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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5화 (5/273)

5화 도망자 (1)

덕양(德陽).

사천성의 성도에서 북동쪽으로 대략 백 리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성도에서 산서나 하남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나가는 길목이었기에 외지인들이 많았고 시전을 비롯한 상업이 활기를 띠었다.

이런 환경은 정도 문파와 흑도 문파의 난립을 불러왔다. 흑검문이나 적혈방도 그런 곳이었다.

“북적북적 하구나!”

오후가 되자 느긋한 마음으로 주석하는 덕양 중심가를 둘러봤다.

애초에 이곳 중심가는 흑검문과 인연이 없었다. 중심가에 진출하기에는 흑검문의 세력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적혈방을 흡수하면서 중심가의 유명한 주루가 흑검문의 손으로 넘어왔다.

주석하는 길 한중간에 서서 주루를 살펴보고 있었다.

백화루(百花樓). 주루의 간판을 본 주석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지금 흑검문이 관리하는 객잔 가운데 최대규모였다.

“백 명의 꽃다운 여인이라…… 이름도 좋고!”

일대에서 가장 큰 주루를 보고 있자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큰 주루를 관리하게 되었다니! 앞으로 이곳에서 공짜로 술과 요리를 얻어먹을 생각을 하면…… 마치 적혈방이 은인인 것처럼 느껴졌다.

“흘흘, 지금까지는 구멍가게였지.”

주석하의 시선이 중심가에서 한참 떨어진 먼 곳을 향했다. 그곳에 남루한 객잔 하나가 보였다. 지금까지 흑검문이 뒤를 봐주던, 실제로는 보호비를 뜯어먹던 가게였다. 외양으로만 보더라도 그 차이가 몇 배는 되어 보였다.

그는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어깨를 넓게 폈다.

“나쁘지 않아.”

이런 맛 때문에 문파는 세력이 커야 한다. 과거 대비 한참 커진 위세에 만족한 주석하는 보무도 당당하게 백화루 정문으로 걸어갔다. 이제 목을 빳빳하게 세우고 살날만 남았다.

아니다. 뒤를 봐주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백화루를 소유해서 놀고먹어도 돈이 굴러들어온다면? 그야말로 최상의 삶이 아닌가.

그렇다! 조물주 위에 백화루 소유주다!

‘좋아! 이런 백화루를 열 채만 손에 쥐자.’

인생의 목표를 대폭 올리는 순간 주변 군중들이 속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혈방 이야기 들었어?”

“흑검문에 엄청난 고수가 나타났다며?”

“사천삼살이 떡이 됐다네.”

“흘흘, 검을 휘두르면 하늘에서 벼락이 친다 하더라고.”

“한 주먹에 산도 무너트렸다지…….”

주석하의 목이 더욱 꼿꼿해졌다. 그 장본인이 납시었으니 주루 주인은 아니더라도 점소이 정도는 떼를 지어 나와서 줄을 서고 인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굳이 갑질할 생각은 아니라지만…….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했다. 점소이가 떼를 지어 나오기는커녕 문 앞이 횅했다.

“이것들이…….”

이건 아직 흑검문으로 제대로 이권이 넘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니 일단 군기부터 잡고…….

그렇게 생각하고 걸음을 척 옮기는 순간 주루 이 층 창문이 와장창 깨지면서 한 놈이 허공에서 날아왔다.

“응?”

날아온 녀석은 주석하의 앞에 떨어져 바닥에 누운 채 고통으로 신음했다. 대충 보니 인근 흑도 문파에서 힘주던 녀석처럼 보이는데…….

무슨 일인지 몰라 주석하는 이 층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순간 또다시 한 놈이 창을 깨고 밖으로 던져졌다.

무슨 사고가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이곳 사고 수습은 이젠 흑검문의 책임이라는 생각에…….

“젠장! 맡자마자 골치 아프군.”

주석하는 다급하게 백화루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주루는 쏟아져 나오는 손님으로 혼란스러웠다. 주루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지자 도망치고 있었다.

허겁지겁 이 층으로 올라가자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녀석들 몇몇이 보였다. 이곳 덕양에서 힘 좀 쓴다는 흑도 문파의 자제들이다. 대부분 흑검문과 비슷한 규모를 가진 문파다.

흑도 문파는 세력 순위로 그 위세가 정해진다. 지금까지 주석하는 저들 무리에서 가장 말단이었다. 어울리기 싫어도 문파의 앞날을 위해 가끔 흑도 소공자회 모임에 참여했고 그때마다 저들에게 무시당했다.

오 년 전 흑검문이 무너졌을 때 저들은 그를 조롱하며 이 모임에서 쫓아냈다. 새삼 그때의 수모가 떠올랐다.

그를 발견한 한 녀석이 재빨리 그에게 손짓했다.

“우리 귀염둥이! 왔냐? 여기 네 녀석이 관리한다며? 관리 잘 해야지?”

흑검문이 적혈방을 흡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대우는 예전과 차이가 없었다. 워낙 그가 이 모임에서 빌빌대는 모습을 보였었으니.

주석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어쨌든 이곳은 새롭게 손에 넣은 영업장이니 그가 해결해야 했다.

주위에 간간이 보이는 흑검문 문도를 보니 어떻게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하긴 적혈방을 흡수했다고 흑검문 제자들의 실력이 하루아침에 나아질 일은 없으니까.

그의 어깨에 한 녀석이 손을 척 올리며 기고만장한 태도로 말했다. 이놈은 인근 살검회(殺劍會)의 소회주인 도건이란 녀석이다. 평소 그를 괴롭히는 데 앞장섰던 나쁜 놈이다.

이놈이 갑자기 살갑게 구는 이유는 아마도 이곳 관리를 흑검문이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외상술을 먹을 생각뿐일 테니.

“이것들이 여기가 안방인 줄 알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손을 좀 봐주려 했는데 말이지…….”

“흑도 소공자회의 명예가 있지 않냐?”

옆에서 다른 녀석이 설명을 거들었다.

대충 보니 다른 놈을 손보려다 이렇게 난장판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주석하가 이곳을 관리하는 책임자니 얼른 사태를 수습하라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사실 주석하는 도건을 비롯한 이놈들의 편의를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흑도 소공자회란 모임도 지금까지 그를 무시하기만 했었지 도움을 준 적이 있었던가. 이젠 이런 녀석들에게 휘둘리며 살지 말아야 한다.

그래도 이곳 덕양에서 끗발 날리는 녀석들에게 누가 감히 대들었을까.

궁금한 마음에 앞을 보니 백의와 청의를 입은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네 사람인 그들은 탁자에 둘러앉아 요기와 술을 한잔하고 있었다. 그 태도가 대단히 여유로웠다.

딱 보는 순간 느낌이 팍 왔다. 고수다!

괜히 싸움에 휘말릴 이유가 있을까.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그들에게 다가가서 포권을 취했다.

“백화루를 방문해주셔서 환영합니다.”

이들은 남자 셋, 여자 하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안면이 훤한 것으로 보아 명문세가의 자제가 확실했다. 그것도 꽤 무공이 강한 자들이다. 다만 지금 그들의 안색에 피로가 엿보이는 것으로 보아 뭔가 곤란에 처한 것으로 짐작됐다.

“저는 이곳 백화루를 관리하는 흑검문의 소문주 주석하입니다만 어떻게 되시는지요?”

“저 자식들 대체 뭔가요? 이래도 되는 거예요?”

뾰족한 여인의 질책이 먼저 올라왔다.

백의 경장을 입은 여인은 스물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꽤 괜찮은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주석하는 공손하게 달랬다.

그러자 뒤에 있던 도건이 바로 시비를 걸었다.

“야, 이 자식아! 저것들 혼내라고 했더니 뭔 짓이냐?”

주석하는 미소를 지으며 도건에게 손짓하고는 다시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강호에서는 목숨이 위험한 법이다. 지난 오 년간 강호를 구르면서 배운 것이 눈칫밥이다.

지금 눈앞의 이 네 사람은 절대 무공이 약해서 소공자회 양아치들을 내버려 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었고 쫓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즉 이들이 두려워하는 다른 뭔가가 숨어 있었다.

“저들이 무례를 저질렀다면 이는 백화루의 실책입니다. 제가 그 보상으로 술을 한 병 올리겠습니다.”

주석하는 점소이를 불러 고급 백주 한 병을 가져오라 부탁했다.

과연 공짜를 싫어할 사람은 없다. 네 사람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발끈했던 여인이 투덜대며 물었다.

“당신이…… 이름이 뭐라고요?”

“흑검문의 주석하입니다.”

“흑검문이라…….”

여인과 함께 있던 이십 대 초반의 남자가 인사했다.

“소생은 북성하가 소가주인 하홍운이오.”

주석하도 들어본 이름이었다. 북성하가(北城河家)는 이곳 덕양에서 이름을 날리는 정파였다. 흑검문이나 적혈방, 살검회와 대립하는 위치의 문파다.

“하 공자이셨군요.”

주석하는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곤륜파의 허윤이고 이쪽은 사매인 설약이오.”

강호 곳곳에 자리 잡은 구대문파라지만 실제로 구대문파 인물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구대문파는 일반 무림인에게는 천외천의 존재였다. 구대문파의 한 축인 곤륜파(崑崙派) 제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실로 놀라웠다.

주석하의 시선은 마지막 남은 한 청년에게 닿았다. 그 청년은 대단히 피로해 보였고 옷도 남루했다. 일견해서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낭인처럼 보였다.

그 청년이 소개하려 했을 때 하홍운이 만류했다.

“주 공자, 우리는 이곳에서 분란을 일으킬 생각이 전혀 없소. 간단한 요기를 하고 쉬고 있었을 뿐이오. 그런데 저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어왔소.”

하홍운의 손이 주석하의 뒤쪽 도건 무리를 가리켰다.

“우리가 언제 시비를 걸었느냐?”

곤륜이라는 말에 움찔했던 도건이 용기를 내서 반박했다.

“그게 시비가 아니고 무엇이오?”

“우리는 단지 통성명을 하자고 했을 뿐이다.”

양쪽에서 정신없이 삿대질하는 내용을 종합해보니 도건이 예쁘장하게 생긴 설약을 찝쩍대다가 싸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주석하의 의심이 짙어졌다. 북성하가야 별 볼 일 없다지만 곤륜파 제자가 둘이나 섞여 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사람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이는 실력자인데 무례한 소공자회를 철저하게 응징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들이 분란을 꺼리고 있다는 확신이 확 들었다. 흑도 소공자회를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에서 주석하는 활로를 발견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마침 공짜 술이 들어오고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주석하는 몸을 돌렸다.

도건을 비롯한 흑도 공자들이 눈총을 보내고 있었다.

“오! 석하 제법인데? 적혈방을 박살냈다더니 이제 눈에 뵈는 것이 없나 보지?”

최근 벌어진 흑검문과 적혈방의 싸움 진실이 어떠했든 이들에게 주석하는 어리벙벙하고 무공이 약한 머저리일 뿐이었다. 그런 주석하가 그들을 응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반대로 돌아서니 도건 일행은 열이 받았다.

“드디어 간이 배 밖에 나왔구나?”

도건 옆의 놈도 시비를 걸어왔다.

주석하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들이 허세만 많아서 앞뒤 가릴 줄 모른다. 그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이 자식들은 몇 초식 내에 저 세상은 아니더라도 골병이 들었을 것이다. 이곳이 흑검문이 관리하는 업소만 아니었더라도 이것들을 그냥……. 아직은 좀 무린가?

이곳에서 사고가 터지면 나만 손해니까…… 나중에 밖에서 손을 봐주기로 하자. 주석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만류했다.

“이 좋은 날, 화내지 말고 술이나 마셔.”

다행히 도건이 바로 옆 탁자에 자리를 잡으며 호응했다.

“좋아, 네놈의 체면을 봐주지. 공짜 술 가져와라.”

이것들이 완전히 호구로 아는 모양이다.

눈치 빠른 점소이가 재빨리 한 상을 차려왔다. 술이 들어가면 이놈들은 자연스럽게 제 무덤을 팔 것이다.

“흐흐, 네놈이 이번에 뒷걸음치다 사천일살이라는 개구리를 잡았다던데 사실이냐?”

“그거 순전 뻥 아니야? 이놈 팔뚝을 봐라. 가능한가.”

“사천일살이 그날 몸이 안 풀렸나 보지.”

녀석들이 대놓고 주석하를 놀리기 시작했다. 사천일살이 옆에 있었더라면 입도 뻥긋 못 할 놈들이. 이깟 놈들을 굳이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는 없다. 주석하는 적당히 응수하며 모든 신경을 옆 탁자에 쏟았다.

곤륜파 제자인 설약의 화가 난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어휴, 저것들 그냥 혼내줄까요?”

“내버려 둬라. 지금 우리가 그럴 때가 아니잖아.”

“마교가 추적하고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마교? 주석하의 귀가 그쪽을 향해 쫑긋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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