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66화
제 366화
황준우는 어느덧 숙이 있는 새하얀 방에 도달했다.
아니, 더 이상 그 공간은 하얗지 않았다.
부서지고, 깨지고, 짙은 어둠과 회색빛이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마치 어떠한 기운과도 같은 그것은 존재하는 무언가였다.
형태를 갖춘 절대자였다.
“이게…… 제강…….”
이제야 깨달았다.
무력으로 그것을 뛰어넘으려 하지 말라는 숙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했다.
하얀 방을, 세계를 집어삼키려는 눈앞의 존재는 압도, 초월을 벗어난 무언가다.
그야말로 정점(頂點).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거대한 의지였다.
이런 것을 막는다고?
덜컥 겁이 났다.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숙과 홀은, 이런 존재를 한 번이지만 죽였단 말인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는 뜻은 그런 말이었나?
“황준우! 어서!”
양손을 펼쳐 거대한 빛의 막을 만든 숙이 거친 목소리를 토한다.
그 소리는 명확히 들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접근해오고 있는 절망의 크기가 황준우의 정신을 집어삼켰다.
압도적인 심(心)을 이룬 상위 신.
절대적 무인이라는 이름은 이 순간 모두 의미가 없었다.
세계의 멸망은 확정된 것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콰가가각-!
하얀 방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침상도, 탁자도, 괴상한 잡음을 내던 물건도 모두 어그러지고 빨려 들어간다.
회색빛 허무에 의하여 지워진다.
황준우는 자신이 가진 제강의 조각, 허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깨달아버렸다.
이건 그야말로 조각의 일부에 불과했다.
제강이라는 최고신, 대우주의 율법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지고신(至高神)의 발톱 때와 같은 잔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혼란이, 혼돈이 마음을 흔든다.
“너와 내가 하지 않으면, 누구도 막지 못할 일이다!”
다시 한번 숙이 소리친다.
“약속하지 않았느냐! 모두를 지키겠다고!”
아, 그렇지.
모두를 지켜야 한다.
알고 있는데도 몸이 안 움직이면 어찌해야 할까?
“반지! 약속의 증표로 그녀가 네게 남겼지 않느냐!”
“반지…….”
황준우의 시선이 아직도 꽉 쥐고 있는 반지 상자를 향했다.
끼워주고 오려 했는데, 돌아오겠다는 약속의 증표로 받았다.
무형의 공포가 짓누르던 정신에 빛이 한 점 점등되는 듯했다.
“네 아버지가, 어머니가, 동생이, 연인이, 동료가 그리고 이 세계가…… 모두 너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
“우린 해낼 수 있다! 황준우! 너는 여태껏 뛰어난 재능에만 휘둘려 살던 얼간이가 아니었지 않나! 존재를 기억해라!”
숙이 피를 토하는 듯 외쳤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발악 중이라고.”
이를 악문 황준우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몸에서는 사나운 뇌전이 번쩍였다.
[…….]
동시에 지고신의 거대한 의지가 황준우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엄청난 중압감이다.
초월하고, 또 무한으로 증식하여도 한 걸음을 떼기가 힘들다. 하지만 나아간다.
두 눈을 부릅뜨고, 한 손에 꼭 쥔 반지 상자를 놓치지 않은 채 무거운 걸음을 내뻗기 시작한다.
그를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던 숙의 시선은 이제 방을 모두 잡아 먹어버린 제강을 향했다.
“어버이시여! 제발 이 땅의 생명들에게 기회를 주소서!”
목소리는 절박했다.
황준우에게 외칠 때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간절했다.
“죄를 지은 것은 나와 홀입니다. 어째서 이 세계 모두를 돌리려 하십니까!”
목소리가 닿지 않는 것일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쩌면 이미 결정한 의지를 되돌리기 싫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지만, 황준우는 그런 지고한 의지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정을 되돌릴 수 있는 존재가 무엇도 없기에 가능한 일.
하지만 지금 황준우는 그 일을 해내야만 한다.
‘더 빨리…….’
이토록 몸이 무겁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
갓난아이 때도 이보다는 나았던 것 같다.
무력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재생 이후 최악이다.
아니, 모든 삶에 있어 이보다 최악이었던 경우는 없었다.
그래도 닿았다.
어느덧, 숙의 옆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저 공포스럽게만 느껴졌던 제강의 일부에 손을 뻗어 버렸다.
그 순간 무언가가 황준우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빨아들인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우주의 먼지가 되어 흩날리게 될 재앙으로 다가간다.
항거할 수 없는 멸망이다.
“황준우!”
그런 황준우의 손을 숙이 강하게 움켜잡았다.
따뜻한 기운이 타고 올라와 황준우의 전신에 번진다.
동시에 황준우를 잡아당기던 힘이 사라졌다.
숙이 어찌한 것이 아니다.
제강이 놓아준 것이었다.
그 순간 황준우는 숙이 말하는 희망의 정답을 찾았다.
‘제강은 숙을 소멸시키지 않으려 하고 있어.’
멸망이라 불리지만, 숙만은 남겨두려 한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보다 더한 징벌이 없기 때문에?
아니면 어버이인 제강이, 자식인 숙을 아끼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제강이 당장 숙을 해치려 하지 않는 것은 기회다.
“제발, 어버이시여!”
문제는 제강에게, 숙의 목소리가 닿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제강의 존재는 너무나 거대했고, 지금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힘 역시 그 일부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상위 신이라고?’
황준우는 내심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딜 봐서 상위인가?
이런 지고의 존재 앞에서는 한없이 미약한 날벌레와 다름이 없는데 말이다.
“황준우, 길을 열어야 해!”
“아무래도 목소리가 전혀 닿지 않는 것 같아. 발끝에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어!”
“이게 고작 발끝이라고?”
하다못해 다리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는가?
구전상으로 전해지는 제강은 다리만 여섯이나 되는 신이었으니 말이다.
“아쉽게도 그런 희망적인 말을 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제강은…… 존재 자체를 우주라고 보아야 해.”
“빌어먹을.”
욕이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존재 자체가 하나의 우주.
그 말이 뭔가 크게 체감되었다.
주변은 어둡고, 탁하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중압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우주 정도가 아니라, 남의 우주 자체에 뛰어들었다. 이 속의 모든 것은, 제강이 원한다면 뜻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길을 뚫는 방법은?”
“자극을 주어야 해.”
“결국 젖 먹던 힘까지 짜내란 거네.”
“응. 나로서는…….”
“이해했어.”
답변을 한 황준우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우주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은 익숙했다. 그 힘을 증폭하고 부풀려, 수왕검에 의지를 담는 일까지도 어렵지 않게 이어졌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
어설픈 탐색전을 펼칠 여유는 없었다.
검은 마음을 담는다.
그 한계는 없다.
단 한 번도 무언가의 벽에 부딪혀 보지 않았다.
초월하고 넘어설 뿐이다.
“심검, 무한.”
황준우의 눈에서 황금빛 광채가 번쩍였다.
뇌전이 함께 내달리며 주변으로 우렛소리와 함께 황금빛 줄기가 정면을 향해 날카로운 쐐기가 되어 치솟았다. 시야가 암전되고, 엄청난 충격이 황준우의 전신을 두드린 것도 순식간이었다. 손바닥에 얼얼한 감각이 차올라 어깨 위를 관통했다.
다행히 그 와중에도 육체가 멈추지는 않았다.
심검의 중심, 마음이 꺾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계를 한없이 초월하여, 무한으로 나아간다.
베고, 베고, 또 벤다.
부수고, 부순 이후, 또다시 부순다.
손에서 아릿하다 못해 화끈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고기 타는 냄새가 코끝을 휘감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 지독한 내음은 더욱더 진해진다.
‘손이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아.’
농담이 아니었다.
뜨겁고, 아프고, 괴롭다는 감촉마저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검을 쥐고 있는지, 놓고 있는지, 그것은 오로지 마음으로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한계를 대체 몇 번이나 뛰어넘었을까?
황준우는 이제 자신의 육신이 타고 있다고 느꼈다.
온몸이 황금빛으로 휘감기다 못해 녹아내리고 있는 듯했다. 살은 물론 근육, 그리고 뼈마디를 비롯한 작은 혈관들까지, 이 상태로 더 나아가다가는 분명히 없어져 버린다.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한계.’
그 순간 황준우는 자신의 상태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무한은 마음의 의지에 따라 극한의 기술을 육체로 실현하는 심검이다.
그 마음의 세계는 한없이 넓다 못해 끝이 없다.
문제는 그를 견뎌내는 육체에는 끝이 있었다.
심(心)과 기(技)는 진정한 무한에 닿았으나 육체는 그를 쫓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유형의 형태를 가진, 인간의 몸으로 어찌 무한을 실현할 수 있겠는가?
무한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형태를 잃어야 한다.
심과 기처럼 그 끝을 모르고 나아갈 수 있어야만 한다.
때문에 오롯이 우주만이 무한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아아……!’
그것을 깨닫는 순간 황준우는 내심 긴 탄식을 흘렸다.
제강을 뜻하는 허무, 혼돈, 멸망.
그중 무한이라는 단어는 없다.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착각이었다.
존재를 표방하는 단어에 무한을 첨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제강에게 있어, 무한은 당연한 근본과 같다.
우주란 애초부터 무한한 것이니 말이다.
그러니 육신이 녹아내리고, 사라질 때까지 힘을 쏟아 내어도 막힐 수밖에 없다.
무한을 막아서는 또 다른 무한에는 진정으로 한계가 없으니, 결단코 끝을 볼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마음이 꺾였다.
심의 무한이 끝났다.
자연스레 기가 흐트러진다.
황준우가 자랑하던 모든 무한이 사라졌다.
힘 한 톨 남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쓰러지려는 황준우를 품에 안는 것은 숙이다.
“……!!”
다급해 보이는 표정, 눈가에는 눈물마저 보인다. 무언가를 크게 소리치는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말로 모든 것이 녹아내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 의문보다, 안타까움이 먼저 찾아왔다.
입가로 쓴웃음이 떠올랐다.
‘끝을 보지 못했어.’
안타까움을 토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새하얀 빛이 한참이나 황준우의 전신을 보듬고 휘감았지만 큰 소용은 없는 듯했다. 숙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보였다. 황준우의 볼을 쓰다듬는 손길은 멈출 줄을 모른다.
“제발…… 대……해. 황……우.”
그 순간, 황준우의 귓가에 숙의 목소리가 닿았다.
다소 흐릿하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절박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짓는다.
“내…… 들려?”
물어오는 숙의 표정에 작은 안도가 비친다.
목소리가 나온다.
탁한 세상이 더욱 시야에 선명하게 잡혔다.
그제야 숙의 입가로 짙은 한숨이 쏟아져 내렸다.
이어서 터져 나온 것은 분노다.
“이 멍청아!”
처음이다.
숙에게 이런 매도를 당해본 것은, 덕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황준우의 표정이 얼떨떨한 것을 본 숙이 거친 숨을 몇 번이나 토해내며 외쳤다.
“그런 위험한 능력을 단숨에 쏟아 내면 어떻게 해! 방금 전 네 존재 자체가 영멸될 뻔했던 것 몰라?”
“육체가 아니라?”
분명 사라지는 것은 육신의 느낌이었다.
“그게 바로 그 뜻이야. 네가 네 신격을 인간의 육체에 묶었으니까!”
“아…….”
신이 된 황준우는, 스스로가 인간이길 바랐다.
덕분에 다소 인간적인 부분이 사라졌지만, 결국 흙으로 빚은 육신에 격이 깃들어 버렸다.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신격을 얻은 황준우에게 육신의 죽음이란, 곧 영멸을 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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