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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화 (2/273)

2화 회귀 (2)

본능적으로 주석하는 앞으로 뛰었다.

사천일살은 사천성에서 한 손에 꼽히는 흑도 고수다. 작은 마을에 터를 잡은 흑검문이나 적혈방은 감히 대적하기 힘든 엄청난 고수였다.

그런 무서운 자가 이 싸움에 가담하면서 흑검문은 단숨에 수세로 몰렸다. 사천일살은 문중의 장로를 포함한 중요인물만 처리했고 흑검문은 도저히 상대할 재간이 없었다.

사천일살의 최종 목표는 그의 부친인 흑검문주 주격. 앞을 막는 주석하를 일격에 해치우던 사천일살이 주격을 발견하는 순간 검의 방향을 바꿨다.

“아!”

그 장면이 주석하의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안타깝게도 주석하는 이 장면 다음에 벌어질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사천일살을 잡으려 했으나 이미 부상 중인 그의 시도는 무용지물이었다. 사천일살은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주격을 공격했고 아버지는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 싸움은 흑검문의 멸문으로 종결됐다.

그때 간신히 목숨을 건진 주석하는 우여곡절 끝에 적혈방의 휘하로 들어갔고 그때부터 타인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강호를 전전했다. 그 마지막이 마교 침공 칼받이였다.

오 년 전의 처참했던 그 인생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날린 것마저 똑같았다.

흑검문이 무너지고 비참한 인생의 시발점이 된 바로 이 시각에 주석하는 과거와 똑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죽음을 앞둔 정신없는 순간에는 오직 본능만이 지배하는 법이니까.

그 짧은 순간에도 주석하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게 뭘까? 정말 새롭게 기회가 주어져 회귀한 것일까.

‘으아아! 왜 하필이면 이 순간이냐고!’

하루만 더 이른 순간으로 회귀했어도! 그랬으면 오죽 좋냐고! 아버지를 무사히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천신이 있다면 이번에는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사천일살이 주격을 향해 검을 날리려는 순간 주석하는 녀석의 다리를 붙잡았다.

“안 돼!”

그때도 그랬었다.

퍽!

사천일살의 발길질에 주석하는 바로 나동그라졌다. 순간 주석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다음 장면이 선명했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기억! 사천일살의 검에 찔려 쓰러지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순간,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았을까.

주석하는 막무가내로 사천일살의 발목을 껴안았다. 이 발목을 놓치면 아버지가 죽는다는 생각에 그는 전력을 다해 상대를 붙잡았다.

“어? 이놈이!”

주격에게 검을 날리려던 사천일살은 발목이 걸리는 감각에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발로 찼던 녀석이 여전히 그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미친놈!”

검의 방향을 바꾼 사천일살이 주저 없이 아래로 검을 찔렀다. 주석하의 정수리를 향해 검이 떨어져 내렸다.

주석하의 기억에 이런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억 속의 그는 발길질 한 방에 정신을 잃었으니까.

아직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고 안도할 틈도 없이 무시무시한 검날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으악!”

주석하는 비명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검을 붙잡았다. 당연히 손이 베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천에서 손꼽는 고수의 일격이었으니까.

그런데 잡혔다!

“어? 왜 이러지?”

마치 강철로 손이 만들어진 것처럼 날아오는 검을 손으로 꽉 쥐고 있었다. 주석하는 말이 안 되는 자신의 행동에 경악했다.

더 놀란 것은 사천일살이었다. 수십 년간 강호를 주유하는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이 새끼가!”

당황한 기분을 날리고자 욕설을 퍼부은 사천일살이 검을 회수하려 할 때였다. 놀란 주석하가 검을 잡아당겼다. 동시에 균형을 잃은 사천일살의 신형이 속절없이 아래로 무너졌다.

한 손으로 검을 붙잡은 채 두 사람이 뒤엉켰다. 다음 순간 주석하의 다른 손이 사천일살의 정수리를 움켜쥐었다. 손을 펴서 이마와 뒤통수를 덮은 모양새였다.

난데없이 사천일살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드드득-

서서히 주석하의 손가락에 힘이 가해지며 사천일살의 머리뼈가 함몰되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사천일살은 비명을 지르며 주석하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했으나 그의 머리통은 요지부동이었다. 머리에 점점 더 강한 고통이 밀려왔다.

“으으으-”

이제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검을 쥐었던 사천일살의 손은 반대로 주석하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사천일살은 간신히 눈을 떠 주석하를 노려보았다. 무시무시한 기운이 서린 야수의 눈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순간 혼란을 수습하고 사천일살은 고통 속에서 간신히 정신을 잡았다. 자신은 수십 년간 사천 일대를 종횡하던 마두 아니던가. 구대문파 장문인 급은 아니더라도 장로 정도는 감당할 무공이라고 자부했다. 지금도 이 일대에서 그를 무시할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사천일살은 다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렸다. 이런 녀석에게 무참하게 깨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젊은 녀석이 아무리 수련했다고 해도…….

“크윽!”

다시 사천일살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공으로 상대의 힘에 저항하려 했으나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일 갑자에 해당하는 그의 공력이라면 어려운 일이 절대 아니어야 했다.

‘설사 구파 장문인이더라도 나를 이렇게 압박할 수 없다!’

머리통을 짓이기는 주석하의 손에 저항하고자 사천일살은 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크윽!”

그의 저항은 이어질 수 없었다. 머리를 으깨는 어마어마한 통증이 엄습했다.

방금 등을 찍고 발로 찼던, 힘없는 녀석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머리를 짓누르는 이 힘은 대체 무엇인가.

“끄아악!”

머리가 함몰하는 고통에 사천일살은 비명을 터트렸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고통이었다.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어지고 있었다.

퍼석-

주석하의 손가락이 상대의 이마와 뒤통수를 파고들면서 검붉은 피와 허연 뇌수가 쏟아졌다. 동시에 주석하의 손목을 붙잡던 사천일살의 손이 축 늘어졌다. 사천성을 주름잡던 흑도 고수가 머리가 깨져 사망하다니.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정작 주석하도 정신이 없었다. 그는 피범벅이 된 자신의 손과 끔찍하게 변한 사천일살의 모습에 사색이 됐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하아! 나, 미친 거냐?”

주석하의 입에서 가쁜 숨이 튀어나왔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사천일살의 시신에 망연자실한 시선을 두었다.

그 상태 그대로 주석하는 정신을 잃었다.

**

“등의 상처가 거의 아물었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잖습니까?”

“글쎄요, 이상합니다. 외상은 별 것 아닌데 왜 정신을 못 차릴까요?”

“그게 의원이 할 소립니까?”

“저도 모르는 걸 어떡합니까.”

“이런 돌팔이!”

“돌팔이라니!”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주석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주석하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아버지 주격을 비롯하여 누이동생 주소은, 장로인 신옹에 이름 모를 의원까지.

그의 기억에 따르면 주격과 주소은은 적혈방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었다. 그랬던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아들아!”

아버지의 감격한 목소리에 주석하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머리가 깨질 듯한 아픔이 밀려와 다시 쓰러졌다.

오만상 인상을 찡그리고 있자니 주격이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석하야, 무리하지 말거라. 편히 누워.”

간신히 반듯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이곳은 무려 오 년 전 그가 지내던 흑검문 안방의 침상이었다. 그를 금이야 옥이야 기르던 아버지의 목소리까지. 정말 오 년 전으로 돌아온 것일까.

“어…… 어떻게 되었어요?”

“적혈방이 쫓겨 갔어.”

주소은이 의문을 해결해줬다.

그제야 주석하는 마음이 안정됐다. 뭔가 바뀌었다. 죽었던 아버지와 누이동생이 살아 있었고 망했던 흑검문도 아직 잘 버티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천일살의 죽음이 꿈이 아니었던 걸까.

“이제 몸조리만 잘하면 괜찮아질 겁니다. 등의 상처가 아무는 속도를 보면 정말 튼튼한 몸이라…….”“우리 애가 튼튼하다니요? 몸이 약해서 병을 달고 삽니다.”의원의 진단에 주격이 발끈했다.

실제로 주석하는 무림인답지 않게 약골이었다.

주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의원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함께 있던 장로, 신옹마저 따라 나가자 방안에는 주석하와 주소은만 남았다.

“오빠, 괜찮아?”

“으응.”

“다행이네.”

주소은이 이불을 덮어줬다.

주석하는 깊은숨을 내쉬면서 의문부터 해소했다. 사천일살이 쓰러진 후 전세가 급변하여 반대로 적혈방을 밀어붙였다고 했다. 비록 다소의 피해가 있었으나 기습을 받은 점을 고려하면 대단히 선방했다고. 반대로 적혈방은 큰 타격을 입어 사실상 일어서기 어려울 것이라나.

“그렇구나.”

주석하는 눈을 감고 마음을 편하게 했다. 머리를 아프게 하던 고통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동시에 지난 기억이 뚜렷하게 살아났다.

“나…… 지금 몇 살이야?”

“응? 오빠 열일곱, 내가 열다섯이잖아.”

“진짜 오 년 전이구나.”

“무슨 소리야?”

주석하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은아, 나, 잠 좀 잘래.”

“응, 오빠. 안색이 아직 창백해. 몸조리 잘해야 해.”

염려하는 표정으로 그를 살피던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주석하는 천천히 기억을 되살렸다. 아버지가 죽고 흑검문이 무너진 후부터 오 년간 일어났던 일들이 빠르게 눈앞을 명멸했다. 그 마지막은 마교가 자리한 십만대산이었고 그곳에 침투했다가 잡힌 후 절벽 아래로 던져졌다. 딱 거기까지였는데…….

절벽 아래에서 무엇인가를 봤던가? 여러 명의 노인을 보았었나……. 뇌군이란 이름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개꿈이었지.

주석하는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냈다. 지금 꿈을 꾸는지 아니면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그는 살아 있고 그의 아버지도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알던 과거와는 달라졌다.

“하아,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죽음이 임박한 아버지를 목격했을 때 그는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천신에게 빌었었다. 흑검문이 문을 닫았던 날 적혈방도 문 닫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십만대산 절벽에서 떨어지던 그 순간에도 흑검문을 일으킬 기회를 한 번만 달라고 마음속으로 울었었다.

천신이 소원을 들어준 건 아니겠지. 아, 머리 아프니 생각을 말자. 이왕 회귀한 거라면, 이번 삶에서는 지난 기억과 반대로 살아보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때는 남들의 바둑돌이 되어 강호를 전전했으니 이번에는 반대로 나 자신이 직접 바둑돌을 놓는 주인이 되면 충분하지 않은가.

주석하는 자신이 엉겁결에 죽였던 사천일살을 떠올렸다.

“설마?”

그는 조용히 몸 내부를 관조했다. 천천히 공력을 끌어올려 몸 내부를 살폈다. 평소처럼 미약한 기운이 맥을 따라 일주천했다.

“허억!”

단전이 이상했다. 거대한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전설로만 들어왔던 만년설삼이나 천년하수오, 공청석유를 섭취했거나 소림사 대환단을 먹은 적도 없는데? 어마어마한 기운이 단전에 똬리를 틀고 있다니!

놀란 그는 조심스럽게 그 기운을 건드려보았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기운은 하나가 아닌 듯했다. 무려 형형색색 무지개처럼 다섯 가지나 됐다.

“허억! 이게 무슨 일이야…….”

그제야 사천일살을 죽였던 그 어렴풋한 기억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바로 지금 단전에서 꿈틀대는 이 기운이 외부로 드러났던 덕분이었다.

어쨌든 내공이란 많을수록 좋은 일 아닌가. 설사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큭큭, 네놈들 이제 싹 다 죽었어!”

흥분한 마음에 지난 오 년간 그를 괴롭혔던 놈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주소은이 사색이 되어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큰일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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