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화 (1/273)

흑검천하(내공이 너무 강함)

1화 회귀 (1)

스산한 안개가 자욱했다.

곳곳에 솟은 진회색의 기암괴석이 심연에 가려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희미한 어둠이 내려앉은 황량한 죽음의 땅이었다.

“크흐흐, 벌써 삼 년이냐?”

봉두난발의 한 노인이 석벽에 선을 쭉 그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빠져나가지도 못할 건데 날짜를 왜 기록하지?”

“헛소리! 분명히 나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두 노인의 다툼에 주변에서 비슷한 몰골의 기인들이 모였다. 안개를 뚫고 드러나는 흐릿한 형체는 실로 기괴하고 공포스러웠다.

이들은 모두 여섯.

불과 삼 년 전까지만 해도 흑도팔군(黑道八君)이라 불렸던 무림 최강고수였다. 강호를 진동시켰던 그들이 지금 이곳에 초라한 몰골로 나타났다.

“이곳을 나가면 천마 그놈부터 찢어 죽일 것이다!”

“이 자식아! 능력은 있고?”

“이곳 무량뇌옥이 유명계라도 된단 말이더냐? 엄연히 이곳은 저승이 아니라 이승이다.”

“저승보다 못한 이승이지.”

“으흐, 술 한 잔이 그립구나.”

“아, 시펄! 헛소리하면 거시기 따버린다!”

이런저런 대꾸가 이어졌다. 마교의 교주, 천마에게 덤볐다가 무량뇌옥(無量牢獄)에 갇힌 지 벌써 삼 년이 흐르고 있었다.

“천마 그 자식 정말 이상한 놈이야, 그냥 죽여 버리면 간단한 것을.”

“이렇게 잡아 놓아봐야 천마에게 득이 될 거라곤 전혀 없는데.”

“무슨 꿍꿍인지 알 도리가 없군.”

이곳에 갇힌 후 삼 년간 그들은 이곳을 탈출하려고 온갖 시도를 다 해보았다. 최강의 무공을 지녔다는 그들도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사방은 깎아지른 절벽에 십여 장 너머는 전혀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사람은커녕 살아 있는 생명체마저 전혀 보이지 않는 혹독한 땅이었다.

“뇌군! 뭔가 알아냈나? 아직 그대로야?”

모두의 시선이 유달리 머리가 큰 한 노인에게 모였다. 남루한 이 노인은 빼빼 마른 몸매를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내고 있었다. 갈비뼈가 앙상한 데다 팔목은 가늘어 금방 부러질 듯했다. 다만 눈동자에서 쏟아내는 형형한 살기만은 유달리 섬뜩했다.

뇌군(腦君)이란 별호는 한때 강호를 경악시켰었다. 흑도를 통합하고 마교에 대항하기까지 강호를 휘어잡았던 공포의 이름이었다. 흑도 역사상 최강의 책사라 불렸던 그였고 그가 있기에 흑도의 무림 제패가 가능하다고 모두가 믿었으니까.

“크흐흐흐, 내가 누구냐? 당연히 알아냈지.”

“오오!”

“설마 지난번처럼 헛물만 켜는 것은 아니겠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섯 기인이 뇌군의 주위를 쭉 둘러섰다. 뇌군이 품에서 낡은 책자를 꺼냈다. 희미하게 빛이 바랜 표지에 적힌 제목은…….

무한회귀공(無限回歸功).

그들이 이곳 무량뇌옥에 갇히고 열흘 만에 어떤 동굴에서 발견한, 배교(背敎)의 희대 비급이었다. 중원 서쪽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배교는 무공보다는 사이한 술법으로 유명한 문파 아니던가.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비급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생명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이곳에서 이 비급이 발견된 이유가 무엇일까. 더구나 비급 명이 수상쩍지 않은가. 그들을 잡아 가둔 천마의 계략일까.

그날부터 흑도팔군 가운데 가장 똑똑한 뇌군이 비급을 연구했다.

“이 비급에는 한 사람을 원하는 시대로 회귀시킬 수 있는 술법이 담겨있다. 교묘하게 술법을 숨겨놓았으나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었지. 크흐흐흐.”

“오오!”

회귀라. 꿈같은 상상이지만 회귀할 수 있다면 이곳을 벗어난다는 뜻 아닌가. 모두가 귀를 세우고 눈을 반짝였다.

“뇌군, 거두절미하고 나를 회귀 시켜다오. 내가 천마 그 자식을 때려죽이고 오마.”

다섯 기인이 앞 다투어 자원했다. 그만큼 이곳 무량뇌옥에서의 하루하루는 지옥 그 자체였다.

“과거로 돌아가면 천마를 이길 자신은 있고?”

갑자기 흑도팔군이 침울해졌다. 흑도팔군이 연합해서 천마를 상대했을 때에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둘은 죽고 여섯은 이곳에 갇혔다. 그런데 홀로 회귀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삼 년 전 천마와의 싸움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천마는 그들로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그때였다.

으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터지며 허공에서 둔탁한 물체가 떨어졌다.

쿵!

심연에 덮인 이곳이 얼마나 깊은 지역인지는 그들도 몰랐다. 다만 아는 것이라면 이 절벽을 타고 아득히 올라가면 마교 총단으로 연결된다는 것뿐. 즉, 이곳은 마교 총단이 있는 십만대산의 무저갱으로 짐작됐다.

문제는 무공이 고강한 그들도 절대 이곳을 올라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단순한 높이의 문제가 아니라 무량뇌옥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진법 때문이라 여겨졌지만.

“식량이다!”

“오늘도 어떤 놈이 처형됐나 보군.”

가끔 지금처럼 허공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마교에서 처형당한 배신자이거나 때로는 겁 없이 마교에 대항한 중원 무림인이거나. 당연히 이곳에 떨어지면 이미 시체로 변해 있었다. 뼈란 뼈는 모두 부서져 버리니.

다만 흑도팔군에게도 나쁘진 않았다. 그들은 이 인육을 먹으면서 생존해왔으니까.

먹을 것이 생겼다는 기쁨에 흑도팔군이 하늘에서 떨어진 물체에 다가갔다. 옷차림으로 보아 마교도가 아닌 평범한 중원 무림의 젊은이였다. 나이는 스물 서넛. 높은 곳에서 낙하하는 바람에 이미 온몸이 곤죽이 되어 멀쩡한 곳이 없었다.

“쯧쯧, 갔네, 갔어. 안타까운 생명이.”

“어리니 맛은 좀 있겠는데.”

“나이도 젊은데 천마에게 대들었나?”

“으으으…….”

청년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왔다.

흑도팔군은 놀라지 않았다. 가끔 떨어진 후에도 생명줄을 놓지 않은 녀석이 있기도 했으니까. 그래 봐야 반각도 버티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원래 죽음 직전에 회광반조란 현상도 있기 마련 아닌가.

얼굴이 짓뭉개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입이 살짝 벌어지며 다시 신음이 튀어나왔다.

“으으, 사…… 살려주세요.”

“자네, 이미 죽은 목숨이네. 내가 고통이 없도록 빨리 죽여주겠네.”

한 노인이 옷소매를 걷었다. 어차피 살 수 없다면 빨리 죽이는 것이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도 빨리 배를 채울 수 있으니 득이기도 하고.

“자네 이름은 뭔가?”

“주…… 주석하…….”

“그래, 석하. 어디 출신이지?”

“흐…… 흑검문…….”

말을 걸던 노인이 동료를 쳐다봤다. 흑검문을 들어봤냐는 표정이라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대충 명칭으로 보아 강호의 이름 없는 흑도방파로 예상됐다.

소규모 방파의 문도가 마교에까지 와서 죽을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어차피 그들이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그냥 깔끔히 죽여 버리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잘 가게. 명복은 우리가 빌어줄 테니…… 자네는 고기를 제공하는 은혜를 베풀게.”

청년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듯 눈을 뜨지 못한 채 꺼져가는 숨을 헐떡였다.

노인이 손을 내리치려 할 때였다.

“잠깐!”

“뇌군? 왜?”

“좋은 생각이 났다. 이놈을 회귀시키자고.”

“뭔 개소리야?”

흑도팔군이 모여 숙의를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들의 얼굴에 긴장과 비장함이 떠올랐다.

“이놈을 회귀시키면…….”

“그렇게 천마에게 복수하자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우리에게 뭐가 득이지?”

다섯 기인의 잡담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정작 뇌군은 조용히 부리부리한 눈빛을 뿜으며 청년을 살폈다.

“이 아이를 회귀시키면 시간이 바뀌겠지. 이 아이가 시대의 흐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무량뇌옥에 갇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운명도 비틀어지지 않겠나? 만일 이 아이가 천마에게 복수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고…….”“차라리 나를…….”

“미친놈! 죽고 싶냐! 네놈보단 내가 낫고 나보단 이 아이가 차라리 나아!”

다시 두 노인이 툭탁거렸다.

그나마 제정신인 한 노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뇌군에게 물었다.

“이런 허접탱이 녀석이 흐름을 바꿀 리가 없잖나? 대충 보니 익힌 무공도 정말 비리비리한데……. 그나마 우리와 같은 사파 인물이란 게 마음에 들긴 하다만…….”“크흐흐흐, 그래서 지금부터 제안하지. 흑도 팔군! 천마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나? 나는 하고 싶네. 우리가 가진 모든 내공을 이 녀석에게 강제로 전수하고 회귀시켜 버리자고.”흑도팔군의 입이 쩍 벌어졌다. 흑도팔군의 모든 내공이 집약된 고수가 과거에 등장하면 그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천마까지 도모할 가능성도…….

“이놈이 배신할 가능성은?”

“회귀한 이놈은 그때의 나를 찾아올 수밖에 없어. 그렇지 않으면 내공을 제대로 쓸 수 없으니까. 과거의 나는 이게 무슨 일인지 고민하겠지. 나의 능력이라면 당연히 지금의 상황을 꿰뚫어 볼 것이고.”

“그래서?”

“그때 이놈이 천마에게 복수하도록 떠밀어야지. 설마 이놈이 거부하더라도 방법은 많아! 이제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거다! 동참할 거냐?”

다른 기인들이 찜찜한 표정으로 뇌군을 노려보았다.

“크흐흐! 염려는 붙들어 매거라. 무려 천마를 죽이는 일 아니냐!”

어떻게 되든 무량뇌옥에서 평생을 사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천마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을 그들이었다.

“크흐흐, 네놈 다섯이 이 녀석에게 내공을 모두 전수해라. 나는 내 모든 내공으로 무한회귀공을 일으켜 이놈을 과거로 돌려보낼 테니.”

“알았다. 난 하겠다!”

주저하던 한 사람이 찬성하자 눈치를 보던 다른 기인들도 앞 다투어 동참했다.

이 순간만은 흑도팔군은 서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배교의 무한회귀공도 믿어야 했다. 어차피 실패하더라도 그들에게 남은 삶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차라리 지푸라기라도 잡는 게 나았다.

가장 먼저 한 노인이 나섰다. 처참한 청년의 형체를 보니 가능할지 의문이었으나…….

노인이 청년의 머리 위 천령혈에 손바닥을 올렸다.

우우우웅-

무려 이 갑자를 상회하는 엄청난 내공이 밀물처럼 청년에게 밀려들어갔다.

“으아아악!”

죽어가던 청년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으아아악!”등에 칼이 꽂히는 화끈한 통증 속에 주석하는 앞으로 꼬꾸라졌다. 이번에는 살기를 품은 검이 머리 위를 지나가며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어둠 속 곳곳에서 비명이 울렸다. 적의 난입으로 방어선이 무너지고 일대가 난장판이 됐다.

바닥에 쓰러진 채 주석하는 간신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입에서는 비릿한 핏물이 흘러내리고 검에 맞은 등은 점차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허리가 양단되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복장이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숙했다.

“흑검문주를 잡아라!”

“적혈방을 무시한 녀석들을 단죄하자!”

어둠 속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흐…… 흑검문? 적혈방?”

바닥에 쓰러진 채 주석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흑검문(黑劍門)과 적혈방(赤血房)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는 십만대산에서 마교와 싸우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때의 십만대산 절경이 익숙한 산골 마을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이란 시간만은 똑같았지만.

온몸을 엄습하는 고통을 참으면서 주석하는 앞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시뻘건 옷을 입은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에 의하면 붉은 옷의 무리는 적혈방이었다. 마교도가 아니고 적혈방도라니?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아득한 기억을 돌이키면…… 오 년쯤 전에 그의 가문 흑검문은 적혈방과 사소한 시비를 일으켰고 이에 원한을 품은 적혈방에서 야밤에 흑검문을 기습했다.

“이런! 어……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주석하의 눈에 한 장면이 들어왔다. 적혈방에서 초빙한 흑도 고수 사천일살(四川一殺)이 그의 부친에게 검을 날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