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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12화 (12/273)

12화 살검회 (4)

그날 이후 며칠간 주석하는 우설금이란 인물을 조사했었다. 그녀의 소속이나 별호를 제대로 모른다고 해도 이상하게도 그녀의 이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그녀 정도의 미모라면 설사 무공을 익히지 않았더라도 유명 인사여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그에게 이름을 밝혔듯이 딱히 숨기거나 경계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수소문에 실패하자 주석하의 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그녀의 소속은 아무래도 마교일 것이다. 다른 문파에 비해 확실히 마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었으니까.

전생 때문에 마교라면 경기를 일으킬 듯 경계하는 주석하이기에 우설금을 본 순간 슬그머니 백화루를 떠나려 했다.

“이봐요!”

그날처럼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 싸늘한 기운이 가슴에 틀어박히는 기분이었다.

‘젠장! 얼어 죽겠다, 얼어 죽겠어…….’

괜한 불평을 터트리며 어쩔 수 없이 주석하는 몸을 돌렸다. 우설금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점소이가 손님을 대하듯 주석하는 공손하게 대응했다.

우설금의 표정은 평범했으나 주석하는 왠지 모를 한기를 느꼈다.

“음…… 이름이…… 주…….”

“주석하입니다만.”

“아, 네. 주 소협. 잠시 대화할 수 있을까요?”

예상치 못한 전개에 주석하의 몸이 굳어졌다. 이 여인이 그를 보자고 할 이유는 하나뿐이니.

곤란한 이야기가 될 듯하여 그는 우설금을 별채의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다행히 백화루를 돌봐주는 흑검문의 소문주라는 직책 덕분에 외진 자리를 쉽게 차지했다.

용정차를 주문해놓고 정원을 내려다보며 마주 앉았다.

주석하는 눈앞의 여인을 힐끔 훑었다. 타는 듯 붉은 색상의 옷이 그녀의 미모를 돋보이게 했다. 반면 여인에게서 은연중에 느껴지는 차가운 분위기가 그의 가슴을 오그라들게 했다.

사실 그녀에게서는 어떤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사람 같다. 실제로 그녀는 고수일 테니 그녀의 무공 경지가 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높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녀와 단둘이서 차를 마시는 시간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지만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는 마치 얇은 얼음판 위에 올라선 느낌이라 주석하는 숨이 막혔다. 절대로 미인 앞이어서가 아니라 목숨의 위협을 느껴서다.

“백화루를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인사를 받은 우설금이 거두절미 용건을 꺼냈다.

“이곳을 언제부터 맡으셨지요?”

“적혈방이 무너지고 관리가 흑검문으로 넘어온 후부터입니다.”

“그게 정확히 언제죠?”

숨길 일이 아니었기에 주석하는 사실대로 말했다. 다만 우설금의 다소 고압적인 태도가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에게 대항할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녀의 고강한 무공이나 살을 에는 차가움 때문이 아니라 손님에 대한 예의 때문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지만.

“그날 죽었던 사람들…… 이곳에서 본 적 있나요?”

“그건 왜 묻습니까?”

“이곳을 다녀갔던 것 같거든요.”

허윤 일행이 쫓기던 와중에 이곳에 잠시 머물렀으니 추적하던 마교인들도 아마 이곳을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우설금이 그 흔적을 발견했나 보다.

“전 그들을 본 적 없습니다. 물론 내가 보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항상 여기 있지는 않거든요.”

주석하는 사실대로 말했다. 그는 이곳에서 마교인을 본 적이 없었다.

우설금은 조금 실망한 듯했다. 그녀는 주석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주석하는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미녀의 사랑스러운 시선이라기보다는 뭔가 모를, 폐부를 찌르는 듯한 섬뜩함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마침 차가 전달되었기에 주석하는 그녀의 잔에 차를 따라줬다.

“드시지요.”

“향이 좋네요.”

우설금이 고운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붉은 입술로 후후 불었다. 그 모습만 보면 분명히 한 폭의 그림이었다.

주석하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그게 전부입니까?”

“흐음, 전부 관련 내용이에요. 그날 죽은 일행 중에 스님이 한 분 있었거든요.”

“그런데요?”

내심 뜨끔했으나 주석하는 개의치 않고 물었다. 어쩌면 그녀의 정체를 알아낼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 스님이…… 인근 객잔에서 죽었더라고요. 풍운객잔.”

풍운객잔이라는 말에 주석하의 안면이 얼어붙었다. 그의 반응이 이상하지 않았던 듯 우설금이 질문을 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 스님만 다른 곳에서 죽은 걸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까요? 난 그 스님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 스님은……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죠.”

마불의 강함은 주석하도 직접 경험해봤기에 충분히 공감했다.

“더 강한 사람이 죽였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만…… 그럴 만한 마땅한 인물이 없다는 게 문제죠.”

“그걸 나에게 말하는 이유가?”

“뭔가 아는 게 있나 해서요.”

다행히 우설금도 그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은 듯했다. 차를 음미하던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스님을 봤다면 금방 알았을 거예요. 겉보기에도 유달리 눈에 띄는 사람이니까요. 본 적 없죠?”

주석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어색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객잔 주인을 만났었는데…….”

그녀의 말에 주석하는 사레가 걸린 듯 기침을 터트렸다. 주인장을 남겨둔 것이 화근이 되었나. 그렇다고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엔…….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겁에 질려서 제대로 못 봤다고. 다만 상대가 젊은 남자였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를 그 주인장과 대면시키게요?”

그의 물음에 우설금이 피식 웃었다. 딱딱하게 굳었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지니 꽃이 만개한 것 같았다.

“호호. 본인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 그 스님을 해할 수 있는 자는…… 하여튼 대면은 물 건너갔어요.”

“왜요?”

“죽여버렸거든요.”

주석하는 입을 다물었다. 마교의 흔적을, 또는 그날의 사건을 숨기려고 주인장을 처리해 버린 듯했다. 얼핏 그녀에게서 느껴진 차가움이 바로 실감 됐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곳에 온 것도 비슷한 목적일까.

새삼 주석하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다.

정작 우설금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그들을 이곳에서 보지 못한 건 확실하죠?”

주석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추적하던 정파인을 이곳에서 본 것은 확실하고요?”

그날 허윤 등이 이곳에서 끼니를 때운 사실을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더라도 그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밝혀질 일인지라 숨길 수 없었다.

대답을 회피하는 주석하에게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들이 누구였죠?”

주석하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들 개개인을 알려주어야 할까.

“그들을 보긴 했으나 통성명을 하진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파라 사파인 저와는 친분을 쌓을 일이 없거든요.”

“흐음 그래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아름다움이 가히 살인적이었다. 물론 주석하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주석하도 물끄러미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나며 서로의 얼굴이 눈동자에 담겼다.

그의 안면이 굳어진 반면 우설금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문득 주석하는 자신의 주위를 은근하게 억누르는 기운을 감지했다. 이것은 절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정신적 압박이 아니었다. 실체가 있는, 내공으로 만들어진 기세였다.

우설금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점차 그녀에게서 피어나는 기운이 강해졌다. 그 기운은 마치 그녀와 그를 둘러싼 벽처럼 주위의 소음을 차단했다.

주석하는 긴장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사천일살과 마불이 떠올랐다. 그들의 압박을 받다가 반대로 죽였던 그 순간이 눈앞을 스쳐 갔다. 이 여자에게도 그것이 통하려나?

그는 단전에 잠재된 기운을 건드려보았다. 평소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은 마치 그 내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젠장, 꼭 죽을 위기가 되어야 실체를 드러내는 건가?’

그래서일까. 주석하는 죽음이 겁나지 않았다. 이미 한번 죽었던 몸이기도 했고 최근에 어떤 식으로든 죽을 위기를 잘 넘겨온 덕분이었다.

“난 그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호호, 그래요? 난 곤륜파 제자란 것은 알아요.”

두 사람의 무미건조한 대화가 오갔다. 우설금이 가하는 압박이 점점 심해졌다.

주석하는 내심 이를 갈았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녀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는 사천일살이나 마불을 대할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주석하는 주변 공기가 완전히 정체되어버린 기분을 느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기의 막이 주위에 처진 것은 확실했다. 잠시 후면 강기의 벽이 마치 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그를 압박해올 것이다.

정작 우설금은 그를 향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미소는 한 겨울에 핀 동백처럼 그의 가슴을 후볐다.

질식할 듯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주석하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콰앙-

측면의 창이 부서지며 세 인영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찌른 검이 두 사람을 동시에 향했다.

놀랍게도 세 인영이 휘두른 일검은 우설금이 쳐둔 강기의 벽을 맞고 튕겨 나갔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함에 주석하는 눈을 부릅떴다.

“크윽!”

놀라기는 세 인영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허공에 벽이 있는 것처럼 검의 움직임이 방해를 받았으니까. 그제야 암습자들은 눈앞의 두 사람이 상상불가의 고수란 사실을 깨달았다. 세 인영은 재차 공격할지 아니면 도망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멈칫했다.

그 순간 우설금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콰직-

세 인영이 마치 태풍에 휩쓸린 듯 방구석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놀랍게도 그들이 가진 검이 상대를 찔러 세 사람은 골육상잔의 참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한쪽 벽이 피투성이가 됐고 시체가 된 세 사람이 널브러져 있었다.

‘상상 이상이다!’

안면이 하얗게 질린 주석하와 달리 우설금은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주위를 압박하던 강기의 벽은 사라졌다. 주석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귀로 우설금의 친절한 설명이 들려왔다.

“그들은 적혈방 사람들이에요. 적혈방과 원한 있어요? 아! 있다고 했었지…….”

적혈방? 적혈방이 갑자기 왜? 적혈방에서 우설금을 공격할 리는 없으니 이들이 노린 사람은 그가 맞았다. 흑검문에서 적혈방을 흡수했으니 아직 남아 있던 잔당이 그를 공격한 모양이었다.

그제야 주석하는 우설금이 주변에 쳤던 강기의 벽을 의식했다. 그 벽이 그를 압박하려는 술수라 생각했더니 이들의 기습을 막으려는 방어벽이었던가.

주석하의 시선이 여전히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우설금을 향했다. 이 여인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불분명했다. 거기에 더해 이 여인의 상상할 수 없는 무공에 두려움이 일었다. 이 여인은 최소한 마불 이상이었다.

그렇다고 고맙다는 표현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찜찜한 눈초리로 그녀를 마주했다.

“얼마 전에 적혈방을 손봤더니 그 자식들이…….”

우설금은 대답 없이 차를 후루룩 비웠다. 그녀는 여유롭게 일어나서 주석하를 스쳐 가며 중얼거렸다.

“그 스님을 노린 자의 정체는…… 아마 곤륜 쪽이겠죠. 차 잘 마셨어요.”

주석하가 대꾸할 틈도 없이 우설금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주위를 맴돌던 한기도 어느새 소멸했다.

부서진 창과 죽은 적혈방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주석하는 한숨을 쉬었다.

“어째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잖아. 젠장! 장차 백화루를 소유하겠다는 목표를 바꿔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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