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9화 (9/273)

9화 살검회 (1)

설약의 고운 눈매 또한 상큼 위로 치솟았다.

“그렇잖아요? 당신이 한 게 뭐가 있어요?”

주석하는 검 끝으로 쓰러진 마교인을 가리켰다.

“물론 그 사람을 당신이…….”

“나도 놀고 있지 않았어.”

“그래도 접전이 벌어지는 동안 당신이 없었던 건 사실이잖아요.”

설약이 지지 않고 그에게 화를 퍼부었다. 그녀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이렇게 구박받을 생각은 없었다.

“흠, 그래? 당신이라면 그 일당에 목숨을 걸까?”

“그게 뭔 말이에요?”

“당신이라면 그 돈 받고 짚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들겠냐고.”

“그게 당신 할 일이었잖아요? 그리고 난…… 당신보다 훨씬 몸값이 높아요.”“그렇군.”

주석하는 설약을 노려본 후 허윤에게 물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허윤이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의 생각을 짐작한 주석하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좋아. 난 오늘 하루로 그만둘 테니 하루 치 일당을 줘.”

“그, 그게…… 그러지 말고 끝까지 같이 갑시다.”

허윤이 사람 좋은 미소로 그를 달랬다.

주석하가 뜻을 굽히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허윤이 허리춤에서 은자를 꺼냈다.

“이틀 치를 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아니라 이틀 일당이니 최악은 아니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무시당하니 기분이 나쁘다. 그가 은자를 받고 돌아서자 뒤에서 설약의 험담이 들려왔다.

“흥, 실력도 없는 주제에…….”

그녀가 보기에 싸움에 가담한 주석하의 실력은 보잘것없어 보였다. 앞으로도 도움 되기 힘들 수준이다. 그녀가 지금처럼 무시하는 말을 퍼부은 이유이기도 했다.

걸음을 옮기던 주석하가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아, 그런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앞으로 다시 보지 맙시다. 그리고…… 당신들 그 이상한 땡중 걱정하고 있었지?”

“흥! 보지 말자면 누가 겁낼 줄 알아요?”

설약이 뾰족한 목소리로 대응했다.

주석하는 신경 쓰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 땡중은 마교의 인물인 마불이란 사람이야. 내가 객잔에서 처리했으니 그렇게 알아. 그렇게 일 해줬는데도 문전박대라…… 나도 할 말이 없어. 앞으로 보지 말자고.”사실 주석하는 마불을 죽인 사실을 숨기고 싶었다. 자칫 마교의 표적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굳이 꺼낸 이유는 순전히 설약이 자존심을 긁어서였다.

“뭐? 마불?”

뒤에서 허윤의 외침이 들렸으나 주석하는 무시하고 장원을 떠났다.

하홍운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저자가 마불을 처리했다는 게 사실일까요?”

“저자 말을 어떻게 믿어요? 마불이 얼마나 고수인데…… 저 사람 백 명이 덤벼도 감당 못 해요.”

설약이 빈정거리며 부인했다.

“그렇긴 한데…….”

“저자가 고수일 리가 없잖아요?”

허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잠겼다. 진짜일까? 거짓이라 생각하지만 그렇다면 주석하가 마불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의 고민을 눈치 챈 듯 가적성이 어깨를 툭 쳤다.

“뭘 고민하십니까? 정말 마불이 죽었다면 우리도 안전하지 않습니까.”

**

지금 주석하의 최대 관심사는 내공심법이었다.

이번 생을 과거처럼 살지 않으려면 반드시 고강한 무공 고수가 되어야 했다. 사실 중원 전역에 이름을 떨치는 그런 고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런 고수도 정파와 사파의 대립에서 어이없이 쓸려나가고 나중에는 정사 연합과 마교가 대립하면서 다시 명줄이 짧아지는 것을 숱하게 봤으니까.

그래도 이 작은 고을에서 목에 힘주고 어깨 펴고 살려면 지금보다는 훨씬 무공이 강해야 한다. 덕양 일대, 나아가 사천성 중심가인 성도에서 꿀리지 않을 정도면 충분하다.

“내공 하나는 끝내주는데 말이지…….”

사천일살과 마불을 통해 내공의 심후함을 확인했다. 그 내공을 제어할 수 있다면, 아니 그 일부만이라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면 만족이었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꽤 괜찮은 내공심법이 필요했다. 전생에서도 제대로 된 심법을 익혀본 기억이 없다. 지금 그가 선택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은…….

주석하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수많은 서적이 쫙 꽂혀있었다. 책장을 가득 채운 온갖 종류의 서적은 위압적이었다. 물론 그 대부분은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서, 문학, 역사서이고 무공과 관련한 도서는 몇 권 없기는 했지만.

책이 널려 있다고 해서 이곳이 황궁 무고나 소림사 장경각은 아니다. 하다못해 흑검문의 무고도 아니다. 애초에 역사가 짧은 흑검문에는 무고란 곳 자체가 없었다.

“그냥 헌책방이라…….”

덕양에서 가장 붐비는 골목에 자리한 중고서점 만서각이었다. 주인 말로는 책이 일만 권 있다고 해서 이름이 만서각이라는데 그가 보기엔 절대 만 권이 아니었다. 일이천 권이라도 이보다 많겠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정도만 해도 책이 귀한 이 시대에는 많은 편이니까. 옆 골목의, 그가 관리하는 백화루도 어차피 마찬가지 아닌가. 꽃처럼 예쁜 아가씨가 백 명 있어 백화루라는데 그가 직접 세어본 결과 열 명 간신히 넘을 수준이었다.

주석하의 눈이 서가에 꽂힌 무공비급을 재빠르게 훑었다. 삼재검법, 육합권……. 내공심법 관련 책자라고는 가장 기초인 토납법을 다룬 책이 전부였다.

그중에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토납법 책자를 쓱 꺼냈다.

“이런 곳에서 책을 샀더니 알고 보니 그게 엄청난 절세비급인 경우가 있다고 했지…….”

가끔 강호에서 주워들은 천고 기연이 그러했다. 절벽에서 떨어졌더니 만년설삼이 자라고 있고, 길 가다가 노인을 도와줬더니 전대 기인이었으며 서가에서 책을 대충 샀더니 강호를 흥분으로 몰아넣은 절대비급이더라는.

주석하는 자신에게도 그런 행운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손에든 책을 꼼꼼히 훑었다.

“천하무적 내공 기르는 법? 에이, 사기를 쳐도 적당히 쳐야지…….”

그런데 다른 선택이……. 몇 번 고민하던 주석하는 어쩔 수 없이 그 책을 들고 값을 치렀다.

“아니! 무슨 책이 이렇게 비싸요?”

“그래도 천하무적 내공 아닙니까? 천! 하! 무! 적!”

아무래도 바가지가 분명하건만 무려 은자를 한 냥이나 지불하고 주석하는 비급을 품에 안았다. 며칠 전 허윤에게 받은 일당이 있어서 마음까지 다치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서점을 뒤집…… 지는 않고 조용히 포기했겠지.

정작 황당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만서각을 나서는 순간 갑자기 흑의 무복을 입은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네놈이 흑검문 소문주냐?”

허리에 검을 찬 모습에 살기가 가득했다. 그래도 주석하는 일파의 소문주이고 과거 오 년간 강호를 구른 경험이 있으며 최근 큰 사건에도 휘말렸던지라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여유롭게 상대를 훑어본 후 반대로 물었다.

“그렇긴 한데, 너희들은 누구냐?”

“우리는 살검회에서 왔다.”

살검회란 말을 듣는 순간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살검회 부회주가 도건 녀석이 아니던가. 도건 그 녀석은…… 그날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이 장원에서 피떡이 되어 죽어 있었지. 안타깝지만 하던 짓 그대로 살다간 녀석인데…….

“나를 왜 찾지?”

“회주께서 부르신다.”

살검회주가 찾는다면 이유가 뻔했다. 무려 아들 도건이 죽었으니 당연히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그를 수배할 수밖에.

“흠, 알았다. 가도록 하지.”

솔직히 이들을 따돌릴 능력은 없었다. 물론 그도 흑검문 소문주라는 신분이 있어 살검회에서 함부로 대하긴 어렵다. 더구나 최근에 흑검문이 적혈방을 병합하는 바람에 세력을 비교하면 오히려 흑검문이 우세했다.

녀석들이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좌우로 물샐틈없이 벽을 만들었다.

“호위까지 붙여주니 좋구나.”

주석하는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들을 따라 살검회로 향했다.

**

덕양의 주요 흑도 방파는 모두 네 곳이었다. 흑검문, 적혈방, 살검회, 혈랑곡. 이 네 곳의 세력은 비슷했다. 흑검문은 사실상 정사지간이라 할 수 있었고 세력 규모는 적혈방이 가장 컸다. 얼마 전에 적혈방이 흑검문을 쳤던 이유도 가장 세력이 커서 덕양 일대를 통합할 욕심 때문이다.

주로 자객들로 구성된 살검회는 흑검문과 세력이 비등했다. 혈랑곡은 산속에 처박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단체로 그 실체 또한 모호했다. 가끔 춘궁기 때 마을을 습격해서 먹을거리를 노략질하는 바람에 악명을 떨치기도 했지만.

그런 덕분에 주석하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버지인 흑검문주가 구해줄 테니까.

“여기냐?”

살검회로 데려간다기에 기대하고 있었더니 정작 그를 끌고 간 곳은 호반 부근의 정자였다.

시원한 바람에 물결이 출렁이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명당이었다.

살검회 흑의인들은 대답 없이 그를 정자 한가운데 데려다 놓고는 정자 아래쪽을 도망치지 못하도록 포위했다.

주석하는 여유롭게 경치를 구경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떠다니고 잔잔한 바람이 부는 호수는 평화로웠다.

살검회는 엄밀하게 따지면 자객집단이었다. 돈 많은 부호에게 수당을 받고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해주었다. 당연히 그런 일 중에는 살인 청부도 있었다. 이곳 호숫가 정자는 살검회가 의뢰자를 만나는 장소였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얼굴을 검은 두건으로 가린 중년 인물이 정자 위로 올라왔다. 얼굴의 절반을 가렸지만 주석하는 금방 눈치 챘다. 이자가 바로 살검회주이자 도건의 아버지란 사실을. 두 사람의 외모가 사실상 판박이였기에 얼굴을 가리나 마나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도 친구 아버지랍시고 주석하는 얼른 포권을 취하고 허리를 굽히려 했다. 그 순간 우악스러운 손이 멱살을 잡았다.

“네놈이 흑검문 소문주냐?”

놀란 주석하는 얼떨떨한 상태에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판단하기에 살검회주는 도건과 달리 성격이 매우 급한 듯했다.

“살검회주이십니까?”

“내가 먼저 물었다.”

“처음 뵙습니다. 도건의 친구 주석하입니다.”

주석하는 도건의 친구임을 강조했다. 살검회주가 그를 조금이나마 좋은 쪽으로 봐주기를 바라서다.

“흠, 친구라?”

“실제로는 제가…… 따까리였죠.”

젠장, 서글픈 과거를 밝히고 싶지 않았지만 이 자리를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하려고 어쩔 수 없이 고육지책을 썼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동안 도건에게 무수히 은자를 뜯기고 구박받은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

다행히 멱살을 잡았던 손이 풀리고 살검회주의 안면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좋아, 긴말 않겠다. 누가 우리 건이를 죽였지? 네놈이냐?”

“예?”

다짜고짜 윽박 해 들어오자 주석하는 무조건 몸을 낮췄다. 자칫 초상 치를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네놈이 사천일살을 죽였다는 소문도 있다. 그 실력이면 건이 정도는…… 우습겠지?”

살검회주의 음성에 살기가 어렸다. 주석하는 변명해 봐야 씨도 먹히기 힘들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아들이 죽어서 눈에 뵈는 게 없는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이렇게 막무가내인지.

“그걸 믿으십니까? 소문이란 원래 과장되는 법이죠.”

일단 피하는 게 우선이다. 괜히 대들다가 골로 가는 수가 있으니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그 순간 옆에 있던 살검회주의 부하들이 그의 목에 검을 올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검으로 목을 치겠다는 심산이다.

‘아! 이번 생도 글렀어…….’

주석하가 어떻게 이 난국을 타개할지 고민하면서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툭-

그의 품에서 책자가 떨어졌다. 방금 헌책방에서 샀던 무공서였다.

“응? 이게 뭐냐?”

살검회주가 책자를 주워들고 예리한 눈으로 훑었다. 제법 고풍스러운 낡은 책자가 지금은 더 쓸모없어 보였다.

“천하무적 내공 기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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