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살검회 (3)
홍의 여인이 두 사람을 유심히 살피며 가까이 접근했다.
주석하는 그녀를 더 쳐다보고 싶었으나 여인의 싸늘함에 짓눌려 널브러진 시신과 격투 흔적을 조사하는 척했다.
주석하는 열심히 머릿속으로 여인의 정체를 추정해보았다. 곤륜파인가? 아니면 구대문파? 여인의 범상치 않은 외모와 기운으로 보아 절대 무명 소졸이 아니었다. 전생 오 년의 기억을 되살려 보았으나 붉은 옷을 입은 절세미녀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대는…… 이곳에 무슨 일입니까?”
추측을 포기하고 주석하는 반대로 질문했다. 홍의 여인은 그를 힐끔 봤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곤륜! 곤륜 외에…… 관련된 곳이 또 있어!”
도수가 여인의 눈치를 보며 주석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날 마교인을 공격했던 사람은 곤륜의 허윤과 설약 외에 가적성, 하홍운이 있었다. 즉 적어도 세 문파의 검초가 시신에 남아 있을 것이다. 거기에 주석하까지 넣는다면 모두 네 문파가 엮여 있었다.
“그런데…… 형의 몸에 난 검초와는 결이 좀 달라!”
“당신들은 누구죠?”
재차 같은 질문이 날아들었다. 다만 그 속에 담긴 서릿발 같은 차가움이 더 짙어졌다. 계속 적당히 뭉개기 어려워진 주석하는 포권을 취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소생은 흑검문의 주석하입니다. 이쪽은 살검회의 도수이고요.”
누군지 알겠다는 듯 홍의 여인의 표정에 변화가 일었다.
그 의미가 호의인지 적의인지 구분이 어려웠던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여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얼른 정체를 밝히라는 무언이 압박이었다. 사실 그가 자신을 소개한 이유도 여인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였다.
주석하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안면에 싸늘한 미소가 걸리는 찰나 산비탈 위쪽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검을 든 평범한 무사처럼 보였으나 입고 있는 옷은 신기하게도 흑의와 백의로 극명하게 대비됐다. 그들을 보는 순간 주석하의 온몸에 경고가 울렸다.
‘마…… 마교다!’
그렇다면 이 홍의 여인도 마교 인물이었던가? 그러잖아도 여인에게서 무형의 냉혹함을 느끼던 주석하의 몸이 확 굳어졌다.
흑과 백의 두 사람이 홍의 여인에게 보고했다.
“아가씨, 찾았습니다. 여기에서 이백 장 가량 떨어진 계곡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홍의 여인의 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주위를 압박했다. 그 기운은 사방을 얼려버릴 듯 강렬하여 주석하는 마치 북풍한설에 내몰린 것 같은 차가움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순식간에 주위에 추운 겨울이 도래한 듯했다. 물론 주석하가 느낀 기분이었지만.
‘어마어마한 고수다!’
주석하는 최근에 마교 인물을 보았을 때 느꼈던 직감이 이 여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미간을 좁혔다.
“사인은?”
“한쪽 팔이 잘려있었습니다. 피를 과다하게 흘려…….”
홍의 여인의 안면이 굳었다.
주석하는 누구를 의미하는지 금방 눈치 챘다. 그날 한 녀석이 설약에게 팔이 잘린 채 도망쳤었다. 다행히 멀리 가지 못하고 죽은 모양이었다. 이것은 그날 이곳에 그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들이 알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홍의 여인의 눈치를 봤다. 어느새 여인의 기운은 이전으로 돌아가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 휘몰아친 엄청난 기운으로 보아 홍의 여인의 무공은 그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높을 것이 확실했다. 지금 여인의 부하로 보이는 흑백 두 사람만 해도 그날 이곳에서 죽은 녀석보다 강해 보였다. 어쩌면 여인은 그 끔찍하게 강했던 마불과 맞먹는 고수일지도 모른다.
이 여인의 의심을 받게 되면 사실상 죽음이기에 주석하는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홍의 여인이 나지막하게 부하들에게 물었다.
“마불의 행적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도 죽은 게 확실하군.”
“설마 그렇겠습니까? 중원에 마불을 처리할만한 고수가 몇 명 있다고…….”
“그러니까 이 사건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홍의 여인의 확신과 달리 두 부하는 고개를 저으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사천에서 마불에 견줄만한 사람이라면…… 곤륜파나 아미파 장문인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재차 반론을 펼치던 백의 부하가 홍의 여인의 매서운 눈초리에 바로 입을 닫았다.
다시 홍의 여인의 시선이 주석하와 도수를 향하자 흑의 부하가 슬그머니 물었다.
“이들은 누구인지요?”
“신경 쓸 것 없다. 한 놈은 하수이고 다른 한 놈은…… 살검회라 사인과 전혀 상관없다.”
홍의 여인의 판단에 주석하는 왠지 모를 패배감을 맛보았다. 한편으로는 여인이 그의 몸속에 잠재된 내력을 눈치 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만일 그녀가 알았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홍의 여인의 살기 어린 시선에 주석하는 얼어붙은 듯 몸을 꼼짝하기 어려웠다. 싸늘한 눈빛을 보내던 여인이 더 차가운 음성으로 경고했다.
“이 사건에 끼어들지 말아요. 목숨을 아끼려면.”
주석하가 옆에 있는 도수를 보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 자식도 홍의 여인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인물인지 본능적으로 느낀 모양이다.
홍의 여인이 몸을 돌리자 흑백 두 부하도 두 사람을 노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주석하는 급히 소리쳤다.
“소저의 방명은 어찌 됩니까?”
이름도 아니고 별호도 아니고 방명이라니. 입을 여는 순간 주석하는 자신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칫 이 한 마디로 목숨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저만치 걸어가던 홍의 여인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힐끔 돌아봤다.
주석하의 안면이 본능적으로 굳어졌다.
“저요? 우설금.”
다행히 홍의 여인은 순순히 대답한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홍의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흑의와 백의가 수행하는 모습은 묘한 풍경을 연출했다.
주석하는 멍하니 홍의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겉보기와 달리 홍의 여인이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일까. 그녀의 미모에 홀린 것일까. 주석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야! 주 공자!”도수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제야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주석하가 흠칫 몸을 떨었다.
도수가 비웃음을 짓고 있었다.
“얼었네? 여인은 요물! 특히 미인은. 우리 형이 평소 여자를 밝히다가 결국 명줄이 짧아졌잖아? 주 공자도 조심해!”
틀린 말은 아닌데 괜히 기분이 나빠져 반박했다.
“그렇긴 한데 너도 마찬가지였어.”
“뭔 소리야? 난 너와 비교하면 절반도 안 봤어!”
“보긴 봤다는 소리네?”
“그야…… 예쁘니까!”
“네가 보기에 그 여자……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일 것 같아?”
도수가 한참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무공을 보지 못했으니 뭐라 할 수 없지만 그리 세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어휴, 싸늘한 한기가 휘몰아치는 것이……. 근데 수하 두 사람은 꽤 대단했어!”도수의 평가는 주석하와 달랐다. 살검회의 소회주인 도수의 무공은 상당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정확하게 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의 무공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누가 정확한지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우설금이라 했지? 이름이…… 진짜일까?”
“푸하하, 그야 모르지. 네놈 얼굴에 혹해서 이름을 알려줬나?”
도수가 주석하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며 마구 주물렀다.
주석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여인 때문에 얼어붙었던 안면 근육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의 얼굴 생김새는 나쁘지 않다.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주 좋다. 예전에도 남들이 풍류 공자라고 간주했을 만큼 훤칠했다.
중구난방으로 생긴 도수에 비하면…… 뒷말은 생략이다.
우설금이라……. 본명일 것 같다. 예쁜 이름의 미인을 보았으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얼음장 같은 차가움이 지금도 가슴을 시리게 하고 있으니…….
“그만 가자.”
그들이 장원을 떠나려 했을 때 파란 하늘에서 전서구가 날아왔다. 주석하는 전서구를 다루지 않으니 도수에게 온 연락이다. 하늘을 몇 바퀴 돌던 전서구가 도수의 어깨에 앉았다.
도수는 전서구의 다리에 묶인 작은 양피지를 빼냈다.
양피지를 읽던 도수의 안면이 확 일그러졌다.
“왜에에! 왜 하필 지금이야!”
“뭔데?”
은밀하고 중요한 내용일 테니 기대하지 않고 물었는데 도수가 곧바로 대답해주었다.
“으아아! 만혼문의 만혼문주를 죽이라잖아!”
별것 아닌 듯 중얼거리는 도수의 대답에 주석하는 충격을 받았다. 살검회는 살인 청부를 받는 조직이니 이처럼 청부 명령이 떨어지는 일은 그리 별스럽지 않다.
하지만 목표물이 만혼문주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만혼문은 이곳보다 훨씬 큰 동네인 성도의 대표적인 사파 문파였다. 만혼문주의 무공 또한 사천을 대표할 만큼 고강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더구나 그의 잔혹함은 강호를 경동시키기도 했다.
주석하가 판단하기에 감히 살검회가 상대할 규모가 아니었다.
“너…… 그런 거 나에게 알려줘도 되냐?”
“어때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반문하는 도수의 태도에 주석하는 할 말을 잃었다. 마치 주석하가 살검회에 소속된 것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가까스로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주석하는 재차 물었다.
“만혼문이라면 우리랑은 비교 불가한 거대 문파잖아? 그런 만혼문주를 네가 상대할 수 있어?”
“가소롭지!”
“네 실력에?”
“일단 만혼문주가 무공이 강하냐? 그 자식 외부에 알려진 것보다 별로야. 난! 난 살검회에서 최강 자객이거든. 내가!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청부를 수행하겠냐?”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도수의 태도에 주석하는 그를 다시 평가했다.
어쩌면 도수는 그의 평가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른다. 겉보기에 자유분방하고 신중하지 않은 소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잔인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살수가 분명했다.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흑검문이 무너지고 적혈방에 소속되어 구르기 시작하던 시절…… 만혼문주가 갑자기 살해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설마……. 그때 만혼문주를 죽였던 자객이 도수였던가?
“너! 비웃는 거냐? 내가 실패할 것 같아?”
“그게 아니라…….”
“젠장! 거짓말 마! 얼굴에 다 쓰여 있어. 하아! 우리 형 복수도 해야 하는데 바빠 죽겠네!”
복수란 말에 주석하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만혼문주를 살해할 실력자라면 자칫 이놈에게 걸리면 뼈도 추리기 힘들 것 같았다.
도수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가! 내가 바쁜 몸이거든! 일 끝내고 또 보자. 흑검문으로 놀러 갈 테니까 술 준비해서 기다려!”
주석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도수가 저편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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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법을 익히려는 주석하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헌책방에서 구해온 천하무적 내공 책자는 읽어본 결과 쓸모가 없었다. 살검회주의 평가처럼 정말 쓸모없는 책이었다. 흔한 토납법도 이보다 낫지 않을까. 실망한 그는 흑검문 서고에 비치된 무공서를 쭉 살폈으나 마땅한 책을 찾을 수 없었다.
심법을 포기한 주석하는 흑검육식의 연마에 매달리는 한편 수시로 흑검문이 담당한 여러 주루와 다루를 감독했다. 그 가운데 역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백화루였다.
이제는 백화루 앞에서 뻣뻣하게 목을 세우는 일이 그의 주요 일과가 됐다.
“쩝, 백화루가 내 것이었으면…….”
지금도 전생과 비교하면 나름대로 괜찮은 삶이지만 백화루의 주인이 되어 놀고먹는 미래의 꿈과 비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을러터진 미래를 그리며 오늘도 백화루 앞에서 목에 힘을 주고 있을 때 갑자기 주위가 싸늘해졌다.
“헉! 저 여자가 여기에는 또 왜…….”
피처럼 붉은 옷을 입은 여인, 바로 우설금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