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59화
제 359화
애초에 안휘 자체가 남천맹이 본거지로 삼으며 여러모로 발전한 덕일 터였다.
“저기가 좋겠다.”
멀리 보이는 객점 중, 가장 화려한 곳을 짚은 황준우가 순식간에 그 앞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눈을 껌뻑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 뒤를 쫓았다.
여태껏은 그래도 황준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라도 보며 움직였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놓친 탓이다. 지금까지 빠르다고 생각했던 황준우의 걸음도 여유를 충분히 두었다는 뜻이다. 알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별개로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황준우에게 큰 도움이 되고 싶은 두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왔어? 조금만 기다려. 물 금방 준비될 거야.”
두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 먼저 객점에 들어가 방 예약과 따뜻한 물까지 부탁한 황준우가 여유롭게 손을 흔든다.
“그런데 이런 비싼 곳에서 머물러도 되는 겁니까?”
경호의 물음에 황준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내가 누구야. 천하제일 거부의 아들 아니야?”
“이제 와선 딱히 물려받은 건 없으시지 않습니까. 장주님께 용돈 같은 걸 받으신 지도 오래된 거로 아는데…….”
경호의 현실적인 지적에 황준우의 몸이 움찔 떨렸다.
“뭐, 그래도 이런 데서 며칠 머물 돈은 있어.”
“딱히 생산 활동을 하신 걸 본 적이 없는데…….”
“아무래도 군사께서 따로 주군께 챙겨드리는 것이 있는 듯합니다.”
“커, 커흠.”
홍산의 예리한 지적에 헛기침을 한 황준우가 고개를 돌린다.
“그런 듯하네요.”
경호가 그 모습에 확신을 가졌다.
남천맹에서 지원이 나오고 있다면 황준우의 주머니가 풍족한 것이 당연했다.
나름대로 맹주 품위 유지비라고 꽤나 챙겨 주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자자, 사소한 건 넘어가자고.”
“도련님이 굳이 넘어가자고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사소한 일이죠.”
황준우는 민망한 듯했지만, 이 정도 일은 경호가 생각해도 사소한 일이었다.
어찌 됐든 황준우는 여러모로 이 세계를 위해 일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사치를 부릴 수 있는 여유도 없다면 오히려 슬픈 이야기일 터였다.
“그러면 밥은 목욕하고 와서 먹는 거로 하고.”
황준우가 여유롭게 말을 내뱉던 차였다.
경호와 홍산의 시선이 빠르게 뒤로 돌아갔다.
객점의 입구로 새 손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중년과 장년으로 보이는 사내 셋이다.
문제는 그들의 기도가 남다르다는 것이었다.
최소가 조화경, 특히 중심에 위치한 왼쪽 눈에 안대를 한 장년 사내가 문제였다.
경호와 홍산, 전체 무림 내에서도 손에 꼽힐 두 사람에 못지않은 실력으로 보였다.
“신경 쓰지 마.”
이미 세 사람의 접근을 진즉부터 알고 있던 황준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딱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이들이 아니라는 뜻이다.
객점에서 마주친 것은 순수한 우연.
경호와 홍산은 황준우의 말에 시선을 거두었다.
문제는 상대측에서 두 사람을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거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장년 사내가 세 사람에게로 다가오며 말을 건다.
눈매에는 강한 기세가 어린 채였다.
“아시는 분입니까?”
혹시 하는 마음에 경호가 황준우를 향해 물었다.
“아니. 처음 보는데.”
황준우의 시선은 홍산을 향했다.
“…….”
홍산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자연스레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 장년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칠 척이 넘는 키에, 왼쪽 눈을 완전히 가린 검은 안대, 그리고 귀에서부터 목선까지 이어진 자상과 강렬한 눈빛까지, 어딘가에서 마주쳤다면 쉽게 잊지 못할 인상이다.
“아, 이 몸의 소개를 잊었군. 본좌는 녹림왕, 곽영이라고 한다.”
녹림십팔채.
강호 내에서 사도, 그중에서도 산적들의 연합 중 가장 강한 세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들의 총수인 녹림왕은 조화경의 고수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듣던 것과 다른데?’
무경 경지는 둘째 치더라도, 예전에 황준우가 녹림왕에 대하여 들은 바로는 민머리에 꽤나 흉흉한 범 문신이 오른쪽 뺨에서 허리까지 새겨진 인물이라고 했다. 눈앞의 장년 사내, 곽영 역시 제법 먹어주는 인상을 하고 있었지만 알고 있던 특징과는 너무 다르다.
황준우의 복잡한 시선이 경호를 향했다.
고개를 내젓는다.
홍산 역시 눈빛으로 복잡한 감정을 토로했다.
결과는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굳이 싸울 필요는 없지.’
황준우의 이번 강호행 목적은 유람에 가깝다.
억지로 필요 없는 싸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쪽하고 딱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데.”
“갈! 하인은 입을 다물어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황준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호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고, 홍산의 창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폭음이 일며 객점 전체가 흔들렸다.
어느새 뽑아 든 도면으로 목젖 앞으로 날아들던 홍산의 창을 막은 곽영의 입가로 미소가 걸렸다.
“예상은 했지만 창수(槍手)로군. 놀라운 솜씨다.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면 위험했겠어.”
동시에 곽영의 도에서 폭발하듯 쏟아져 나온 기운이 홍산의 창을 밀어냈다.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거리를 벌린 홍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겉모습이 단순한 위협용은 아니라는 것일까?
힘은 분명히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강호에 은거고수가 많다고 하더니 젊은 나이에 굉장하군. 창왕, 혹은 창신이라는 별호도 아깝지 않겠어. 그렇다면 이쪽이 그래…… 바로 네가 무신인가?”
곽영의 느긋한 시선이 경호를 향했다.
순식간에 황준우의 별호, 무신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경호가 놀라서 자신을 검지로 가리켰다.
“그래, 너 말이다. 듣던 것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군. 꽤나 순둥해 보이는 인상이기도 하고 말이야.”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경호가 헛웃음을 지으며 황준우를 곁눈질로 바라본다.
“아, 난 몰라. 둘이 알아서 해.”
황준우는 그냥 신경을 끄기로 했다.
아마도 새로이 녹림왕이 된 듯한 장년 사내, 곽영은 분명 상당한 고수다. 경호와 홍산과도 한 끗 차이 정도밖에 나오지 않을 인물. 일대일로 붙는다면 모를까, 둘이 함께라면 확실히 압도할 것이다.
곽영의 뒤에 서서 묵묵히 눈을 부라리고 있는 중년 사내 둘이 합류한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초절정, 조화경 초입의 무인이 세 사람의 싸움에 끼어들 여지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음…….”
경호가 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빠르게 주변을 훑는다.
갑작스러운 무인들의 싸움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객점 주인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싸우고 싶은 거면 바깥으로 가는 건 어떻소? 괜한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말고.”
“흠…… 일반 양민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건가?”
곽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감하는 바다. 피 그리고 칼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까지 말려들게 할 필요는 없지. 하나 오해하고 있는 게 있다면 나는 당장 너와 싸우고 싶은 것이 아니다.”
“물론 호승심은 들끓는다만, 우리에게 어울리는 무대란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등을 돌린 곽영이 자신만만한 눈으로 경호를 향해 읊조렸다.
“내일 오후, 어울리는 무대를 준비하고 다시 이곳으로 찾아오겠다. 그때 보지.”
그렇게 제법 멋진 자세로 사라질 것만 같던 곽영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아, 그렇지. 내 부하들이 신경 쓰인다면 네 부하들을 데리고 와도 좋다. 거기검이었던가? 실력이 제법이라는 소문이 있더군. 푸하하하!”
“으흐흐.”
“크흐흐.”
크게 웃은 곽영과 수하들이 더 이상 어떤 말도 듣지 않은 채 객점 바깥으로 나갔다.
“약간 어디가 아파 보이는데.”
그들이 떠난 이후, 황준우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도무공의 악영향 아니겠습니까?”
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다른 둘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곽영의 상태는 가히 좋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정말 다행입니다. 싸움이라도 벌어지는 게 아닐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세 사람에게로 식은땀을 흘리며 다가온 객점 주인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합비 일대는 사실상 남천맹의 본거지가 되며 이런 무림인들의 시비가 많이 사라진 상태였지만, 피 끓는 무인들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눈이 돌아가면 앞뒤를 재지 않고 싸웠고,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 때쯤 도착한 남천맹 무인들에게 끌려나가기 일쑤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이미 피해를 입은 객점 주인의 입장에서는 최선이라면 역시 쓸데없는 시비가 가게 내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뜻한 물이 준비가 거의 다 되어갑니다. 푹 쉬시고 내일 오후에는…… 헤헤.”
객점 주인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경호를 향해 손을 비빈다.
말했듯, 소란은 없는 게 최고다.
“걱정 마세요. 내일 오전 일찍 나갈 테니까.”
손을 휘휘 저은 황준우가 답변한 이후에 객점 주인의 얼굴에는 더욱 큰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오전 정도가 아니었다.
씻고, 다소 보기 안 좋아진 몰골을 정리하고 짧은 잠을 청한 일행들은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여 황산을 올랐다. 황산의 정상에 올라 풍광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 것만 같은 황준우의 입가로 언뜻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정말 소중하지 않은 것이 하나 없네.”
“…….”
뒤에 선 두 사람은 말없이 그 말에 공감했다.
황산의 정상 풍경은 제법 멋졌고, 그런 기억을 뇌와 가슴에 품은 두 사람은 작은 만족이라는 행복을 느꼈다. 따지자면 이런 사소한 일이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사방 곳곳을 둘러보며 묘하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황준우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그런 생각이 차오르고는 했다.
특히 동이 트는 때의 산 정상 아래의 풍경은 정말로 최고였다.
세 사람은 말없이,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감상했다.
“네놈들!”
그런 세 사람의 감성을 깨는 커다란 울림이 있었다.
황산의 정상 전체를 떨게 만드는 웅혼한 내력은 놀라웠지만, 세 사람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천하의 무신이 겁쟁이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가다니!”
어느덧 정상으로 솟구쳐 오른 곽영이 붉어진 얼굴로 노성을 토한다.
“죽일까요?”
홍산이 조용히 물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성을 방해받은 것도 짜증이 나는데, 상대는 하필 산적들의 왕이다.
세계에 있어 필요악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결국 악(惡).
애초에 그런 것을 벗어나서라도 무림인이란 존재는 언제나 제 목을 빼놓고 사는 것과 다름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죽음에 자비를 줄 이유는 없었다.
자연스레 황준우와 경호, 홍산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어렸다.
그 시선을 멀지 않은 거리에서 받아들인 곽영의 몸이 살짝 떨렸다.
무신으로 짐작되는 경호가 마을을 떠났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빠르게 쫓아왔지만 현재 그는 홀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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