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0화 (10/273)

10화 살검회 (2)

“헉!”

주석하는 다급하게 경기를 일으켰다. 그러잖아도 고수로 오인하는 판에 천하무적 내공이라니.

살검회주가 실눈을 뜨고는 그를 예리하게 훑었다.

“그…… 그게…… 그 책은 제가 익혀보려고 헌책방에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려 나왔다.

뻑-

살검회주가 책자를 들어 주석하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무슨 일인지 몰라 주석하가 눈을 껌벅이고 있자니 살검회주가 피식 웃었다.

“이건 강호 삼류무사도 안 본다는 책 아니냐? 네놈 흑검문 소문주라더니…… 아직 무공조차 제대로 입문하지 못한 거냐?”

그를 완전히 깔아뭉개는 말투였으나 그 덕에 고수란 의심을 벗었다.

“……제가 평소 노는 것을 좋아해서요.”

살검회주가 눈짓하자 그제야 목에 닿았던 검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위협이 사라졌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어느새 살검회주가 다시 그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우리 건이가 낯선 장원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그때 넌 어디에 있었지?”

“저는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석하는 머뭇거리면서 말하기 어려운 척했다. 살검회주의 눈썹이 쓱 올라가는 것을 본 주석하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망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 같아 차마 말씀드리기가…….”

“뭔 소리야? 남김없이 고하라!”

“그날 아드님은 한 여인에게 꽂혀서 야밤에 그 장원으로 갔습니다.”

“그게 누구냐?”

“곤륜파의 설약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설약이 그를 적대시하지 않았다면 그도 이런 식으로 일러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진실을 왜곡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설약을 위해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곤륜파?”

살검회주의 안면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 설약이라는 여인이 꽤 예쁘게 생겼거든요.”

주석하는 설약을 예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예쁜 게 사실이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하아, 하필이면 곤륜파 제자를…….”

평소 도건이 주색잡기에 몰두했기에 살검회주는 금방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했다. 무려 곤륜파 제자를 건드리려 했으니 죽어도 할 말이 없었다. 연신 한숨을 내쉬는 살검회주의 매서운 눈빛이 그를 섬뜩하게 훑었다.

“네놈은 그때 뭐 하고 있었느냐?”

“전 그때 홀로 객잔에 술 마시러 갔습니다. 죽엽청을 한 병 사서 바로 돌아왔고요. 솔직히 저는 여인에 관심 없거든요.”

주석하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가 도건에게 피풍의를 빼앗기고 객잔에 술을 마시러 간 것은 사실이니까. 물론 여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은…… 뭐, 이것도 딱히 거짓은 아니다. 적어도 도건 그 자식에 비하면 그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살검회주는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깊이 고민하는 눈치였다.

의심을 막기 위해 주석하는 얼른 덧붙였다.

“방금 제가 익히는 비급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전 소회주보다 무공이 약합니다.”

“그럼 결국 건이를 죽인 놈들이 곤륜파란 건데…… 같이 죽어 있던 놈들은 대체 누구지?”

주석하는 그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아마도 도건의 시신 부근에 마교인 둘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것이다. 어지러운 흔적과 함께.

“아는 바 있나?”

주석하는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말할수록 그 혐의가 돌아오기 마련이다. 만일 도건이 설약에게 음심을 품지 않았더라면, 그의 피풍의를 뺏지 않았더라면, 평소 그를 괴롭히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이렇게 끝난 일이니 살 사람은 살아야지.

게다가 마교가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하기엔 살검회에 불 피바람이 염려됐다. 굳이 도건의 아버지까지 사지로 몰고 싶진 않았다.

“알았다. 곤륜파 쪽으로 알아보지.”

과연 성질 급한 살검회주는 결정도 빨랐다. 정자를 반쯤 내려가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이면 죽을 줄 알아라.”

살검회주가 부하를 이끌고 사라지자 주석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잘 피했다고 생각하면서 찜찜한 마음을 묻어두고 그가 저잣거리로 들어섰을 때였다.

갑자기 옆에 비슷한 또래의 사내가 붙었다. 그 녀석은 무례하게도 그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려놓았다.

“뭐냐?”

주석하는 눈을 부라리며 걸음을 멈추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청의 무복을 걸친 자유분방한 녀석이었다. 생긴 얼굴도 중구난방이라 문제긴 하다만…….

녀석을 딱 보는 순간 인상이 도건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 도수. 살검회 둘째 소회주. 건이 형 동생!”

본인을 도수라고 소개한 녀석이 실실 웃으며 그를 쭉 훑어봤다. 기분이 나빠진 주석하는 어깨에 올려진 손을 걷어치웠다.

“뭐냐? 방금 살검회주가 왔다 갔는데…….”

“당연! 나도! 나도 알지!”

“그런데…… 나를 의심하는 거냐?”

“푸하하! 의심?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어 보이는데 무슨……. 형이 말하길 예전에 강아지처럼 살살 기는 귀여운 놈이…… 아, 그게 아니라 하여튼 좋은 동생이 있다고 했어.”평소 도건이 주석하를 얼마나 낮춰 봤는지 바로 짐작이 갔다.

“그래서? 볼 일이 뭔데?”

“내가! 내가 우리 형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도수의 말에 주석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살검회주가 떠났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귀찮은 녀석이 또 들러붙었다.

“형 죽음이 어엄청 궁금하잖아. 도와주라!”

인상을 팍 찡그리니 녀석이 눈을 부라렸다. 그래 봐야 무섭지도 않지만.

“최근 형의 행적 알지?”

이 녀석의 행동을 보니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용의자를 밀착 감시하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사건 해결에 협조해 달라는 건지 도무지 진의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절하면 괜한 의심을 살 것 같아 찜찜한 기분 속에 수락했다.

“좋을 대로 해.”

녀석이 따라다녀 봐야 며칠이면 포기하겠지. 사실 도건을 골탕 먹일 생각이야 있었지만 이렇게 죽어버릴 줄은 그도 몰랐으니까. 슬픔은 망자의 가족

몫이니 그도 예를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신이 난 듯 도수가 그와 걸음을 맞췄다. 만족하여 사뿐, 사뿐거리는 발걸음이 가볍게 그를 따라붙었다. 젠장! 하는 짓도 생긴 것만큼이나 중구난방이었다.

‘난 네놈이 싫다고! 근데 이 녀석…… 고수네!’

오 년간 강호를 구른 경험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 녀석의 실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놀랍게도 살검회주보다 훨씬 무공이 강하다는 직감이 왔다.

“흐음, 너, 세냐?”

주석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도수가 피식 웃었다.

“우오오! 당연한 걸…….”

“형보다?”

“형은…… 계집질에 노느라…….”

당연히 주석하도 아는 사실이다. 도건은 무공보다 주색잡기에 더 열중했으니까.

도수의 시선이 그가 들고 있는 책자에 멎었다.

“흠, 천하무적 내공이라…….

으악, 이 책이 왜 밖에 나와 있지? 괜히 쪽팔린 주석하는 슬그머니 책자를 품속에 밀어 넣었다.

“그 책은…… 내가! 내가 제대로 된 심법 책자 하나 구해줘?”

도수가 그에게 호감을 표시해왔다. 도건이나 살검회주와는 인상이 조금 달랐다. 무례하면서도 살갑게 구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던가.”

“내일 나랑 형이 죽은 산장에 같이 가면! 알지?”

도건의 죽음을 다시 조사해보려는 심산인가? 이미 살검회주가 조사했을 텐데. 어쨌든 주석하는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원에 다녀오는 일이야 힘들지 않으니까.

**

다시 찾은 산장은 그날처럼 적막에 잠겨 있었다.

이전에는 밤에 갔었기에 주석하도 대낮에는 처음이었다. 밤과 달리 낮에 본 장원은 거의 폐가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일 년 이상 버려졌던 장원이 확실했다. 물론 이런 느낌은 그날 격전의 여파도 한 원인이었다.

군데군데 격렬한 전투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도건의 시신은 살검회에서 거두어갔으나 마교인 둘의 시신은 여전히 방치된 상태였다. 부서지고 무너진 건물 일부와 바닥의 검붉은 피가 그날의 처절함을 다시 일깨웠다.

“으음.”

시신을 본 도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과 달리 녀석은 시체를 보고도 별달리 충격을 받지 않았다. 평소 이런 시체 정도는 자주 봤다는 느긋함이 엿보였다.

주석하는 부근에서 기다렸다. 그는 그 참상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꽤 검법이 화려한데…….”

도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슨 말이냐?”

“흑검문이었다면 이런 자상이 남지 않아. 흑검문 검법은 단순하잖아?”

이거 칭찬인가 비난인가. 혐의를 벗었다고 좋아해야 할 일인가? 조금은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주석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살검회 검법도 이런 식으로 흔적이 안 남지.”

“곤륜파라니까.”

주석하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실제로 이들을 죽인 사람은 곤륜파 제자인 허윤과 가적성이다. 물론 주석하가 최후에 검으로 등을 찌르기는 했지만.

“형의 사인은 조금 달랐는데……. 어쨌든 이 자리에 왜 우리 형이 죽어 있는지, 또 이들의 정체는 뭔지, 이들과 무슨 관계인지…….”

도수는 한참 동안 주변을 샅샅이 훑었다. 그 안색이 매우 착잡해 보였다. 친형이 죽은 장소이니 그 슬픔이 사무쳤나 보다. 주위를 조용히 살피면서 형의 죽음을 애도하고 내심 복수를 다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석하는 조용히 도수가 마무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내리쬐는 햇볕은 따뜻했다. 점점 지겨워지고 몸이 나른해지자 주석하는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 순간 그의 눈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언제부터였을까. 한 인물이 십 장가량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특별한 점은 그 사람이 여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화사한 붉은 빛 경장에 긴 머리를 늘어트린 젊은 여인이었다.

그녀를 본 순간 주석하는 자신도 모르게 동작을 멈추었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느낌이 팍팍 왔다. 주석하는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고정했다.

천천히 여인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 여인의 화사한 자태가 그의 눈에 폭발적으로 들어왔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머릿결이 시선을 자극했다. 머리카락을 반달 모양으로 틀어 올려 진홍색 머리끈으로 질끈 묶은 모습이 사뭇 인상적이었다. 그 아래로 흑단처럼 검은 머리가 폭포수처럼 어깨너머로 늘어져 있었다.

설부화용(雪膚花容)! 별처럼 반짝이는 크고 또렷한 두 눈과 오뚝한 코, 선명한 입술이 하얀 얼굴에 그린 듯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었다. 눈이 시리도록 하얀 피부가 붉은 경장과 어울려 산뜻함을 더했다.

일반 여인보다 한 뼘은 큰 키에 조화로운 늘씬한 몸매가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그 모든 부분 부분이 햇빛 아래 반짝이며 그녀의 존재를 한층 우아하고 신비롭게 했다.

주석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여인을 만났지만 지금처럼 눈을 떼지 못하기는 처음이었다. 현 무림에서 최고 미녀로 이름을 날리는 천상삼화일지라도 이 여인보다 아름다울까. 전설상의 서시나 왕소군도 이 여인 앞에서는 빛을 잃을 것이다.

다만…….

여인의 주위로 만물을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타인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위엄과 고귀함, 거기에 냉혹함까지.

“누구죠?”

선명하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이 구르는 목소리가 바로 이런 건가. 그제야 주석하는 정신을 차렸다. 멀리 보였던 여인이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 덕양에 거주하는 무림인입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요?”

“보시다시피…….”

주석하는 말을 흐리며 도수를 찾았다. 도수 또한 홀린 듯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도수를 살핀 홍의 여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죽은 사람과 관련이 있나 보군요.”

그 말을 뒤집으면 여인 또한 관련이 있다는 암시 아닌가. 주석하는 이 여인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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