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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8화 (8/273)

8화 도망자 (4)

마교에서 나름 강자라고 자부했던 마불은 자신에게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었다.

마교에서도 교주인 천마나 교주를 수호한다는 마교수호사령, 마교 최강자라는 마교팔왕을 제외한다면 그를 이렇게 압박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런 깡촌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이에게 수모를 당할 수 있단 말인가.

목숨의 위협을 직감하자 마불은 진지해졌다. 이를 악물고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내공 싸움이 시작됐다. 설사 상대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내공을 익혔다 하더라도 그를 당할 수 없을 것이다.

내공 대결에서는 자신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다. 마불은 단전에 담겨있던 한 톨의 내공까지 모두 끌어올려 밀고 들어오는 상대의 기운에 저항했다.

“으으으으…….”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대체 이놈은 뭐냐? 인간이 맞기나 한 건가? 마불은 눈을 부릅뜨고 주석하를 노려보았다. 핏줄이 불거지며 눈에 핏발이 섰다.

주석하의 기운이 점점 음산해졌다. 조금 전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던 표정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지옥의 사신처럼 천천히 그의 입이 열렸다.

“마불이라 했던가? 네놈은 눈이 형편없구나. 사람을 봐가면서 덤벼야지.”

고오오오-

툭- 투툭-

급기야 마불의 부풀어 오른 혈관이 마구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끄아악!”

한계에 이른 마불은 처참했다. 사고가 정지됐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팔과 몸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는 피가 배어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살가죽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끄으윽…… 어째 이런 일이…….”

푸아악-

사람이 터져나가는 장면을 본 적이 있던가? 그 장면이 지금 객잔 구석에서 연출되고 있었다. 누런 피부가 붉게 변하더니 살점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녹아내렸다.

투- 투- 툭-

참혹한 현장 속에서 남은 뼛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주석하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자신이 벌인 참상임에도 현실인지 꿈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들불처럼 일었던 내공도 어느새 순한 양처럼 잠잠해졌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을 봤다가 주변에 흩어진 육편을 멍한 눈으로 둘러봤다. 탁자와 벽과 바닥이 피범벅이었다. 마치 도살장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마불의 무공 수위를 가늠했다. 마불의 내공은 어느 정도였을까. 고강한 내공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기에 짐작이 어려웠다. 다만 고수 중에서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내 몸속의 내공은 대체 얼마나 되는 거지?”

주석하는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운 현실에 고개만 저었다. 최소한 강호에서 웬만큼 이름을 날리는 고수보다 우위임이 확실했다.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열이 받았다.

“그런데 왜…… 내가 쓰려고 하면 꿈쩍도 하지 않냐고…….”

그때도 오늘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내공을 일으키려 하면 꼼짝도 하지 않다가 위험에 처하면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내공이 몸을 지배하는 순간에는 그 역시 평소보다 훨씬 잔혹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위험에서 벗어날 때까지 앞뒤 가리지 않고 상대를 죽여버리니까.

이것이 평소에 억눌려 있던 본래의 성격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재된 내공을 제대로 다룰 방법부터 고민해봐야겠어.”

생각할수록 심법이 아쉬웠다. 흑검문에는 제대로 된 심법이 없어 이 엄청난 내공을 제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심법을 배울 수도 없다. 시중에서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내공심법은 그 한계가 명확하지 않은가.

그가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죽엽청을 들고 나오던 주인장이 비명을 질렀다. 난데없는 사태에 넋이 나가 벌벌 떨고 있었다.

주석하는 조용히 주인장을 불렀다.

“이보게, 주인장. 술을 넘기게.”

“아, 예.”

두려운 표정으로 힐끔거리면서 죽엽청 한 병을 주석하에게 건넸다.

“두말하지 않겠네. 자네는 입이 없는 거야. 눈도 없고.”

“다…… 당연하지요. 염려 마십시오.”

과연 눈치 빠른 주인장이었다. 이 주인장이 언제까지 입을 다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살인멸구 할 수는 없으니. 어차피 상관없나…….

이럴 때가 아니었다. 허윤 등이 마교의 습격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석하는 재빨리 술병을 낚아채고 객잔을 떠났다. 그 와중에도 불쌍한 주인을 위해 은자 몇 냥을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주석하에게서 빼앗은 담청색 피풍의를 걸치고 도건은 목적한 건물로 잠입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저녁에 보았던 곤륜파의 아리따운 낭자 얼굴로 가득했다. 예쁜 데다 성질도 제법 있어 보이는데 명문 정파 제자라니. 모든 것이 그의 욕구를 자극하고 있었다.

지금은 삼경을 훌쩍 지나 이슥한 시각이니 분명히 깊이 잠들어 있겠지. 오늘 그들의 행색은 몹시 피로해 보였다. 당연히 경계가 흐트러져 있을 터. 일대일로 싸운다면 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기습하면 자신 있었다.

“으흐흐흐.”

상상을 떠올리자 저절로 안면이 붉어지며 흥겨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그에게 역사적인 밤이 될 것이다.

작은 별채의 입구에서 도건은 만전을 기하려고 주변을 살폈다.

“좋고…….”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응?”

그래도 나름 무공을 익혔다고 평범한 사람보다 감각이 예민했다. 온몸의 감각이 어둠 저편으로 쏠리고 있었다.

별채로 들어가려던 도건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으며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모든 감각을 집중하면서 유심히 살필 때였다.

툭툭-

“어?”

갑자기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쳤다. 모골이 송연했으나 이런 야심한 시각에 뒤에서 장난칠 정도면 누군지 뻔했다.

“석하야, 나 지금 심각하니까 건드리지 마라. 네 몫도 남겨준다고…….”

그 순간 등에서 화끈한 충격이 일었다. 검에 찔렸음을 직감한 도건은 놀라서 뒤를 돌았다.

험악한 무사 하나와 그 뒤로 상인 둘이 보였다. 당연히 무사의 손에는 피 묻은 장검이 들려 있었다.

“누…… 누구냐?”

도건은 고통을 참고 상대를 노려봤다. 기습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상인처럼 보이는 녀석이 입을 열었다.

“그 자식은 어디 있나? 짙은 밤색 장포를 걸쳤던 놈.”

“밤색 장포?”

도건은 백화루에서 실랑이를 벌였던 허윤 무리를 떠올렸다. 그 가운데 남루한 밤색 장포를 입은 자는…… 가적성이라 했던가. 피곤한 기색으로 별말 없이 요기하던 놈이었다.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검을 든 녀석이 앞으로 성큼 다가서고 상인 둘이 그의 퇴로를 차단했다.

그들의 몸놀림을 목격하는 순간 도건은 이들이 자신의 상대가 아니란 사실을 직감했다. 이들의 무공은 그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목숨을 구하는 방법은…….

“나, 난 그들 일행이 아니오! 난 그자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소!”

“거짓말 마라. 네놈이 여기 있는 것과 그 담청색 피풍의가 증명해준다.”

“피풍의?”

그제야 도건은 주석하에게서 뺏은 피풍의 때문에 이들이 그를 곤륜파와 같은 편이라고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피풍의가 하홍운이 주석하에게 건넨 북성하가의 옷이란 사실을 그가 알 리 없었다.

어쨌든 피풍의가 원인이라 생각한 도건은 재빨리 피풍의를 벗으며 사정했다.

“그…… 그게 아니라……. 크윽!”

더듬거리며 입을 여는 순간 검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도건은 눈을 부릅뜨고 항의하듯 상대를 노려보았다. 점차 상대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내꺼 아니라니까…….’

그의 신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순식간에 도건을 처리한 마교인 세 사람은 눈빛을 교환하며 전각 내부로 뛰어들었다.

콰앙-

전각의 벽이 허물어지고 내부에서 허윤이 검을 휘두르며 뛰쳐나왔다. 도건이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허윤은 마교인이 급습했음을 눈치 챘다. 덕분에 기습에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허윤의 뒤를 이어 하홍운과 설약마저 마교인을 포위했다. 마지막으로 가적성이 그들과 합세했다.

순식간에 장원에서 어지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마교인의 무공이 대단했으나 곤륜파의 제자인 허윤과 설약 역시 못지않았다. 게다가 가적성은 이곳까지 마교의 눈을 피해 도망친 실력자였다.

작정하고 덤빈 마교 무리이지만 최강자인 마불이 빠진 상황에서 기습이 실패한 뒤라 전세는 어느 쪽으로도 쉽게 기울지 않았다.

야밤에 벌어진 싸움이 길게 이어졌다.

**

주석하가 장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쑥밭이 되어 있었다.

허윤을 비롯한 네 사람이 마교인으로 보이는 세 사람과 생사를 건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주석하에 비하면 엄청나게 무공이 높았다. 이름 없는 흑검문에서, 그것도 건성으로 무공을 익힌 그가 감히 넘볼 경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약속했으니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그 정도 돈 때문에 목숨을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일단 전황을 살폈다. 허윤 일행이 밀린다 싶으면 도망치는 게 상책이고 유리하다 싶으면 돈값을 해야 한다. 다행히 곤륜파의 위명은 거짓이 아니었다.

주석하는 기회를 엿보다가 검을 주워들고 싸움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포착한 기회는 절묘했다.

한참 몰리던 마교의 인물들은 그러잖아도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주석하가 가담하자 크게 당황했다. 그 순간 허윤의 검이 번개처럼 상대를 내리쳤고 이미 무수한 부상에 시달리던 마교인이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마침 주석하가 덤벼들던 그 방향이었다.

푹-

주석하의 검이 마교인의 등을 꿰뚫었다. 소가 뒷걸음치다가 개구리를 잡은 게 아니라 개구리가 뒷걸음치다가 날벼락을 맞은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주석하는 만족한 심정으로 피 묻은 검을 다시 한 번 휘저었다. 등이 꿰뚫린 마교인은 신음을 터트리며 저승으로 갔다.

한 명이 쓰러지자 급격히 전세가 기울었다.

“으악!”

다시 한 놈이 가적성의 검에 쓰러졌고 남은 한 놈이 설약의 검에 한쪽 팔을 잃었다.

한쪽 팔을 잃은 무인 차림의 마교도가 신음을 토해냈다.

“두고 보자!”

미처 설약이 대응할 틈도 없이 녀석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설약이 놈을 추격하려 하자 허윤이 그녀를 만류했다.

“그만. 쫓아가면 위험하다.”

끝을 봐야겠지만 지금 그들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간신히 적을 물리쳤으나 그들 또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도저히 어둠 속에서 추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을 두렵게 한 것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마교 추적자였다. 금빛 가사를 걸쳤던 스님, 그자의 무공은 그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저들에겐 아직 그 땡중이 남아 있어.”

그제야 설약도 마불을 떠올렸다. 생각만 해도 두려운 상대여서 망설이던 설약은 바로 포기했다.

격렬한 싸움이 끝나고 주변이 다시 적막에 잠겼을 때 허윤이 주석하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도와주어서 감사하오.”

“하하, 뭘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주석하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때 설약이 그를 노려보며 언성을 높였다.

“이봐요! 어디 갔다 왔어요?”

“네?”

“원래 경계 임무는 당신이었잖아요? 게다가 전투가 벌어지고 한참 후에야 나타났고…….”

“사매, 그만해.”

보다 못한 허윤이 설약을 말렸다.

“뭘 그만 해요. 저 사람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그가 제 역할을 못 한 것도 없다. 우리는 그들의 침입을 사전에 알지 않았더냐? 그리고 그가 마교도를 검으로 찔러 죽인 것도 사실이고.”

“그건 사형이 거의 해결한 상황이었잖아요!”

발끈한 설약이 주석하를 노려보았다.

주석하는 그들의 대화에서 숨은 진실을 알아챘다. 이들은 도건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방치한 것이다. 마교인이 도건을 죽이는 동안 반격할 시간을 벌었다. 도건이 아닌 그였더라도 이들은 같은 행동을 했겠지. 아무리 정사로 나뉘어 있고 가벼운 목숨이라지만……. 오늘 괜히 마교도 둘을 처리했나.

“그래서 일당을 주지 않겠다는 건가요?”

주석하의 눈썹이 쓱 위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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