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도망자 (2)
허윤이 품에서 작은 양피지를 꺼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주변 눈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마교 추적대 성도 진입. 곧 덕양으로 들어갈 듯.
짧은 정보였으나 그 의미는 절대 적지 않았다. 허윤을 비롯하여 네 사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가장 허름한 옷을 입은 청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추적을 벗어나기 쉽지 않겠네요.”
“가 소협,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그들도 쉽게 위협하지 못할 겁니다.”
설약이 따뜻한 미소로 허름한 옷 청년을 위로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허름한 옷 청년은 일검신성(一劍新星) 가적성이란 인물로 최근 사천 일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청년 호걸이었다. 그는 우연히 십만대산으로 들어갔다가 마교의 기밀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마교의 추적을 받아 쫓기게 됐고 곤륜에 도움을 청했다.
십여 일 동안 곤륜 제자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이곳 덕양까지 도망친 상황이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정파인 북성하가에도 도움을 청하게 됐다.
도주가 길어지다 보니 가적성은 적잖게 지쳤다. 그나마 번화가인 덕양을 벗어나면 다시 마교의 추적대가 본격적으로 달려들 것이다.
“몇이나 예상해요?”
설약의 질문에 가적성이 지난날을 되새겼다.
“서넛입니다. 다만 그중에 한 놈이 정말 대단한 자입니다. 누군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설사 구파 장로급이라 할지라도 무시하기 힘들 고수입니다.”가적성의 설명에 불안감이 가중됐다.
“이곳 덕양에는 상대할만한 고수가 없습니다.”
덕양 사정에 능통한 하홍운의 대답이 그들을 더욱 좌절하게 했다. 사실 북성하가도 이곳에서는 위세를 떨치지만 사천 전역으로 본다면 고만고만한 문파에 불과했다.
“양주까지만 가면 남궁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남궁천 오빠요?”
설약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남궁천은 무림 오대세가의 일원인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로 현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였다. 그 무공 수준이 구파 장문인에 근접한다는 소문마저 돌았다. 그런 남궁천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니 그나마 그들은 희망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양주까지만 어떻게든 가면 되겠네요. 그때까지만 이라도 도움을 줄 사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하홍운은 옆 탁자에서 히득거리는 흑도 문파 공자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평소 이 동네에서 흑도 백도로 갈라져 대립하던 사이인지라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하홍운의 시선을 따라 다른 세 사람의 눈길 또한 그쪽으로 옮겨갔다.
주석하는 도건을 비롯한 공자들의 투정을 받아주고 있었다.
이 탁자의 대화는 곤륜이라는 말에 쫄았냐는 불평부터 시작해서 은근하게 정파를 까다가 최근 벌어진 적혈방과 흑검문의 싸움으로 옮겨갔다.
“석하야, 사천일살을 처리한 무용담이나 읊어봐라.”
도건이 다시 사천일살을 입에 올렸다. 그는 만날 때부터 계속 사천일살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물론 주석하는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평소 주석하를 마치 부하처럼 갈궜었는데 쟁쟁한 고수를 처리했다니 괜히 의심이 들었을 것이다.
“소문 못 들었어?”
“소문은 진실과 다르잖냐? 원래 소문은 과장되는 법. 실제로는 네놈이 한 거 아니지?”
도건이 계속 아닌 쪽으로 유도했다. 주석하는 굳이 진실을 밝힐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앞으로 이놈들과 어울릴 생각은 없으니까. 지금 앞에 있는 놈들은 이 마을 밖에서는 이름조차 내밀 수 없는 약골일 뿐이다.
도건이 그의 머리에 장난삼아 꿀밤을 먹이며 술잔을 들었다.
주석하도 단전에 쌓인 내공을 자유자재로 불러낼 수만 있었다면 아예 도발하지 못하도록 혼쭐을 냈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기다려야 했다. 이놈들은 곧 스스로 제 발목을 잡을 것이다.
밤이 이슥해졌을 무렵 허윤을 비롯한 정파 일행이 먼저 일어났다.
그들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나자 도건이 동료를 부추겼다.
“저놈들 곤륜파니 뭐니 하지만 별것 아닌 것 같지?”
“실력이 있었으면 네놈이 그리 도발하는 데 가만히 있었겠냐?”
“하아, 그 설약인가 뭔가 하는 여협, 괜찮아 보이지 않냐?”
“여협은 개뿔!”
오가는 대화 내용에 주석하가 눈을 찌푸리는 사이 도건이 벌떡 일어났다.
“큭큭, 제대로 한번 붙어보자고. 설약과 좋은 밤을 보내야겠어.”
주석하는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술은 취했겠다, 밤도 깊었겠다, 노리던 여인이 밖으로 나갔으니……. 그게 제 무덤인 줄 모르고.
도건을 비롯한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나간 후 주석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화루에서 나와 주변을 훑어보니 역시 구석진 골목길에서 시비가 붙고 있었다.
“뭐예요? 정말 해보자는 거예요?”
뾰족한 저 목소리는 설약일 것이다.
“흐흐, 남은 힘은 밤에 쓰라고.”
저 음탕한 목소리는 도건일 테고. 주석하는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소공자회 네 사람과 설약 쪽 네 사람이 서로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었다.
주석하가 볼 때 이 싸움은 설약 쪽의 압승이었다. 사람을 볼 줄 모르는 도건은 오만한 성정에다 미녀에 눈이 멀어 판단력을 상실했다. 오늘 그가 도건 등의 비위를 맞추어 준 이유도 바로 이런 판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그는 그들을 중재할 생각이 없었다. 헛소리에 객기 부리는 놈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야! X벌! 예쁘면 다냐?”
“이놈들이 뚫린 게 입이라고!”
“개도 제집에선 위세를 부리는구나!”
“오늘 기어갈 줄 알아라!”퍽-
요란한 소음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한 놈이 그의 앞으로 날아와서 풀썩 쓰러졌다. 피떡이 된 얼굴을 보니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다. 당연히 소공자회에 있는 놈이다.
그들의 싸움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공자회에서 목에 힘주던 녀석들이 추풍낙엽이 되어 떨어져 나갔다.
“으으!”
도건이 급히 도망치며 주석하에게 요란스럽게 소리쳤다.
“야! 주석하! 네놈 간자였냐? 다음에 만나면 죽을 줄 알아!”
소공자회 세 놈은 쓰러져서 끙끙 앓고 있었고 도건은 홀로 간신히 도망쳤다. 그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이렇게 혼내주는 사람이 있으니 세상은 아직 살만한가.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주석하가 빙그레 미소를 머금고 있을 때 골목에서 뛰쳐나온 설약이 도건을 추격하려다 그를 발견했다.
“아직 네놈이 남았구나. 너도 저놈들과 한패지?”
순식간에 설약이 검을 그에게 겨눴다.
주석하가 두 손을 올리고 변명하려 할 때 허윤이 비틀대는 하홍운을 부축하며 나타났다. 하홍운은 방금의 전투에서 다친 듯했다.
“사매, 그는 싸움에 가담하지 않았어.”
“이자도 그 자식들과 함께 술을 마셨잖아요?”
“주 공자의 난처한 표정을 봤다.”
다행히 허윤이 그를 좋게 보았던 모양이다. 주석하는 재빨리 허윤에게 감사를 표했다. 성질이 불같은 설약과 달리 허윤은 사리 분별이 확실했다.
대충 상황을 수습한 그들은 가적성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책을 수립했다.
“그나저나 하 공자마저 다쳤으니 어떻게 할지 모르겠군요.”
“죄송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데 제가 다쳐서…….”
하홍운이 참담한 음성으로 대답하자 설약이 다그쳤다.
“어디 쓸 만한 사람 없어요?”
지금 그들을 도와줄 적당한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적어도 마교에 대항할 그런 고수가 이 동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허윤의 눈에 유유자적한 주석하가 보였다. 그 내심을 알아챈 설약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는 흑도의…….”
“지금 정사를 가릴 때가 아니다.”
허윤은 설약의 만류를 뿌리치고 주석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주 공자, 흑검문에서 요인 경호를 맡기도 하겠지요?”
“당연합니다만.”
“양주까지 경호해줄 수 있겠소?”
“어느 분을?”
주석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적성에게 멎었다. 그도 이미 이들의 사정을 대략 눈치 채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았을 때 주의를 기울였던 덕분이다.
기분이 상한 설약이 입을 삐죽였다.
“이자는 무공이 별로인 것처럼 보이는데요?”
“사천일살을 죽였다지 않느냐? 그 정도면 충분히 도움이 된다.”
“사천일살? 난 믿을 수 없어요.”
설약이 눈을 부릅뜨고 주석하를 살폈다. 주석하는 그녀를 무시하고 허윤에게 대답했다.
“전 조금 비쌉니다만.”
“알았소. 일당은 최소 열 배를 챙겨드리리다.”
주석하는 거절 없이 승낙했다. 무엇보다 마교에 쫓긴다고 하니 호기심이 일었다.
허윤이 걸음을 옮기며 설명했다.
“오늘 밤은 하 공자가 마련해준 장원에서 머물 거요. 오늘 밤부터 경호를 서주시면 고맙겠소.”
“물론입니다. 일당만 잘 챙겨주시지요.”
주석하의 능글맞은 대답에 설약이 신경질을 팍팍 냈으나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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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홍운이 급히 마련했다는 거처는 덕양 외곽의 나지막한 야산에 있었다.
주변 인가와 떨어져 있고 담이 높아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절호의 장소였다. 장원에는 방도 많아 은신하기도 유리했다.
쫓기는 가적성이 장원 구석의 별채에서 휴식을 취할 동안 허윤, 설약, 하홍운이 그 주변에서 물샐 틈 없이 호위에 들어갔다.
주석하는 정원을 거닐며 외부 경계에 돌입했다. 낯선 자를 발견하면 재빨리 연락을 취하고 격전이 벌어졌을 때 돕는 것이 그의 주된 임무였다.
그들의 은신이 새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북성하가의 무사들도 일절 동원하지 않았기에 장원은 무척 한산했다.
이곳에 온 후, 주석하는 담청색의 피풍의를 걸쳤다. 밖에서 경계 임무에 들어가는 주석하를 위해 하홍운이 특별히 건넨, 북성하가 무사의 옷이었다. 졸지에 북성하가 소속이 된 기분이었으나 밤이슬을 피할 수 있기에 주석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옷감은 좋구만.”
흑검문도에게 나누어주는 피풍의에 비해 그 질이 한결 나았다. 앞으로는 흑검문도 이런 점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정원석에 걸터앉는 순간이었다.
딱!
갑자기 뒤통수에 충격이 가해졌다. 마교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 주석하는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를 때린 녀석은 조금 전에 도망쳤던 도건이었다.
그새 몰골을 수습한 듯 도건은 입술이 조금 부은 것을 제외하면 멀쩡했다.
“크크, 정말 거짓말이었구나? 네놈이 고수였으면 내가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거 아냐?”
도건의 빈정거림에 주석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내공을 제대로 운기하지 못하는 상태의 주석하는 하수와 다르지 않았기에 도건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멀쩡하네?”
“이 새끼야, 오늘 너 혼자 빠져나갔지? 두고 보자.”
도건이 그를 향해 이를 갈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석하는 녀석의 출현을 의심했다.
“여긴 웬일이야?”
“흐흐, 내가 오늘 수모를 그냥 넘어갈 것 같으냐? 설약이라고 했지? 그 곤륜파 여제자.”
“그런데?”
“살검회 소회주를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톡톡히 보여주려고.”
대충 이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 챘다. 하여튼 예쁜 여자를 보면 사족을 못 쓰니. 저러다가 명을 재촉하지.
“그 여자 어딨어?”
주석하는 한쪽에 떨어진 별채를 가리켰다. 물론 설약이 있는 곳이 아니라 가적성이 묵는 장소다.
“지금 말고 밤이 더 이슥하면 들어가. 아무래도 잠이 든 후가 처리하기 좋겠지?”
배려하는 말투에 도건이 낄낄대며 웃었다.
“흐흐, 이 자식이 형님의 마음을 아는구나. 내가 먼저 건드려보고 네놈 몫도 남겨줄게.”
“난 괜찮다.”
도건이 손을 내젓는 주석하의 피풍의를 뺐었다.
“흐흐, 이 옷을 입으면 같은 편으로 착각하겠지?”
주석하가 뭐라고 만류할 틈도 없이 담청색 피풍의를 두른 도건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주석하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네놈에게 드디어 천벌이 내리는구나. 나는 술이나 마시러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