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372화
제 372화
외전 - 우주의 비밀, 그리고 계속해서 삶으로
미완의 신이지만, 그 격은 한없이 높아져만 간다.
황준우가 가진 그릇의 크기가 너무나도 거대한 탓이다.
그래서일까?
주연하가 죽은 이후로 백 년이 더 흘렀을 무렵, 황준우는 자신이 상위 신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두 눈에는 밤하늘을 수놓는 별을 넘어 우주의 끝, 그조차 넘어선 광활한 또 다른 공간이 보였다. 황준우는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여태껏 보고 느껴왔던 것이 정녕 우주인가? 아니면 하나의 항성계(恒星系)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지의 영역이 벽을 넘어선 것만은 분명했다.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이미 일부, 아주 오래전 찾아온 손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그로부터 몇백 년이나 더 흘러서 확인하게 된 지식이지만 말이다.
“벌써 백 년…….”
분명 짧지 않은 시간이건만, 길게 느껴지지만도 않았다.
삶의 순간은 살아온 기간에 비례한다고 하였던가?
불멸을 가진 황준우는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몰랐다.
“황준우, 뭐해?”
그런 황준우를 달기가 불렀다.
금오도, 요괴대왕의 궁.
가장 높은 곳에 서서 황금안을 빛내던 황준우가 답했다.
“우주를 보고 있었어.”
“음…….”
소녀의 모습을 한 달기가 짧게 신음하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실제로 꼬리가 특이하게도 ‘?’ 모양을 만들기까지 했다.
황금안을 거두고, 시선을 돌려 그런 달기를 바라본 황준우가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와도 괜찮은 거야? 곧 전쟁이 벌어질 것 같다며.”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며 많은 발전을 거두었지만 모든 종족은 여전히 투쟁하며 살고 있다. 원하는 것을 가지고자 하는 욕심과 욕망이 있는 한 이런 싸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그것은 신인 황준우라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요괴대왕, 달기라고 하여 다를 것은 없었다.
그녀는 벌써 수백 년 요괴 간의, 또는 요괴와 인간 간의 싸움을 최대한 조율해 왔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대요괴인 그녀와, 오랜 시간 정양하며 끝내는 힘을 되찾은 우마왕, 그리고 뇌신들의 왕이 된 요동이 합심하고 있었던 만큼 분쟁을 조율하는 일은 안정적으로 잘 흘러가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 중 우마왕이 금오도를 떠나면서 벌어졌다.
“우마왕이 일족을 이끌고 별로 떠났으니까. 빈자리에 욕심을 내는 녀석들이 생길 수밖에 없지.”
창조의 힘을 오래도록 다룬 끝에, 황준우는 과거 숙이 해냈던 별을 만드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본래 숙이 우마왕에게 약속하였던 별을 내주었다.
우마 일족의 땅.
그곳에서 새롭게 자신들만의 영토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이 세계, 황준우가 지구라 명명한 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우마 일족에게 최적화된 환경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터였다. 일족이 영원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마왕이 그토록 바라던 염원이었다.
그리고 금오도 내에는 우마왕의 빈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이들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처음 달기와 요동이 자제하고자 나섰으나, 오래도록 억눌러왔던 욕구와 본능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전쟁의 도화선이 이곳저곳에서 타들어 갔다.
그중에는 달기와 요동에게 반기를 드는 이들도 존재했다.
금오도를 오래도록 다스려왔던 요괴대왕, 달기의 입장에서는 수백 년 만에 가장 골치 아픈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표면적으로만 치자면 말이다.
“사실 뭐, 내가 굳이 나설 필요까지 없는 전쟁이니까. 마음먹고자 하면 요동 녀석 혼자서도 다 처리할 수 있을 거고. 언젠가는 터질 폭탄이었으니까. 놀랄 것도 없고.”
귀여운 눈웃음을 지은 달기가 그런 황준우 곁으로 다가왔다.
실제 대외적인 활동을 할 때의 달기는 요염하고,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났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황준우 곁에 있을 때는 새끼 여우, 혹은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함께 있었다.
알고 있다.
달기는 아직 주연하를 마음에 묻고 있을 황준우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이런 모습을 택한 것이다.
부담 없이 서로가 함께할 수 있는 방법.
그런 그녀가 있었기에, 가끔 찾아오는 황서연과 서왕모 또한 긴 시간을 제법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신선이 되겠다며 수련에 들어갔던 황지운도 등선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황준우의 피를 직접적으로 받은 반신이기에 시간도 많았으며, 재능이 넘치는 아들이었지만, 그만큼이나 게으른 탓에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신선이 되며 영생에 가까운 삶을 얻은 탓에 아마 앞으로는 더욱 게으른 모습을 보이겠지만 황준우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미 아들은 그의 품을 떠난 성인이었다.
삶도, 죽음도 황지운 본인이 선택할 일이다.
여태껏 황준우가 아껴왔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궁에만 있는 거 안 답답해?”
황준우 옆에 조심스럽게 앉은 달기가 물어왔다.
혹시나 이조차도 부담스러워할까, 거리를 일부 두는 것도 잊지 않은 모습이다.
황준우는 그런 달기를 보고는 살짝 웃으며 조금 더 곁으로 다가갔다.
달기의 귀와 꼬리가 빠짝 솟으며 흔들린다.
얼굴에는 기분 좋다는 감정이 가득 어린 채였다.
“응. 안 답답해. 실제로 네가 몰라서 그렇지 몇 번 외출하기도 했고. 난 신이잖아.”
인간이면서도 신.
황준우는 황금안을 펼치는 것만으로 세상 전체를 살필 수 있다. 그리고 때로는 너무나 억울하고 힘든 자들을 돕기 위해 모습을 바꾸고 나타나 작은 선의를 베풀곤 했다.
이제 황준우는 원한다면 천하의 끝에서 끝까지 이동하는 데에 하루가 걸리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랬어? 전혀 몰랐네.”
“신답게 움직였으니까.”
“뭔가 상상되지 않아.”
“언젠가 달기가 요괴신이 된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나. 하지만 신이란 건…… 너무 추상적이야. 난 황준우가 굉장하다고 생각해.”
피식 웃은 황준우가 달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부드럽고 따스한 그 느낌에 달기의 얼굴에 헤벌쭉한 미소가 떠올랐다.
“헤헤…….”
고요하지만 평온한 시간이다.
그런 두 사람이 있는 장소의 일부가 세로로 길게 갈라졌다.
“손님이 왔네.”
“……!?”
이미 그의 접근을 눈치채고 있던 황준우는 놀라지 않았다.
반면 황준우의 곁에서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던 달기의 털과 머리카락은 쭈뼛 솟았다.
눈을 사납게 세운 그녀의 온몸에서 강력하고 난폭한 힘이 폭발한다.
그를 마주한, 공간을 가르고 나선 검은 의복의 사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에…… 그게…….”
황준우와 달기를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망설임이 가득하다.
“너 누구야?”
달기가 사나운 기세를 한없이 끌어올린다.
전쟁이란 소리에도 태연하던 모습과는 다르다.
그만큼이나 눈앞의 처음 보는 사내가 무서운 탓이다.
그런 달기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은 황준우가 웃어 보였다.
“괜찮아. 그는 나를 해하지 못해.”
황준우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달기의 기세가 조금씩 가라앉는다.
눈빛은 여전히 상대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모습은 사라졌다.
“음, 저…… 혹시 잠시 시간을 멈춰두어도 될까요?”
사내가 질문해온다.
그리고 황준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녀는 괜찮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아직 그녀는…… 대신(大神)의 사도도 아니고요, 곤란…….”
말을 끝마치지 못한 사내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차가운, 그리고 가라앉은 황금안이 그의 눈을 관통하고 있다.
심장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느낌이다.
“그녀는 괜찮다고 하였다.”
신의 언령이 펼쳐졌다.
그를 직격으로 받은 사내의 미간이 크게 일그러졌지만, 떨쳐내지는 못한다.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끙…….”
결국, 앓는 소리를 낸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머리 위에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인다.
“우선 축하드립니다. 여섯 번째이십니다.”
“여섯 번째?”
“예. 대우주계(大宇宙界)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신, 그중에서도 대신이라 불릴 분은 총 여섯 분밖에 없지요. 굉장한 일입니다. 가능성을 벗어난 운명, 그조차도 뛰어넘은 무언가가 있어야지만 그 자리에 앉으실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놀랍습니다. 벌써 두 분이나 되는 대신을…….”
“그만. 대충 이해했어.”
황준우는 사내의 말을 잘랐다.
“이름이…… 제법 길었었지.”
“세르게이 뜨리예비치 드미트리입니다만, 그냥 짧게 세르게이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그래, 세르게이.”
황준우는 아주 오래전, 수백 년 전, 아직 주연하가 살아 있던 그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황석후와 서시가 함께 이승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 세르게이라 자신을 소개한 그가 찾아왔었다.
당시 황준우는 세르게이를 보고 상당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의 능력이 어지간한 신을 뛰어넘는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격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처음 보는 형태의 기운을 다룬다는 것까지, 모든 것이 신선했다. 그리고 세르게이는 그 이유를 또 다른 세계, 대우주에 있다고 말했다.
지고신 제강이 남긴 잔재들로부터 시작하여 독립한 새로운 세계들.
그리고 멸망할 줄로만 알았던 이 세계는, 결국 황준우와 숙으로 인해 지켜졌다.
세르게이, 스스로를 우주관측자라고 소개한 그는 이런 경우를 기적이라고 칭하며 황준우에게 우주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대다수는 당시의 황준우가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였다.
“네가 말한 인피…….”
“인피니티 코스모스입니다.”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편하게 대우주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군. 아무튼, 지금의 나는 그 전체를 일부나마 볼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욱 넓게 보게 될 터였다.
“대신이시니까요. 드넓은 인피니티 아니, 대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여섯 존재 중 한 분이십니다. 세계의 큰 흐름을 듣지도 않고, 앉은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대신분들만이 가능한 일이지요. 솔직히 말해, 상당히 감동적입니다. 제가 우주관측자의 업무를 마치기 전에 한 분이라도 탄생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다니요. 호호.”
마치 여성처럼 웃는 세르게이의 모습이 괴이하다.
환관을 떠올리게도 했지만, 목소리는 다소 높아도 엄연히 사내의 것이었다.
“사실 대신께서는 직접 우주를 느끼고, 보고 계시니 상위 신 때와 다르게 설명할 것이 그리 없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원하신다면 사도를 이끌고 신이 없는 다른 세계로 가, 정복하고, 자신의 우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이겠지요.”
“정복이라…….”
“실제로 몇몇 대신 분들이 그런 놀이를 즐기십니다. 남는 것도 있고요.”
세르게이가 자신의 손을 동전 모양으로 만든 이후 싱긋 웃었다.
지금의 황준우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이야기였다.
“뭐, 관심이 없으시다면 굳이 할 이야기는 아니지요. 실제 대신께 필요한 일도 아니고. 아, 그리고 하나 더,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우리 우주협의회를 통해 필요한 다른 세계의 물건을 구해드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달해드리고 싶었고요.”
“다른 세계의 물건이라…….”
문득, 숙의 방 안에 있던 괴이한 물체가 떠올랐다.
“혹시 숙 역시 너희들로부터 무언가를 구매했었나?”
“숙이라 숙…… 아, 이 세계의 하얀 신이었던 분 말씀이시군요. 기억합니다. 그분도 분명 제가 담당했었죠. 예예. 맞습니다. 지구라는 세계에서 TV라는 물품을 구매하셨었죠. 방 안에 혼자만 있으니 심심하시다면…….”
“지구는 우리 세계의 이름인데?”
“아, 그게 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지구라는 이름을 택하는 세계가 많습니다. 주로 인간들이 자립시킨 세계가 그런 형태를 갖추더군요. 음, 대신께서 자립시킨 이 세계는 따지자면 삼백스물다섯 번째쯤 됩니다.”
“뭐? 삼백스물다섯?”
“신기하지요. 어째서인지 인간들은 지구, 땅, 어스란 말을 좋아한단 말이지요. 아, 그리고 제가 아까 말한 지구란 곳은 대우주의 첫 번째 지구입니다. 대체로 순수하게 지구라는 이름 그대로를 읊으면 첫 번째라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세계는 다른 곳에 가서 어찌 불리는 거지?”
“음, 삼백이십오지구 정도 되려나요.”
어째서인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눈매를 찌푸린 황준우는 이름을 바꿀까도 생각했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딱히 더 좋은 이름이 떠오르는 것이 없는 탓이었다.
“대신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우주협회에 크게 간청해 십 지구 내로 이름을 올릴 수 있게 순서 변경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눈치를 보던 세르게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삼백이십오지구라니, 그가 생각해도 대신이 머무는 세계의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탓이었다.
“굳이 남의 것을 뺏어올 필요는 없지. 세계의 이름은 조금 더 고민해보겠어.”
“알겠습니다. 그것이 대신의 뜻이라면.”
황준우가 손을 내젓자 세르게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가장 큰 우주, 대우주에서도 대신은 여섯밖에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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