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57화
제 357화
“음…….”
황준우는 숙의 조언을 가볍게 흘려듣지 않았다.
자신감과, 오만은 종이 한 장 차이와 다름이 없다.
“앞으로 백오십 일…….”
결국 생각은 남은 시간으로 흘렀다.
“대충 그 정도라고 했지만, 더 줄어들 수도 있어. 한번 시작된 균열은 변칙적으로 날뛸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아주 짧은 시간.
그사이에 황준우가 할 수 있는 일은 몇이나 있을까?
“수련한다고 해도 제강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겠지?”
“아마도? 네가 보여 준 가능성은 정말 놀라울 정도지만…….”
숙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아는 제강은 대신(大神)이다.
고작 한 계단 차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격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천재적인 재능에, 말도 안 되는 운명력(運命力)으로 성장하고 있는 황준우라고 하여도 일 년도 안 되는 시간에 그 틈을 넘을 수는 없었다.
최소 수십 년, 혹은 수백 년이 필요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본래 계획대로 네가 무난히 성장하고, 내가 시간을 계속해서 끌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사실 절망적인 상황이야.”
“그런 와중에도 웃고는 있네.”
“최선을 다했으니까.”
숙의 말에 황준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희망 고조적인 말로…….”
“아직 끝이 나지 않았기도 하고.”
“…….”
“절망적이지만, 그래도 발악해야지. 살아남으려 해야지. 네가 사랑하는 이 세계는, 내가 사랑하는 세계이기도 하니까.”
결국 결론은 바뀌지 않는다.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다 한들 그들은 손에 쥔 것을 놓을 수가 없다.
“사랑하는 세계라…….”
헛웃음 지으며 앉아 있던 의자에 몸을 기댄 황준우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인다.
‘할 수 있는 일, 그래도 최선을 찾자면…….’
계속해서 답을 찾아 헤맨다.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숙이 미소 지었다.
“황준우.”
무성의한 대답을 들은 숙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황준우는 그 기척을 느꼈지만 별다른 저지를 하지 않았다.
숙이 가진 기운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거기에 취해 버리면 다소 불쾌한 경험 정도는 잊어버릴 정도로, 편안한 느낌이다.
그를 밀어내고 싶은 감정이 들지 않았다.
때문일까?
어느새 머리가 숙의 품에 파묻혔을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 편안함에 기대어 이어지던 생각을 놓기까지 하였다.
누군가의 말대로 그냥 이대로 편안히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차오를 때쯤.
“황준우.”
다시 한번 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넌 최선을 다해왔어. 늘 한계 이상을 보여 주었지.”
그것이 황준우의 삶이었다.
엄청난 재능, 그리고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여도 위대한 대신들이나 해냈던 놀라운 자신의 역사를 써 내린 것은 황준우가 가진 말도 안 될 정도의 집착 덕이었다. 절실한 마음 탓이었다. 그는 천재로 태어나 언제나 한계와 부딪치며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이만 됐어. 굳이 네가 모든 것을 떠안으려 할 필요 없단다.”
“하지만…….”
황준우가 다소 약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숙은 조심스럽게 그런 황준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잘해냈어. 잘해주었고, 앞으로도 잘할 거야.”
“…….”
“황준우, 어찌 됐든 나는 이 세계의 어머니야.”
그녀가 서시를 닮은 탓일까?
황준우의 마음 한편이 저도 모르게 뭉클해졌다.
“어머니로서, 어른으로서 언제까지 자식에게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지 않겠니.”
“…….”
“그러니 이제는 내게…… 너와, 이 사랑하는 세계를 지키기 위해 절실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주렴.”
“그래도…….”
황준우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숙의 음성에서 어떠한 결의 같은 것을 느낀 탓일지도 몰랐다.
“이것은 내 책임이기도 하단다. 오래전 홀과 함께 어버이, 제강을 죽인 그때에 이미 시작된 일이야.”
숙은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픈 날도 많았다. 후회로 가슴을 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홀과 같이 외면하지 않았다.
죄를 정당히 마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는 네게 또 손을 빌려야 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민망하고,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야.”
“…….”
“내 말, 이해하겠니?”
황준우의 고개가 힘겹게 끄덕여졌다.
표정 역시 그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러면 난 뭘 해야 하지?”
전생에도, 재생에도 황준우의 삶은 언제나 두 가지 단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배움과 투쟁.
숙은 지금 황준우에게 둘 모두를 놓으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신의 몫으로 남겨 두라고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색했다. 그 순간 뭘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쉬는 거야. 휴식을 취하는 거지.”
숙이 그 질문에 큰 어려움 없이 답변을 했다.
휴식을 취한다.
꿈, 혹은 꿀 같은 단어다.
모두가 간절히 원하는 소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준우에게는 그 단어를 실행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생각이 날 것이 분명한 탓이다.
멸망이 오고 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 싸울 수 있는 그가 어찌 마음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난…… 자신 없어.”
“자신이 없더라도 해봐야지. 아주 만약에 우리가 이 세계를 지키지 못한다면, 이 짧은 시간이 너와, 네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마지막 추억이 될 수도 있어. 도저히 휴식을 취하지 못하겠으면, 일상(日常)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렴.”
“일상…….”
“네 아주 어린 시절, 아무런 걱정 없던 그때와 같은 나날을 보내는 거야.”
이제야 숙의 이야기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어린 시절, 한때 황준우는 일상의 행복이란 것을 분명 떠올렸었다.
누군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 하루, 하루가 너무나 소중함을 전생의 기억으로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아픈 전생에서 배웠기에, 재생하여 그를 알 수 있었다.
숙은 그 전생을 운이 없다 하였지만, 황준우의 생각은 달랐다. 그때에 배운 것이 있었기에 새 삶을 소중히 여길 수 있었다.
삶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었다.
배운 자의 재생(學士再生)이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이구나.”
품에 안은 황준우를 내려다보는 숙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억지로 기억을 지우고 네게 강제적인 휴식을 안길 수도 있겠지. 지금처럼 풀어진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리 하진 않을 거야.”
“당연하지. 내 삶이니까.”
“응. 황준우.”
“네가 소중히 여겼던 일상의 행복은,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기에 만들어졌던 거야.”
“알아.”
황석후, 서시, 경호, 그 외의 수많은 만금장 식구들.
그들 하나하나가 완벽하지 않은 황준우라는 ‘인간’을 완성된 형태로 버틸 수 있게 기둥이 되어 주었다.
“이제는 내가 너의 기둥이 되어 줄게.”
“믿을게.”
담담한 음성을 내뱉으며, 숙과 시선을 마주한다.
그 고요한 시선에 숙의 입가에 활짝 핀 미소가 걸렸다.
“그 믿음, 결코 배신하지 않을 거야.”
신의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주변으로 퍼지듯 번졌다.
“조금 잠이 오는데.”
“그럴 만도 하지. 지칠 만큼 많이 달려왔으니까.”
“눈을 뜨면…….”
“만금장에 있을 거야.”
“좋네.”
편안한 미소를 보인 황준우가 눈을 감았다.
밝은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 황준우는 정말 만금장, 자신의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지저귀는 참새 소리가 황준우를 반긴다.
드넓은 침상에 누워, 숙에게서 느꼈던 포근함을 떠올리고 있던 황준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오십 일.”
어쩌면 더 짧을지도 모르는 시간.
이 귀중한 나날을 어찌 보내야 할까?
솔직히 아직도 그 명확한 답은 모른다.
다만 특별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일상이란 그런 것이니 말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저 방문을 활짝 열고 나가면 경호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일상 말이지.’
물론, 지금의 경호는 선계에 있으니 불가능한 이야기일 터였다.
황준우와 달리 그가 곤륜에서부터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걸릴 테니 말이다.
‘어쩌면 멸망 직전까지 못 볼 수도 있고, 이건 좀 아쉬운데.’
잠시 데리러 다녀올까?
그런 생각을 하며 힘차게 문을 연다.
“안녕, 경호.”
그리고 아무도 없는 마당을 향해 혼잣말을 내뱉는다.
“이건 좀 허전한데. 역시 데리러 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웃음을 흘리는 순간이었다.
담장 너머로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굳이 상대가 누구인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운 자체가 너무 낯익었으니 말이다.
“도련님-!”
높이 외치는 목소리도 너무나 낯익다.
어느새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드는 경호의 얼굴이 두 눈에 보일 정도가 되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목소리 한번 우렁차다.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경호는 만금장에 있었다.
그 사실에 저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
그리고는 같은 힘찬 목소리로 답한다.
‘어릴 때하고 변한 게 없단 말이지.’
경호는 언제나처럼 밝다.
고아라는 과거가 있었지만, 황준우가 본 이후로 그는 언제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행복이란 것도 전염이 되는 것일까?
황준우는 그런 경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참으로 좋았다.
과거와 지금까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점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예전보다 기민하고 날렵한 동작을 한 경호가 멋지게 마당에 내려섰다는 것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응, 좋은 아침. 아, 잠시.”
아무렇지도 않게 답한 황준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경호의 말에서 기이한 점을 하나 찾아낸 탓이었다.
“드디어?”
“예. 벌써 이레(7일)나 잠만 주무셨지 않습니까.”
“뭐라고……? 이레?”
황준우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크게 떴다.
분명 느낌상으로는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난 정도의 기분이었다.
“하얀 신께서 직접 품에 안고 강림하셔서 이곳까지 데려다주신 후 흘러간 시간이지요.”
“숙이 직접……?”
“예. 저와 홍산, 아가씨 모두 만금장으로 돌아왔습니다.”
활짝 핀 미소를 보인 경호의 말에 황준우가 머리를 짚었다.
“벌써 이레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잠으로 모두 때운 것이다.
안타까운가?
‘아니. 이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지도…….’
등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해보려 하지만 역시 잠으로 그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은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지금부터라도 평범하지만 충실한 하루를 살아야겠군.”
평범하지만 충실한 하루.
그 단어가 제법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 황준우는 경호를 향해 또다시 물었다.
“아, 주연하랑 달기는?”
두 사람에게도 전해줘야 할 이야기가 있다.
일상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 황녀…… 아니지, 황제 폐하께서는 일단 황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정리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하시더군요. 아무래도 바쁠 것 같으니 만나고 싶으면 직접 와달라고 하시더군요.”
어째서인지 남은 시간이 더욱 줄어든 느낌이었다.
“그리고 여우 신선님은 선계에 남으셨습니다. 우마왕님 곁에서 할 일이 있다고 하셨어요.”
“여우 신선?”
“예. 하얀 신께서 그리 부르시던데…….”
여우 요괴가 아니라 신선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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