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61화
제 361화
진심과 농담이 반반 섞인 말을 내뱉은 전왕이 가슴을 부여잡고는 계속해서 숨을 몰아 내쉬었다. 어찌 됐든, 진짜 놀란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황준우 혼자도 아니고 일행이 제법 많아서 더 놀랐다.
“이것 참, 미안하네.”
황준우가 머쓱한 표정으로 사과를 건네자, 눈을 날카롭게 뜬 전왕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큼큼, 그, 미안한 줄 아시면 조금 소식이라도 주고 찾아오시지요. 솔직히 제가 맹주님 섭섭하게 한 적 있습니까?”
“없지.”
“매달 보고 올리지, 서류 업무 다 하지, 품위 유지비 챙겨 드리지, 일하라고도 안 하지 않습니까?”
내뱉는 말마다 비수와 같다.
“거 참, 누군지 정말 못됐네. 여기 맹주 누구야? 나오라 그래.”
찔린 표정이 된 황준우가 모르는 척 떠들자 전왕의 눈이 더욱 매섭게 치솟는다. 아무래도 간이 예전보다는 커진 게 분명해 보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큼큼, 그게 나네.”
때문에 살짝 기세가 밀린 황준우가 꼬리를 말았다.
“이참에 확 바꿔버릴까? 솔직히 나 같은 놈보다는 전왕 너나 부맹주 같은 사람이 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그 질문에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딘 전왕이 황준우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눈에서는 불을 내뿜는 것 같다.
“맹주님.”
“어, 응?”
“맹주님이 맹주님입니다.”
“아, 그건 아는데…… 솔직히 나도 미안하고, 눈치 보이고…… 내가 생각해도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인단 말이지.”
황준우가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전왕의 눈매가 조금씩 처지기 시작한다.
입가로는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에휴, 제가 말이죠. 정말 억울하고, 속상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이 시대에 이런 조직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맹주님 말고는 없습니다.”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황준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젠가 말했던 것 같은 기억이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시고, 숨만 쉬고 계셔도 도움이 되는 존재가 바로 맹주님이란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라는 말 따위는 하지 말아 주세요.”
다소 딱딱하게 말한 전왕이 거리를 벌린다.
날카롭게 솟았던 눈매는 제법 풀린 상태였다.
“지금 천하는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요괴가 준동하고, 곳곳에서 말도 안 되는 자연재해가 벌어지고 있죠. 그래서인지 산속 깊은 곳이나 어딘가에서 조용히 살던 은거고수들도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 중 몇몇은 스스로 천하제일을 자처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시대인 만큼 더욱 맹주님 같은 분이 중심을 잡아 주셔야 합니다. 남천맹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과 같이 보여야 하니까요.”
“그런가.”
언제나 그렇지만 대계(大計)를 보는 전왕의 시야는 황준우보다 격이 높다. 황준우는 그 사실에 굳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대신하여 시선이 자연스럽게 지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곽영에게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거기검 대협이랑, 귀창 대협은 그렇다 쳐도 저기 세…… 분은 누굽니까?”
죄인처럼 묶여 있는 꼴을 보아하니 대우할 인물은 아닌 듯했지만 전왕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오는 길에 싸움을 걸더라고.”
“맹주님께요?”
“미친놈이로군요.”
전왕의 단언에 황준우와 경호, 홍산의 입가로 헛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세 사람도 처음 곽영을 보았을 때 비슷한 생각을 했었으니 말이다.
“제가 알기로 근래 갑작스럽게 나타난 신진고수들 중에도 그럴 만한 미친 자는 몇 없습니다. 기껏해야 이번에 새로이 녹림왕이 되었다는 곽영 정도? 무공 실력은 경천동지라 할 만한데,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고 있다더군요.”
“응. 쟤가 걔야.”
“아…… 납득이 되는군요.”
황준우가 답하자, 잠시 감탄을 흘린 전왕이 고개를 끄덕인 이후, 다시 곽영을 바라본다.
“몸을 떠는군요. 치욕적인가 봅니다.”
“아직도 은근히 자존심이 남아서 말이지. 적당히 여행이나 하려 했는데, 귀찮은 녀석이랑 엮였어.”
“맹주님의 삶이야 뭐…….”
“조용하면 이상하지?”
“예. 뭐. 후후.”
웃음을 흘린 전왕의 행동에 점점 여유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어쨌든 저도 덕분에 할 일이 하나 줄었고, 또 생겼네요.”
“안 그래도 요즘 녹림왕이 맹주님께 도전하겠다고 공공연히 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해서 말입니다.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지 않나 고민 중이었거든요.”
“꽤나 힘들었을 텐데, 저 녀석. 그래도 제법 강해.”
“네. 그래서 돌아오신 부맹주님께 부탁해볼까 했는데, 폐관에 들어가셔서…….”
“아하.”
“그래도 방법이 없던 건 아닙니다. 뇌신 요동께서도 저자한테 관심이 많았거든요.”
“요동? 아, 그래. 녀석도 만나봐야 하는데.”
요동과 장과로한테는 미안한 부분이 많았다.
그들의 보물을 유계에서 찾아 주기로 했는데 찾지 못했다.
여러 가지로 바쁜 탓도 있었지만, 결국 황금안을 이용해서도 그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분명 둘이 사용하던 물건이면 흔적이 남을 텐데…….’
굳이 유계뿐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비슷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대충 범인으로 생각하고 있던 귀왕이란 작자의 장원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했고…….’
귀왕이 독고상완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연관성을 계속해서 쫓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해결해 줘야지.’
그중 요동의 것은 따로 해결할 방법도 어느 정도 생각해 둔 편이었다.
“아, 근데 요동이 이 녀석한테 관심을 가졌다고?”
“예. 어째서인지 굉장히 불쾌한 듯했습니다.”
“흐음…….”
“아, 그리고 하고 계신 일, 부맹주님께 들었습니다.”
“아……, 그래?”
별것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한 황준우가 물었다.
“나 좀 대단하지 않냐? 생각해보니 네 말대로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할 일 다하잖냐.”
“예. 대단하십니다. 존경하고, 동경합니다.”
망설임 없는 전왕의 대답에 황준우의 낯이 붉게 달아올랐다.
“거참, 장난치는 사람 무안하게…….”
“부정할 바도 없는 사실인 걸요. 굳이 저뿐만이 아니라 뒤에 계신 두 분도 동의하실 겁니다.”
전왕의 말에 고개를 돌린 황준우는 경호, 홍산과 시선을 마주쳤다.
눈빛에는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신뢰, 그리고 전왕이 말했던 존경이 함께 엮여 있었다.
“어찌 보자면 맹주님이야말로 누구보다 바쁘게 일하시는 분이시겠지요. 저 같은 놈들이야 그저 맹주님이 꾸려주신 세계에서 잘 받아먹고 사는 거고.”
“그만, 그만. 이번에 합비가 잘 발전하고 있는 것 봤어. 영왕 전하랑 네 작품이지?”
“말씀드렸듯 모든 것이 다 맹주님이 계셨기에…….”
“에이, 그만해도 된다니까.”
어떤 칭찬도 과하면 거짓 같아 보이는 법이다.
문제는 전왕의 눈빛이 너무 진실하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의심은 들지 않지만, 부담은 되었다.
황준우는 크게 손사래 치며 짐짓 엄포를 놓았다.
“한 번만 더 내 덕이니 뭐니 말하면 나 맹주 그만둔다고 할 거야.”
“…….”
그제야 전왕의 입이 꾹 닫혔다.
황준우의 입가로 만족의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다를 뿐이야. 하는 일에 귀천(貴賤)이 어딨나? 내가 요즘 느끼는 건데 말이지. 이 세계라는 건 보잘것없어 보이는 하나의 톱니만 빠져도 불편함이란 것이 가득 생기게끔 구성되어 있단 거지.”
“큰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맞는 말입니다. 이 사회라는 것에, 귀하지 않은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전왕의 표정 역시 밝게 펴졌다.
방금 전 황준우의 말은 그가 아주 오래전, 처음 입관에 뜻을 두었던 때부터 했던 생각이었다.
삶에 귀천을 나누어서는 안 된다.
“나도 나름대로 안목을 키우려고 노력하니까.”
황준우가 자신의 눈 주변을 톡톡 두드렸다.
황금안 덕에 더욱 크게 세계를 볼 수 있게 본 덕도 컸다.
“어쨌든, 인사했으니까 이만 가 볼게. 부맹주도 보고 싶었는데 폐관 중이라니 어쩔 수 없네.”
“벌써 가십니까?”
“시간이 그리 많지 않거든.”
“아…….”
“모든 일이 정리되면, 여유롭게 찾아올게.”
“알겠습니다.”
전왕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여유로운 입장은 아니었다.
무신이란 이름이 맹을 유지하고 있다면, 실질적으로 그를 이끌고 있는 것은 전왕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만큼이나 황준우를 보기 힘들어 아쉬움이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그때는 꼭 연락하고 올게. 기왕 온 김에 몇 달 눌러앉고.”
“정말 그러셔야 합니다.”
“약속할게.”
“알겠습니다.”
황준우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전왕이 웃어 보였다.
“또 보자, 전왕. 넌 내 인생 최고의 군사야.”
이후 황준우는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칭찬과 다름없는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또 보자고 하셨지요.”
세계의 위기를 알고 있다.
또한 그 위험도가 얼마나 높은지도 잘 알았다.
때문에 그 말의 가치가 너무나 높았다.
유난히 햇볕이 밝다.
창문 밖, 보이지도 않는 황준우의 족적을 찾아 시선을 둔 전왕이 말했다.
“꼭, 약속 지키셔야 합니다.”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 걸린 채였다.
남천맹을 떠난 일행은 이제 북경을 향하기 시작했다.
방향은 본래라면 산동을 지나쳐 북진을 할 예정이었으나, 하남을 향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근래 요선사협이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요선사협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우스운 이야기였다.
천하를 침공하고자 왔던 뇌신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협객 소리를 듣고 있다.
본인들은 그 기분을 어찌 느끼고 있을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꽤나 즐기고 있는 듯도 했다.
그리고 개봉을 지날 때쯤 만난 요동의 모습에서 황준우는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소림사의 무승들이 나한진을 펼치며 고전하고 있는 호랑이 요괴의 머리 위로 떨어진 요동이, 한 손에 번개의 창을 만들고는 포효한다.
“크앗-!”
번개의 창이 호랑이 요괴의 머리를 단숨에 꿰뚫고 지나가 지면에 거대한 흔적을 남긴 순간에는 소림의 무승들이 눈을 빛내며 환호했다.
“아미타불, 과연 요선사협의 대형!”
“뇌신 요동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조심하도록 해라. 범의 형태를 한 요괴 중 약한 녀석은 없으니 말이다.”
다소 차가운 듯, 적절한 조언을 한 요동이 날개를 활짝 펼쳤다.
“오오, 저것이 뇌신의 날개.”
“부처님의 은덕이로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황준우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 말세야. 불승들이 요괴를 보고 부처님의 은덕이라 말하는 날이 오다니.”
“……저도 적응이 조금 안 됩니다, 도련님.”
대화를 하는 두 사람이 기척을 낸 순간이었다.
멋지게 날아올라 사라질 것만 같던 요동의 시선이 둘을 향했다.
“여, 요동.”
황준우가 가볍게 손을 흔든다.
동시에 떨리는 시선을 감추지 못한 요동이 황준우의 앞으로 순식간에 다가왔다.
‘어라, 더 강해졌네?’
그 움직임이 황준우가 유계에서 보았던 뇌신들 중에서도 수준급이라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본인이 말한 정수가 없이도 이미 거의 요괴왕급에 도달한 느낌이 든 탓이다.
“무신이여.”
요동이 황준우를 보며 눈을 빛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