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63화
제 363화
단전 역시 멀쩡한 듯했다.
‘단전 정도는 부서졌어도 괜찮을 듯한데.’
다시 생각해도 운이 좋다.
‘아니, 운이 안 좋은 건가?’
황준우는 내심 세 산적에 대한 처우를 이미 결정해 둔 채였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는 게 속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셋은 살아버렸다.
운이 좋든, 나쁘든,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황준우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뇌전의 정수만 빼 올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정수 자체를 얻어버리다니…….”
그사이, 황준우에게 다가온 뇌신이 놀란 눈으로 황준우를 바라본다.
두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마구 뒤섞여 있는 듯했다.
“이게 아무리 봐도 너무 위험해 보여서 말이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삼켜버렸지 뭐야.”
“그게 무슨…….”
요동은 어이가 없다는 감정과 함께,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수많은 뇌신이 그토록 목숨을 걸고 얻으려 하여도 쉽지 않은 것을…….’
순식간에 제 것으로 삼켜버렸다.
상위 신의 격 탓일까?
아니면 그릇의 문제일까?
문제는 그런 감정과 상반되는 공경의 감정도 함께 마음속에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요동은 그 이유를 제법 잘 알고 있었다.
“무신이여, 그대는…… 아니, 당신은 뇌신들의 왕(王)이 될 자격을 얻었습니다.”
말투가 공손해진다.
이전과 같이, 폭력에 굴해 어쩔 수 없이 나온 말이 아니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공경, 그리고 항거할 수 없는 굴복의 의지.
황준우가 가진 힘이 가히 모든 뇌신의 정점에 서며 벌어진 일이다. 동물의 본능과도 같다고 볼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모든 뇌신의 왕?”
“뇌령왕(雷令王). 여태껏 전무후무할 줄 알았던 존재지요. 애초에 뇌신을 압도하는 뇌전의 힘을 가진 유형의 존재는 생길 수가 없기에 불가능하다고도 생각했는데…….”
방금 전, 황준우가 그 일을 해내었다.
우주의 기를 끌어모아, 증폭시킨 뇌전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아아, 그렇구먼.”
“방금 당신께서 그 놀라운 경지를 이룩하셨습니다. 이대로 전 세계의 뇌신을 모아 하나의 왕국을 세우시는 것도…….”
하나 황준우는 그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느꼈다.
“미안하지만 사양할게.”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뇌신들의 왕이라면, 분명 굉장한 일이다.
모든 요괴 중 뇌신은 손에 꼽힐 정도로 강하다.
단일 개체로 우마 일족과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족.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는 우마 일족보다 많다.
한데도 요괴 최강을 논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을 이끌 수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황준우가 만약 그들 모두를 굴복시키고 뇌령왕이 된다면, 모든 요괴의 정점에 서는 진정한 요괴대왕(妖怪大王)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놀라운 일이지만,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크게 관심 없는 일.
이미 몇 번이고 경험해봤으며, 더 이상은 무의미하다고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부족한 나를 채워줄 인재들은 충분해.”
황준우의 태연한 말에 요동이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하면 먼 미래에라도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난 그냥 이대로 살 거야. 너희 뇌신들을 규합하지도, 어쩌지도 않을 거니까 너도 살던 대로 살아.”
“으음…….”
쓴 신음을 흘린 요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것이 왕의 뜻이라면…….”
“헛소리하지 말고. 뇌령왕인지 뭔지 전혀 관심 없으니까.”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요동의 시선이 바닥에 놓인 뇌전의 정수로 향했다.
본인이 백 년에 걸쳐 모았던 정수 못지않은, 오히려 더 순도 높고 강력한 번개의 힘이 모여서 꿈틀대고 있었다.
“하면 이 정수는 제가…….”
“원래 내가 찾아주기로 한 것이었잖아. 먹어.”
“감사히 취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뇌전의 정수를 입안에 넣고 삼킨 요동이 담담한 표정으로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
“……?”
요괴와 인간, 둘이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뭐 변화하거나, 막 갑자기 강해지거나 그러지 않네?”
“……그런 걸 기대하신 겁니까.”
“당연하잖아. 보통 그런 걸 먹으면 운기조식을 하든, 명상을 취하든 그렇게 되잖아.”
“인간의 영약 기준에서라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정수는 제게 있어 아직 다소 과합니다. 한 번에 삼키려 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소화하는 게 더 효율도 좋고 안정적이겠지요.”
“오호…… 근데 너, 갑자기 왜 이리 공손하냐?”
솔직히 이상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뇌령왕이니 뭐니 했다고는 하지만, 오만하던 요괴 요동의 변화가 너무나 갑작스럽다.
황준우로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다.
“이게 어떤 의도라기보다는…… 본능입니다. 저도 당황스러운데 거역할 수가 없어요.”
미간을 찌푸린 요동이 힘겹게 답했다.
“결론만 말하면 아니꼬운데, 그걸 잘 표현할 수 없단 거네.”
“그런 건 아닙니다. 애초에…… 그런 마음 자체가 들지를 않습니다.”
“흐음…….”
마치 언령 혹은 거대한 신격이 강제로 조율하고 있다는 뜻 같지 않은가?
하나 황준우가 보기에 요동에게는 어떠한 강제적인 힘이 보이지 않았다.
상위 신격을 얻은 그가 모른다는 것은, 이 세계의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에이, 모르겠다.”
마음 편하게 생각을 거둔 황준우가 어느덧 뒤에 도착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호와 홍산을 바라보았다.
“어찌 됐든 여기도 볼일 끝. 다시 북경으로 가자.”
요동과의 약속은 다른 방향이지만 지켰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새로운 힘을 가지게 된 것은 그야말로 덤이었다.
뇌전의 힘은 강력하지만, 황준우가 품은 상위 신격을 뛰어넘는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 그 전에…….”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른 황준우가 세 손가락에 묶여있던 빛의 밧줄을 끊어냈다.
이후 바싹 검게 탄 채로 입을 벌리고 있는 세 산적에게로 다가가 뺨을 세게 때린다.
짜자작-!
번갯불이 번쩍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동공이 뒤집혔던 세 사람의 눈에 동시에 빛이 돌아왔다.
“으어어……!”
“으아아-!”
“사, 살려 줘!”
셋이 한 몸이 된 듯 비명을 내지르는 모습을 본 황준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특히 곽영의 모습이 가관이었다.
그는 보는 것만으로도 무섭다는 듯, 황준우와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양팔로 어깨를 감싸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셋 다 안 죽었어. 물론 어딘가 하나쯤은 이상해졌을 수도 있지만.”
“으어, 어으…….”
실제로 곽영은 정신의 어딘가가 빠진 듯했다.
말 대신 기괴한 음성만을 흘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남은 두 산적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제일 전면에 있던 곽영이 튼튼한 육체로 제법 버텨준 덕일지도 모른다.
하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결코 멀쩡하지 않았다.
“너희 둘, 혹시 알지 모르겠는데, 벼락이 좋지 않은 곳을 관통했어.”
공포에 전 모습으로 황준우를 보던 두 산적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게 갑작스럽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필 못 쓰게 된 부위가 그쪽이라니, 조금 안쓰럽지만 어차피 앞으로 쓰기도 힘들 텐데, 그냥 포기해. 전왕한테 조금 알아보라고 시켰더니 너희 둘, 이름 높은 색마(色魔)였다며?”
점점 이어지는 황준우의 설명에 두 산적, 한때 녹림채 내에서도 색정광으로 이름 높던 두 형제의 얼굴이 까맣게 탄 와중에도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그럴 리가 없어.”
“내, 내가…… 내가 고자라고!?”
“어허, 그런 상스러운 말을!”
부정하는 둘을 향해 헛기침을 하며 일갈을 내지른 황준우가 뒷짐을 지고는 웃어 보였다.
“동자공을 익히기에 좋은 몸이 되었다고 하자고. 어차피 못 쓰게 되었으니 말이야.”
“으아아-!”
“이 악마!”
두 산적이 절절하게 외쳤지만 황준우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전왕을 통해 알아본 결과, 두 사람이 여태껏 약탈, 강간한 여인의 수만 하여도 칠십이 넘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본래 따르던 녹림왕이 곽영에게 패배하자마자 꼬리를 돌려 바로 머리를 조아린 간신배들이기도 했다.
굳이 봐줄 가치가 없는 쓰레기들이다.
“요동. 이 녀석들 좀 데리고 다니면서 교육 좀 시켜 줘.”
“제가 말입니까?”
“응. 다른 놈들은 모르겠지만, 저기 정신 나간 녀석이 무공이 제법이거든. 너 정도는 돼야 어떻게 잘 교육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요동의 눈이 잠시 곽영을 바라보았다.
“누굽니까?”
“곽영이라고, 너도 안다던데.”
알다마다.
요즘 본인이 천하제일이라고 설치며, 황준우는 물론 요선사협마저 홀로 상대할 수 있다고 떠들고 다닌다던 산적왕 아닌가?
“마침 노리고 있던 녀석인데 잘됐군요.”
요동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반기니까 다행이네.”
“감히 누구 말이라고 어기겠습니까. 아니더라도…… 흐흐…… 제 형제들도 굉장히 기뻐할 것 같습니다.”
전왕의 말대로 요동이 꽤나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듯했다.
“정신이 다소 빠진 듯한데, 제대로 돌아오게끔 최선을 다해야겠군요.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면 안타까울 테니까요.”
요괴에겐 인간보다 더한 잔학무도함이 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은 황준우가 만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잘 부탁해.”
“예, 죽지는 못하게, 하지만 차라리 죽고 싶게, 잘 관리하겠습니다.”
요동의 자신만만한 말에 흡족한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이만.”
황준우가 사라진다.
“봬서 영광이었습니다. 요동 대협.”
“…….”
그 뒤를 따라, 요동에게 공수를 취해 보인 경호와 홍산도 사라졌다.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공수를 취한 요동의 입가로 쓴웃음이 번졌다.
“이제는 내가 인간인지, 요괴인지.”
가끔 분간이 안 가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예법에 충실해지고 있는 것 자체가 그 증거다.
“으어으아…….”
“내가, 내가……!”
“고자라니……!”
하나 지금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세 사람에게는 그런 고민을 안 해도 될 듯했다.
“진짜 요괴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마. 이 사악한 놈들아. 크흐흐.”
요동의 입가로 오랜만에 수많은 뇌신을 긴장하게 했던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곽영을 비롯한 세 산적을 처리한 후.
북경으로 가는 길은 꽤나 여유로웠다.
황준우가 어째서인지 제법 느리게 걷기 시작한 탓이었다.
“도련님, 이 속도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뒤를 따라, 몇 번이고 노숙을 하던 중 경호가 황준우를 향해 물었다.
심경의 변화를 전혀 짐작할 수 없는 탓이었다.
“아, 그게 말이지. 그 녀석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생각을 조금 정리할 필요도 있을 것 같고 해서 말이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잘못한 게 있거든. 근데 오랜 시간 이야기를 제대로 못 풀었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기도 해서.”
“어렵군요.”
“어렵지. 연애란 게 쉽지가 않아.”
“크게 동감합니다.”
경호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웃는 모습이 된 황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