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364화 (364/373)

학사재생 364화

제 364화

“정말? 경호 아직 연애 경험 없잖아.”

“……그 공감이란 것이 꼭 직접경험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오오…… 간접경험. 뭐 책이라도 본 거야?”

“아, 아닙니다.”

“반응이 전혀 아닌 것 같지 않은데.”

“답하지 않겠습니다.”

“에헤이, 솔직히 말해봐. 어디서 연애 책이라도 보고 있는 거야? 진짜 장가갈 준비 하려고?”

장난스레 물은 질문에, 제법 진중한 얼굴이 된 경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하게 생각 중입니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일이요.”

눈빛이 깊다.

확실히 경호의 나이쯤 돼서 이런 미래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단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터였다.

“어려운 고민이지. 그래도 천하의 거기검인데…….”

“에이, 정말. 전 사냥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노루로 하지요.”

장난스러운 황준우의 말에 경호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야산을 오르는 동안 짐승들을 많이 보았다. 잡아 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이유가 없었다. 분명 그럴 테지만, 이번만큼은 경호는 꽤나 느긋이 사냥할 터였다.

어떠한 이유에 있어서든 황준우가 여유를 부리고 있다.

급할 필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급하기 싫은 것이 눈에 보일 수준이었다.

연애는 못 하지만, 황준우에 대해서만큼은 눈치가 빠른 경호다. 아마 억지로 노력해서라도 시간을 더 주고 싶을 터였다.

‘은근히 속이 깊다니까.’

애초에 그래서 경호를 좋아하는 거다.

피식 웃으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본다.

사실 절대고수나 다름없는 세 사람에게 추운 계절의 야산이라 한들 이런 모닥불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을 붙이고, 태우는 건 어떤 이유가 있을까?

‘그냥 습관?’

누군가에게는 그럴지 모른다.

‘아니면 존재를 확신하고 싶어서?’

황준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존재’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어렵다.

자아라는 것을 명확히 구분 짓는다는 일 자체가 굉장한 난이도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름 높다는 성인들도 자신의 자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그 말은 돌려 말하면 곧, ‘존재’ 자체에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애초에 정답이 없는 이야기다.

자아든 존재든, 상황 그리고 순간마다 바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가령 그런 것이다.

지나가는 노루가 멧돼지에게 공격을 받는 모습을 봤다.

위태위태한 상황.

어째서인지 측은지심을 느낀 무인 혹은 사냥꾼은 멧돼지를 내쫓아 주고 노루를 구해줄지도 모른다. 혹은 멧돼지를 아주 죽여버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무인 혹은 사냥꾼의 자아는 언제나 노루에게 측은지심을 가지는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사냥꾼은 괜히 그 이름이 사냥꾼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서, 또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분명 노루를 죽일 것이다. 양심상의 문제라고 하여도 고작 며칠을 갈 뿐이다. 무인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지금만 하여도 세 사람은 배를 채우기 위해 노루라는 짐승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냥하고 먹으려 하지 않는가?

대상이 인간으로 바뀐다면 참으로 무서운 이야기다.

하면 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노루와 다른가? 같은가?

황준우는 엄연한 인간이었다.

또한 신의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신을 직접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을 명확히 내릴 수 없었다.

‘역시 존재란 건 어렵네.’

애초에 삶이란 것 자체가 정답이 없는 탓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서로 다른 존재,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환경도, 성향도, 선택의 기로도 다른데 쉬울 리가 없다.

‘그래도 풀어봐야지.’

엉킨 실타래처럼 꼬여 있어서는 평생을 서로에게 다가갈 수 없는 법이다.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문득 홍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황준우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했다.

그리고나서 곧, 주연하의 이야기란 것을 깨달았다.

“별일도 다 있네. 홍산, 네가 그런 것도 궁금해하고 말이야.”

말이 그리 많지 않기도 하지만, 경호와 달리 연애 측은 정말 눈곱만큼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성격이지 않던가? 언제나 그의 시선은 자신이 쥔 무기, 창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황준우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준우는 이미 그런 홍산의 성향을 잘 알았다.

그는 천생 무인이었다.

창은 그가 무인으로서의 경지를 실현해 줄 도구며, 황준우는 목표로 하는 극의다.

홍산의 저런 집착이 바로 그에게 재능이라는 선물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 홍산이 웬일로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왔다.

눈빛에는 옅지만 분명 호기심이 있었다.

황준우는 제법 진지하게 그 답을 돌려줄 생각을 했다.

“첫 만남이라…… 언제나 생각하지만 인연(因緣)이란 놈이 참 그래. 제멋대로 찾아오잖아? 기척도 없고, 소식도 없이.”

“…….”

홍산의 눈빛이 흔들린다.

따지자면 그러니까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당사자의 입장에서나 느낄 수 있는 이야기인가 보다.

어쨌든 이야기는 계속 흘러나왔다.

“똑같아. 그렇게 만났어. 정말 정신없고, 생각조차 하기 싫을 때 뜬금없이 눈앞에 나타났지.”

습관처럼, 어떤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서처럼, 모닥불로 장작을 던져놓은 황준우가 아련한 눈빛을 했다.

“그때가…… 열한 살 때였나?”

기억은 명확하다.

의심은 없었다.

그 어린 시절이 있었기에, 지나온 모든 것이 있기에 지금의 황준우가 ‘존재’한다.

“생일날이었어.”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야산에서의 하루는, 생각보다 깊은 의미가 있었다.

황준우는 흐릿해지는 무언가에서, 또다시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하였고 그로 인해 망설이던 마음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저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면 될 일이다.

자신의 속내 깊숙한 곳에 있는, 다소 부끄럽고 민망한 무언가까지 끌어내어 보여준다.

어려운 일이지만, 단순히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것만으로 인간은 신뢰라는 강력한 힘을 얻기도 한다. 서로에게 이미 적지 않은 신뢰라는 감정이 있다면 그 힘은 더욱 공고히 굳어진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북경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은 더 이상 길게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적당히 쉬고 있어. 오늘 밤은 자금성에 있다가 나올 테니까.”

이번만큼은 경호도 함부로 쫓아 나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황준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금성을 향했다.

기척을 죽이고 움직이는 그를 쫓을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를 맑게 해준다.

그러다 문득, 주연하가 머물고 있는 궁의 지붕 위에 선 사내가 황준우의 눈에 들어왔다.

‘풍혁기.’

황실의 대영반.

풍제 풍혁기.

얼마 전 그가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신하여 대영반의 직위를 이어받은 적호는 제법 괜찮은 치세로 금의위를 이끌고 있다고도 들었다.

황궁에서 빠져 은거한 줄 알았는데, 여전히 궁에 머물고 있던 것이다.

‘그냥 지나칠까?’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황준우를 풍혁기는 쫓을 수 없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몰래 들어가서 주연하를 만나는 것까지는 아주 간단하다.

하지만 들어가서 대화를 하는 일은 또 별개다.

아주 작은 동요와 변화를 풍혁기는 느낄 것이다.

그가 다루는 무공이 다름 아닌 바람을 이용하는 풍신공인 탓이다. 연인 사이의 대화에 그런 사소한 방해조차 받고 싶지 않은 게 지금 황준우의 심정이었다.

“풍제.”

황준우가 모습을 드러내자, 지붕 위에 서 고고히 자금성 전체를 내려다보던 풍혁기가 놀란 시선을 보낸다.

“그대는…….”

눈빛이 묘하게 떨린다.

황준우의 얼굴이 낯설면서도, 낯익은 탓이다.

언뜻 겹쳐지는 누군가의 모습에 풍혁기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말로만 듣던 무신을 보는군.”

“우리가 말로만 들은 사이는 아니지.”

풍혁기의 입가로 묘한 쓴웃음이 흘렀다.

“나는 오늘 그대를 처음 본 것으로 하고 싶소.”

아마 제법 심경이 복잡한 듯했다. 짐작은 되었다. 아마 그것은 대영반으로서의 자존심일 터다. 황궁을 올곧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 그 미련이 아직도 풍혁기를 이 궁에 남아 있게 하는 것이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신선도 될 수 있을 텐데 말이지.’

황준우는 그런 풍혁기를 이해했다.

때문에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다고 치지.”

“고맙소. 목적은…… 폐하를 보러 온 게요?”

“내가 방해가 되겠군.”

단호한 황준우의 답에 풍혁기의 입가로 또 한 번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미 풍혁기는 그런 부분에 대해 일부 초탈해 있었다.

말했듯, 지금 그가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말 그대로 대영반으로서 자존심, 그 집착 하나 때문이다. 이제 주연하가 돌아왔으나, 아마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 곁을 지킬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황실의 수호자.

그야말로 바람과 같은 존재가 되어서 말이다.

“내일 밤쯤 돌아오겠소.”

“그래 주면 고맙고.”

“아, 무신이여, 혹시 뇌신공은 어디서 익혔는지 물어도 되겠소?”

그대로 떠날 줄만 알았던 풍혁기가 던진 질문은 의외였다.

“뇌신공?”

“그대의 몸에서…… 강력한 뇌전의 힘이 느껴지고 있소. 이전에는…….”

풍혁기는 입을 닫았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을 더 상기시키고 싶지 않은 탓이다.

“딱히 어떤 무공을 익힌 건 아니고, 그냥 벼락 맞았더니 이렇게 됐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이야기에 풍혁기의 표정은 다소 허탈해졌다.

“풍신공도 일부 익히고 계시지 않소?”

“물론이지.”

“……풍신공과 뇌신공은 본래 한 쌍이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었다.

풍뢰신공이었던가.

본래는 하나였던 두 무공 중, 뇌신공은 그 전승자가 원 제국 시절 모두 탄압당하여 죽게 되었다. 그런 원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태양이 된 제국의 수호자를 풍신공의 후계자가 자처하게 된 것은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내가 익힌 건 그쪽 무공이 아니라서, 어떻게 전수해줄 수가 없네. 그래도 뇌전을 다루는 법 자체는 조금 알 것 같은데…….”

“가능하면 실마리라도 남겨주시면 고마울 것 같소.”

“노력해보지.”

“고맙소. 그리 해주신다면 은혜는 어떻게든 갚겠소.”

손을 흔드는 황준우를 향해 공수를 취한 풍혁기가 모습을 감추었다.

황준우는 그 상태로 곧장 주연하의 침실로 향하려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덕이었다.

[큼큼.]

때문에 수많은 감시의 눈을 피해서, 주연하의 방문 앞에 도달하고서는 전음을 보냈다.

한데 돌아오는 답이 없다.

‘벌써 자나?’

아니다. 방 불은 꺼져 있고, 몸은 누워 있었지만 주연하의 의식은 분명히 깨어 있었다.

[큼큼, 이야기할 수 있어?]

황준우는 다시 한번 전음을 보냈다.

[……이곳은 답답하구나.]

그리고 드디어 답변이 돌아왔다.

황준우는 그 순간 망설임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주연하를 품에 안고 자금성을 빠져나왔다.

보름달이 화려하게 뜬 밤하늘 세상이 순식간에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졌다.

놀란 주연하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훑는다.

황준우 역시 놀란 눈으로 주연하를 바라보았다.

자려고 누워있기에 내복 차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당황했는데, 그녀의 의복이 제법 그럴싸한 경장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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