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4화 (4/273)

4화 회귀 (4)

이살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맏형인 일살이 죽은 데다 막내인 삼살이 눈앞에서 죽음을 맞았다. 수십 년간 강호를 누빌 동안 사천삼살로 이름을 날렸던 그들에게 덤빌 만큼 간이 컸던 자는 없었다. 사실상 그들이 법이었고 왕이었다.

흑검문과 적혈방의 다툼에 끼어든 이유도 단순했다. 최근에 무료했던 데다 적혈방에서 제시한 반대급부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소문파인 흑검문을 지워버리는 것쯤은 그들에게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이 보잘것없는 흑검문에 어마어마한 고수가 있었다니!

“감히 네놈이!”

이살은 이성을 잃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무모하게 덤비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 그와 함께 악명을 높였던 검을 앞세우고 이살은 주석하를 향해 돌진했다.

주석하도 저돌적인 이살의 공격에 당황했다. 비록 사천일살의 검격을 맨손으로 잡았던 기억이 있으나 무시무시한 검을 손으로 다시 잡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가 멈칫하는 사이 누군가가 그에게 검을 던졌다. 주석하는 재빨리 검을 받아 날아오는 검을 막았다.

까캉-

이살은 강력한 저항에 밀려 공격이 흐트러지자 내력을 끌어올렸다. 이곳으로 올 때 이미 작정했던 일이지만 눈앞의 상대를 살려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상대가 예상과 다르게 강력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는 더욱 힘을 끌어올려 공격을 퍼부었다. 이살이 죽은 마당에 그의 검이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었다.

무시무시한 검기가 주석하를 압박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처럼 엄청난 검격을 처음 목격했다.

주석하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 이살이 펼치는 공격은 평소의 그라면 감히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주석하는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흑검문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검법이 문파의 주요 무공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검법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흑검문 제자라면 누구나 익혀야 하는 검법이 있기 마련이다.

흑검육식(黑劍六式).

강호에서 가장 흔한 기초 검법인 삼재검법을 발전시킨 기초 검공이었다. 흑검문 제자라면 밥을 먹은 후 항상 휘둘러왔기에 위기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발현됐다.

주석하가 휘두른 검 끝에서 흑검일식이 펼쳐졌다. 검으로 일가를 이룬 이살이 휘두른 초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단순한 검격이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며 바람을 가르는 이살의 검과 단순하면서도 느릿느릿한 주석하의 검이 서로 부딪쳤다.

서걱-

뚝!

두 검이 만나는 순간 이살의 검이 반 토막 났다.

“헉!”

이살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눈을 부릅떴다. 상대의 검이 예리한 명검이라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상대가 든 검은 저잣거리에서 흔히 파는 싸구려 검이었다. 그에 반해 자신의 검은 명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명한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검이었다.

“이럴 수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부러진 검을 멍하니 쳐다보던 이살의 목에 날카로운 예기가 감지됐다. 허공을 선회한 주석하의 검이 이살을 겨냥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반대로 죽음 위기에 몰린 이살이 벌벌 떨었다.

“사…… 살려줘…….”

주석하의 안면이 굳어졌다. 과거였다면 그는 함부로 살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십만대산에서 목숨을 잃을 때까지 오 년간 강호를 전전하면서 그는 수많은 살인을 목격했고 직접 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설픈 자비는 도리어 명을 재촉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배웠다.

그렇기에…….

주석하는 망설이지 않고 검을 찔렀다.

푹-

그의 검이 이살의 목을 꿰뚫었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지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살이 눈을 부릅뜬 채 쓰러졌다.

주석하는 피가 묻은 검을 다시 뽑았다.

“힘이 곧 법이라고 했던 자가 누구냐!”

주석하의 음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순식간에 사천삼살 둘이 고혼이 되는 장면을 목격한 적혈방 사람들은 입만 벌린 채 꼼짝할 수 없었다. 적혈방주 임숙은 상상치 못한 고수의 출현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도망쳐야 할 상황이라고 끊임없는 경고가 울리고 있는데 정작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석하를 염려하던 흑검문주 주격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흑검육식이 저렇게 위력적인 검법이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아들 주석하가 언제 저렇게 고수가 되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주격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주석하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그는 적혈방주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네놈이냐?”

감히 사천삼살을 죽여 버린 고수에게 대꾸할 용기는 애초에 없었다. 임숙은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 소문주…… 하해 같은 은혜를…….”

“너라면 은혜를 베풀었을까?”

“예?”

무릎을 꿇은 임숙을 보는 순간 주석하는 결심을 굳혔다. 예전에는 흑검문이 멸문한 후 문도들이 모두 적혈방에 흡수됐다. 적혈방은 그때부터 인근 흑도 문파를 계속 흡수해나갔고 훗날에는 정파와도 다툼을 벌였다.

그러다가 결국은 최후를 맞았다. 사천성 정파 연합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 이후에 주석하는 용병이자 낭인이 되어 휘둘리다가 마교와의 전쟁에 투입됐었다.

적혈방주를 보니 앞으로 흑검문이 나가야 할 방향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흑도 문파와 또 정파와 생존 투쟁을 벌여나갈 환경이라면 주도적으로 나서도 나쁘지 않겠다고.

이번에는 적혈방에 흡수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적혈방을 흡수할 것이다.

주석하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임숙을 내려다보았다.

“석하야…….”

심상찮은 기분을 느낀 주격이 주석하를 만류하려 했다.

주석하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의도를 알았을까. 임숙이 겁에 질려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서걱-

주석하의 검이 임숙의 목을 벴다.

옆에 있던 적혈방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다. 그들이 데려온 무적고수 사천삼살이 모두 죽고 방주마저 목이 잘렸으니. 주석하의 잔인함에 혀를 내둘렀다. 방주가 저항도 못 하고 죽었으니 그들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굳이 책임을 물을 필요도 없겠지. 방주 말대로라면 힘이 곧 법이니까.”

누구나 들으라는 듯 비웃던 주석하는 음산한 눈빛으로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사…… 살려주십시오!”

겁에 질린 적혈방도가 한꺼번에 무릎을 꿇었다.

주석하도 살인마가 아니다. 굳이 적이라고 모두의 목숨을 뺏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이곳에 남은 자 가운데 최고 지위인 책사 적혈자에게 다가갔다.

“자네는 할 말 없나?”

적혈자가 황급히 바닥에 머리를 숙였다.

“소……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흠, 그래? 무슨 죄냐?”

적혈방이 흑검문을 공격한 모든 전략이 적혈자의 머리에서 나왔다. 사천삼살을 끌어들여 그날 기습 작전을 폈고 오늘 다시 방문한 것까지.

적혈자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스스로 죄상을 고했다. 확실히 이자는 머리가 똑똑한 자였다. 쉽게 빠져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주석하는 적혈자의 미래를 알았다. 그가 아는 과거에 따르면 적혈자는 적혈방의 두뇌로 활약하면서 세력을 확대했다. 볼품없던 소규모 방파가 사천성을 대표하는 흑도 문파가 될 때까지.

나중에 적혈방이 망한 후에도 적혈자만은 승승장구했다. 흑도 연합에 들어가 대표적인 책사로 군림했다. 이후 흑도 연맹은 끊임없이 무림맹과 싸웠고 훗날 마교를 공격하는 작전까지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이자는 위험인물이긴 하지만 능력이 있는 자였다.

“그럼 죽을 준비가 되었겠구나?”

“소…… 소문주! 소인은 너무 억울합니다.”

“뭐가?”

“소인의 머릿속에는 천하를 도모할 계책이 있사온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주석하도 예상치 못했다. 원래 생각은 이자까지 죽이고 나머지 적혈방 사람들을 흡수하는 것이었는데…….

생각해보면 흑검문에는 이에 견줄 책사가 전혀 없었다. 그 약점이 이번에 적혈방에 빌미를 주어 자칫 멸문을 맞을 뻔했다. 적혈자가 흑검문에 들어온다면 약점을 훌륭하게 보완해준다.

적혈자는 무공이 매우 약해서 술수를 부리지 못하도록 잘 감시한다면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 임무는 장로인 신옹에게 맡기면 된다. 대충 신옹과 나이도 비슷하니.

주석하는 검을 거두었다.

“흑검문에 투신하겠느냐?”

어차피 적혈자에게는 적혈방이든 흑검문이든 전혀 차이가 없었다.

적혈자는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다…… 당연합니다. 이 목숨 흑검문에 바치겠습니다.”

“좋다, 앞으로 네 별호는 적혈자가 아니라 흑검자다. 알겠나?”

“흐…… 흑검자요?”

“조금 전에 성을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죽고 싶나?”

“아닙니다. 소인 앞으로 흑검자로 살겠습니다.”

흑검문의 빈자리가 메워졌다. 동시에 주석하의 머릿속에서 흑검문의 앞날이 그려졌다. 적어도 타 문파에 갈굼을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흑검자를 굴복시킨 주석하는 주격에게 처리를 맡겼다. 남은 적혈방 방도들은 흡수하든 죽이든 주격이 알아서 할 것이다.

주석하가 안으로 쓱 들어가 버리자 모두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장로 신옹이 주격에게 물었다.

주격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턱이 없었다. 분명한 것은 아들인 주석하가 놀라운 무공을 선보이며 사천삼살과 적혈방주를 죽였다는 것뿐이다.

“나도 모르겠네.”

“이제 우리 흑검문에도 볕이 들려나 봅니다.”

신옹이 흥분해서 외쳤다.

주격은 걱정이 앞섰다. 이해할 수 없는 힘은 강호에서는 자칫 스스로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될지도 모른다.

“이상하지 않나?”

“그래도 소문주님 아닙니까?”

“하긴…… 그래서 나도 이상한데도 믿어버린단 말이지.”

주격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흑검문 제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흑검육식이 저렇게 위력 있는 검법이었던가! 오늘부터 열심히 수련해야겠어.”

**

“으음.”

주격이 고개를 저으며 신음을 토해냈다.

주석하는 내밀었던 팔을 거두고 조용히 주격을 지켜봤다. 주격은 이미 몇 번이나 주석하의 맥을 짚고 몸 내부를 살펴본 바였다. 적혈방과의 전투에서 놀라운 무력을 선보인 주석하에게 원인을 캐물었다.

“소자도 잘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였느냐?”

“글쎄요…….”

주격이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쳤으나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무공이 일천한 주격이 알아낸 것이라고는 주석하의 내공이 갑자기 증가했다는 것뿐이다. 그 내공이 얼마인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영약을 많지 먹지 않았습니까? 그게 이제 효과를 본 게 아닐까요?”

죽음 직전에 오 년 전으로 회귀했다는, 말도 안 되는 대답을 할 수 없었던 주석하는 적당히 둘러댔다. 사실 그도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몸에 담긴 내공을 제대로 활용할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긴 하다만 하필이면 지금?”

주격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무림 명가의 자손치고 어릴 때부터 영약을 입에 달지 않은 자는 없다. 무림 명가는 아니지만 주석하가 지금까지 먹은 영약도 엄청 많긴 했다. 아들 사랑에 비례해서 쏟아부었으니. 하지만 아무래도 이상하긴 한데…….

“어쨌든 좋은 일 아닙니까? 믿으세요.”

주석하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었던 주격은 의심을 거뒀다.

“내력을 제대로 운기할 수 있느냐?”

주석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흑검문에서요? 내공심법이 있기나 한가요?

사실 명문이냐 아니냐를 판별하는 기준은 훌륭한 내공심법을 소유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당연히 흑검문에는 그런 내공심법이 없었다.

“으음, 이상하구나.”

“모든 일이 다 인연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의외로 담담한 주석하의 태도에 주격도 걱정을 미루고 애정을 쏟았다.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애정 가득한 손길에 주석하는 흡사 강아지가 된 기분이다.

“그래, 아프면 바로 말하거라. 내가 영약을…… 한 무더기 주마.”

“으헉, 됐고요. 적혈방 흡수는 잘 되어갑니까?”

“아직 모르겠다. 그놈들이 이리저리 벌여놓은 사업이 워낙 많아서…….”

방파를 통합하면 그동안 챙기던 이권도 딸려오게 마련이다. 흑도 방파에서는 주로 주루나 객잔, 도박장 등의 이권에 개입하고 있었다.

“제가 한번 둘러보겠습니다.”

그래도 소문주이니 문파 일을 도와야 하는 법.

과거와 달리 이제는 어깨에 힘주고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