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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3화 (3/273)

3화 회귀 (3)

주석하는 누이동생과 함께 정문으로 나갔다.

몸이 찌뿌둥했으나 움직일만했고 칼을 맞았던 등도 다행히 크게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제 실력을 발휘하긴 어려울지라도 최소한 움직일 때 부자연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가 지녔던 무공 수준은…… 입에 올리기 창피할 정도였다. 영약을 먹었음에도 내공은 십 년이나 될지 의문이었고 검법을 비롯한 무공 수준은 강호 하류 무사와 큰 차이가 없었다. 작은 마을의 이름 없는 흑도 문파 수준이란 게 딱 그 정도였다. 문파의 독문 무공은 당연히 없고 강호에 떠돌아다니는 적당한 무공 한두 개로 거들먹거리는 수준이다.

그나마 흑도 특유의 끈끈한 의리와 정이 있으니 다행이랄까.

전쟁이 휩쓸고 간 흔적은 이제 어느 정도 지워진 상황이었다. 여전히 바닥에는 붉은 흔적이 남아 있었으나 부서진 건물과 정원은 일부 복구됐다.

“괜찮네…….”

주석하는 아득한 먼 기억을 떠올리며 포근함을 맛보았다. 무려 오 년 만에 접하는 집이자 고향이었다.

“응? 뭐가?”

옆에서 걸음을 빨리하던 주소은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아냐.”

주석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죽음을 경험했던 그는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강호를 전전하던 전생에 비하면 곁에 가족이 함께하는 이 순간은 얼마나 행복한가.

정문 앞에 쭉 늘어선 사람들을 보는 순간 주석하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부친 주격을 중심으로 옆으로 쭉 늘어선 흑검문 사람들이 보였다. 문제는 이들과 대치한,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는 자들이다.

붉은 적삼을 걸친 십여 명의 장한은 적혈방에서 온 자들이 확실했다. 그 가운데 유독 뚱뚱한 체구에 염소수염을 달고 얼굴에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자는 바로 적혈방주 임숙이었다. 그 옆에 있는 빼빼 마른 학사풍의 인물은 적혈방의 두뇌라 불리는 적혈자이고.

그날 적혈방이 꽤 타격을 입었다고 하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석하야, 몸도 성치 않은데 여긴 왜 나왔느냐? 들어가거라.”

주격이 눈짓으로 그를 말렸다. 물론 주석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문파의 위기를 모른 체할 위인이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이미 다 나았습니다.”

“그래도 네가 고생하면 안 된다!”

지극한 아들 사랑은 과거 그때와 똑같았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주격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는 강요하지 않고 다시 적혈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뭔 소리요? 피해보상이라니? 엄연히 쳐들어온 쪽이 보상해야 하는 것 아니오?”

주격의 호통에 임숙이 가소롭다는 듯 껄껄 웃었다.

“이보게, 흑검문주, 아직 정신 못 차렸구먼. 그럼 맞고 보상할 거요?”

“안하무인이군.”

“힘이 있으면 당연한 것 아닌가? 흑도 세계에선 힘이 곧 법이지.”

임숙의 기세등등한 태도는 그날 패배하고 쫓겨난 자라고 볼 수 없었다.

흑검문과 적혈방은 사천성의 작은 마을 덕양에서 크고 작은 이권을 다투는 사이였다. 양쪽 모두 문파 제자 수 삼십 명가량의 소규모 문파다. 그러다 보니 서로 부딪힐 일이 많았고 항상 상대를 없앨 기회를 엿봤다. 이번에 일어난 적혈방의 기습도 이런 맥락이었다.

적을 살피던 주석하의 눈에 적혈방주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들어왔다. 적삼을 걸친 다른 이들과 달리 회색 무복을 입었기에 유달리 눈에 띄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주석하는 그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사천삼살. 그날 그에게 죽임을 당했던 사천일살의 두 동생이었다. 이들은 의형제로 각각 일살, 이살, 삼살로 불렸다. 각자가 모두 사천성에서는 손꼽히는 강자여서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제야 주석하는 오늘 이 자리의 목적을 깨달았다. 맏형인 사천일살이 죽자 그 보복을 하러 사천이살과 삼살이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이살과 삼살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대치하던 임숙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우리 형님을 죽인 게 누구냐?”

“형님이 누구요?”

“사천일살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이 이살과 삼살이요?”

주격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천 일대에서 위명을 떨치는 사천삼살의 흉명을 익히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날 어떻게 된 일인지 주격도 제대로 몰랐다. 자신을 향해 덤벼들던 사천일살이 아들 주석하에게 발목이 잡혔다. 그리고 쓰러져서 둘이 바닥을 뒹굴었다.

당시 그는 죽는 줄 알고 눈을 감은 상태였다. 눈을 떠보니 사천일살이 죽어 있고 주석하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주석하의 무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주석하가 일살을 죽였다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도 모르오.”

주격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실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

“그때는 어둠 속에서 피아 구분도 어려운 상태의 난전이었소. 끝나고 보니 죽어 있었을 뿐…….”

“사천 일대에서 손꼽히던 고수가 난전 중에 죽었다? 개소리 치워라!”

사천이살이 분노를 토했다.

최강자가 난전 중에 죽었다고?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이살과 삼살은 흑검문에서 혈채를 받아내겠다고 우겼다. 그냥 물러나기엔 맏형의 목숨이 아까운 데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주격이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말했다.

“그날 습격한 쪽은 그쪽 아니오? 우리야말로 그 책임을 물어야겠소.”

“흥! 하찮은 놈들. 책임을 회피하면 모두 다 죽을 뿐이다.”

사천이살이 포악함을 드러냈다. 마른 체구에 검법이 장기인 이살이 신호를 보내자 적수공권으로 무림을 누빈 삼살이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듯 앞세우며 앞으로 나왔다. 주먹을 거머쥐고 거들먹거리는 자세가 흡사 뒷골목 건달과 비슷했다.

“이깟 놈들에게 뭔 설교요? 그냥 쓸어버립시다.”

쿵- 쿵-

버릇처럼 진각을 밟으며 앞으로 나서는 삼살의 위세에 흑검문 사람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바닥에 선명하게 찍히는 족인이 고강한 무공을 대변하고 있었다.

“흐흐, 오늘 흑검문에 생존자가 있다면 내가 성을 간다!”

적혈방의 책사인 적혈자가 승리를 확신한 듯 호언장담했다.

삼살이 포효를 터트리며 음산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맏형의 목숨값을 받도록 하겠다.”

삼살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흑검문 진영으로 안하무인으로 들어온 삼살이 앞에 보이는 제자 한 명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놀란 동료가 삼살을 저지하려 했으나…….

뻑-

삼살이 휘두른 일 권에 충격을 받고 우수수 포개져서 나뒹굴었다. 흥분한 흑검문 제자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검이 삼살을 향하는 순간 삼살이 멱살을 쥔 흑검문 제자를 밀어 넣었다. 그 순간 흑검문도의 검이 동료를 베는 상잔이 발생했다.

서걱-

놀란 흑검문 제자들이 뒤로 물러났다. 삼살은 그들이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고수였다. 아니 이 일대에서는 평생 본 적도 없는 고수였다.

“크하하! 오늘 제대로 놀아보자!”

쿵-

삼살이 재차 진각을 밟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전긍긍하는 상황에서 주석하가 앞으로 나섰다. 흑검문 제자가 상해를 입었으니 마냥 뒤로 물러나 있을 생각은 없었다.

과거 오 년간의 세월이 눈앞을 지나갔다. 이런 순간에 항상 두려움에 휘말렸고 그 결과 타인의 바둑돌이 됐다.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어쩌면 이런 순간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능력도 없이 뛰어드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자 개죽음 아닌가.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미 한번 죽었던 목숨, 이대로 흘러갔을 때 벌어질 결과를 지금은 알기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삶을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

앞으로 한 발 나서는 주석하의 행동에 모두가 기겁했다.

삼살은 곧바로 손을 뻗어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멱살을 잡았다.

“네놈은 누구냐?”

“흑검문 소문주요.”

그의 대답이 의외였을까. 삼살이 눈알을 부라리며 위협했다.

“흐흐, 용기는 가상하다만, 죽고 싶으냐?”

삼살이 멱살을 쥔 손에 힘을 가하자 주석하는 목이 졸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역시 곰처럼 생겼더라니! 과연 대단한 힘이었다.

“서…… 석하야!”

“오라버니!”

뒤에서 아버지와 누이동생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를 보물단지처럼 아끼는 아버지의 염려는 일단 접어두고.

‘헉! 미치겠네. 내공이 왜 안 일어나냐…….’

이 순간 주석하는 단전에서 잠든 내력을 일깨울 방법을 고민했다. 그날 위험했던 순간에 그를 도운 괴력은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지금은 어떻게 해도 엄청난 그 내력을 운용할 수 없었다.

“흐흐, 형님 앞에 제물로 보내주마!”

삼살이 주석하의 목을 움켜쥐고 하늘 높이 쳐들었다. 주석하는 삼살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꼴이 됐다.

목을 파고드는 삼살의 손가락에 힘이 가해졌다. 주석하는 본능적으로 몸부림을 치며 빠져나가려고 목을 거머쥔 상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적수공권의 대가답게 감히 그가 상대할 완력이 아니었다. 온 힘을 다했으나 상대의 손가락마저 까닥할 수 없었다. 숨이 막히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으으, 이게 아닌데…….’

다급한 주석하와 달리 삼살은 여유롭게 뒤쪽 적혈방주를 바라봤다. 소문주라는 이 자식을 어떻게 처리할지 묻는 것이다. 적혈방주 임숙은 손으로 자신의 목을 쓱 긋는 시늉을 했다. 죽이라는 뜻이다.

오늘 흑검문을 완전히 박살 낼 생각으로 온 삼살이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목뼈를 부러트릴 생각으로 손에 힘을 줬다.

우드득-

부러지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주격을 비롯한 흑검문 사람들은 눈을 질끔 감았다. 그날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 소문주 주석하가 최후를 맞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라버니!”

특히 주소은은 뾰족한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크으으흑!”비명이 터져 나왔다. 당연히 사람들은 주석하의 음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서히 무너지는 자는 주석하가 아닌 삼살이었다.

어느새 주석하는 삼살을 노려보며 우뚝 서 있고 삼살이 피투성이가 된 손을 잡고 무릎을 굽히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가 어리둥절한 순간 삼살이 기합을 넣으며 주석하를 향해 주먹을 질렀다.

턱!

삼살의 강력한 주먹이 주석하의 손바닥과 만나면서 정지했다. 주석하는 삼살의 주먹을 감싸 쥐고 희미한 미소를 드리웠다.

“제대로 놀아봐야지?”

우드득-

기분 나쁜 소음이 울림과 동시에 삼살의 처절한 비명이 울렸다.

“으아아악!”

주먹을 움켜쥔 주석하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주석하가 손을 놓자 참상이 드러났다. 삼살의 한 손은 찢어졌고 다른 한 손은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분명히 그 반대여야 했을 상황에 사람들은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으아아!”분노한 삼살이 이성을 잃고 온몸으로 돌진했다. 주먹이 망가졌으니 외공으로 단련된 몸을 쓸 수밖에.

주석하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속을 흐르는 거대한 기운을 체감하고 있었다. 이 내력이 어떻게 발휘되는지는 그도 몰랐다. 다만 그가 위험한 순간이 되자 단전에서 내력이 용솟음쳐 혈맥을 질주했다. 그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가 제어할 수 없는 힘이면 어떤가. 지금 그의 목숨을 구하고, 흑검문을 지탱해주면 충분하다.

삼살이 그에게 돌진하는 순간 주석하는 장난처럼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콰앙-

강력한 장력이 일어나며 삼살의 가슴팍이 검에 난도질 된 것처럼 갈기갈기 찢어졌다. 삼살은 피떡이 되어 무려 오 장이나 떠밀린 채 무참하게 쓰러졌다. 적수공권의 대가이자 외공 고수였던 삼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이었다.

“너도 와라!”

주석하가 이살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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