쯤?”
황준우의 의문에, 그렇게 답한 숙이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아. 나름대로 차도 준비해놓았으니.”
그녀의 말대로 하얀 탁자 위에는, 찻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아직 따뜻한 열기가 오르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비밀이 많으시군요.”
다소 불쾌한 얼굴로 말한 황준우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제는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그는 모르는 것이 많다.
“미안. 속이고 싶은 게 아니라, 이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
“권한?”
“응. 하지만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지금 너에게는 자격이 충분하니까, 머지않아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될 거야.”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될 이야기…….”
황준우는 의문을 거두었다.
숙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가 않은 탓이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신인 그녀가 말할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그녀의 말이 진실되었기에, 오히려 그런 감정이 더 컸다.
‘대체 어떤 비밀이 또 있는 건지…….’
궁금하지만,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
황준우는 이 의문을 잠시 접어 두었다.
대신하여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시선은 숙의 새하얀 눈에 고정한 채다.
그 차가운 눈을, 다소 떨리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숙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지?”
황준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을 할래? 아니면 내가 이야기를 풀까?”
“먼저 들어 보도록 하죠.”
“나도 그편을 추천해. 묻다 보면 끝이 없을 테니까.”
웃음을 보인 숙이 찻잔을 기울였다.
시선은 다소 아련한 빛으로 황준우를 직시한다.
“황준우.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네 영혼은 처음부터 ‘신’이 되기 위하여 만들어졌어.”
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칠야무신이라 불리던 황준우의 탄생.
무공을 익히도록 의도한 것은 숙의 결정이었다.
고아였던 황준우의 운명을 억지로라도 이끌었으니 말이다.
자연스럽게 황준우에게 가능성을 열어줄 스승을 인도하였다. 이후로는 그의 자유가 어떠한 의지로 흐르는지 지켜보고자 했다.
결과는, 다소 좋지 않았다.
“네 잘못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
황준우는 아무런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다 가라앉은 눈으로 숙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삶의 시작 자체가 누군가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무공을 익힌 계기 역시 숙의 의지였다.
모든 선택은 황준우 본인이 했다지만, 유쾌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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