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살검회 (5)
백화루를 나온 우설금이 저잣거리를 걸어갈 때 그녀의 옆으로 흑의와 백의를 입은 두 사람이 붙었다.
“아가씨, 실마리를 알아내셨습니까?”
“아니, 별다른 점은 없었다.”
“왜 살려두셨습니까? 지금이라도 처리할까요?”
흑의를 입은 흑귀가 검병을 문지르며 살기를 드러냈다.
우설금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놓아 두거라.”
“지금까지 이렇게 살려둔 적은 없지 않으셨습니까?”
“녀석은 마불을 어떻게 할 무공이 없다. 이제 무공에 입문한 자와 다르지 않다.”
“하오나…….”
“굳이 죽여 이목을 끌 필요는 없겠지.”
그녀의 결정에 흑귀와 백귀는 불만이 많아 보였으나 다시 묻지 않았다.
거리를 걷던 우설금은 무심코 백화루 쪽을 다시 돌아봤다. 주석하를 왜 내버려 두었을까. 그자의 무공으로 보아 마불은커녕 그 수하를 죽인 사건과도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추격하던 곤륜파 제자 쪽의 정보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예전이라면 어떻게든 입을 열게 해서 정보를 얻고 마지막에는 당연히 죽였겠지. 오늘 백화루로 오면서도 당연히 이런 수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를 본 순간 그런 계획이 싹 사라졌다. 강기로 녀석을 짓눌러 자백을 받아 내거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을 하긴 했다. 그때 쳐들어온 적혈방 놈들이 상황을 비틀어 버리긴 했지만.
지금까지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본 기억이 없는 그녀에게 오늘 처리는 어찌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뭔가가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실체를 그녀도 몰랐다. 상대는 무공 고수가 아니었고 특별한 지위의 인물도 아니었다. 남녀 간의 호기심은…… 더더욱 아니었다.
‘생각을 말자. 다음에 만날 일도 없을 건데 뭘…….’
우설금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냈다. 주석하에 대한 호기심도 그녀의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개운한 마음으로 그녀는 흑귀에게 지시를 내렸다.
“흑귀! 이번 사건과 연관된 자들을 확인하라. 그 곤륜 제자와 그들을 노린 자들까지.”
이어서 그녀는 백귀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백귀! 우리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다. 이 일대에서 마불과 비등한 고수가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보거라. 마불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는 없지.”
우설금은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흑검문의 하루는 문하 제자들의 무공 수련에서 시작된다.
적혈방을 흡수한 후 문도 수가 대폭 늘었다. 그 덕분에 아침 식전에 연무장에 모여 수련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뤘다.
신옹은 흑검문에서 문주 다음으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장로였다. 그는 문주와 함께 흑검문을 세웠고 이곳 덕양에 자리 잡도록 토대를 닦았다. 현재의 흑검문은 사실상 그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옹은 문하 제자의 수련 장면을 관찰하면서 연신 혀를 찼다. 연무장을 채운 제자들의 복장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흑검문도는 모두 흑색 무복을 입었지만 적혈방에서 편입된 이들은 아직도 적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둘로 쪼개진 느낌이라 보기에 좋지 않았다.
“에휴, 돈이 없으니…….”
문파의 덩치는 커졌으나 아직 들어오는 돈은 이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미처 통일된 복장을 갖추지 못했다.
그는 연신 하얀 수염을 문지르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래도 수련 과정에서 터져 나오는 기합 소리가 흑검문의 밝은 미래를 의미하는 듯하여 기분이 삼삼했다.
그렇게 연무장을 돌아보고 있자니 가장 끝줄에서 낑낑대며 검을 휘두르는 인물이 보였다. 바로 주석하였다.
“소주님, 오늘 해가 서쪽에서 뜨겠습니다?”
신옹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는 주석하가 자진해서 무공을 수련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흑검문이 보잘것없는 흑도 문파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소문주인 주석하를 제대로 키워보려고 상당히 노력했었다. 어릴 때부터 영약을 많이 먹였고 무공도 가르쳤다.
하지만 정작 주석하는 무공을 열심히 익히지 않았다. 꾀를 부리기 좋아했고 성의도 없었다.
그 바람에 주석하의 무공 수준은 문도의 중간 정도였다.
“이제 나도 제대로 익혀보려고요.”
주석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검을 휘둘렀다. 지금 그가 펼치는 검법은 흑검육식. 흑검문도라면 누구나 익히는 기본 초식이다.
주석하는 열심히 수련하고 있으나 정작 이를 보는 신옹은 안면을 찌푸렸다. 주석하의 자세가 예상외로 엉성해서다.
“어떻게 사천삼살을 죽였는지…….”
신옹도 그 자리에 있었건만 사천삼살이 왜 죽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흑검문주의 말로는 어릴 적부터 먹은 영약이 갑자기 힘을 발휘했다는데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 검을 휘두르는 주석하를 보니 그날 사천이살의 검을 토막 내던 위용이 떠올랐다. 그 장면이 워낙 감동적이었던 탓에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소주님, 그날 부러트린 검, 기억하시죠? 지금 제 검을 힘껏 가격해보십시오.”
신옹은 검을 들고 주석하에게 손짓했다. 주석하도 그의 요구를 금세 알아들었다.
“어르신께서 다치실 텐데요?”
주석하가 거만하게 거들먹거리자 신옹이 웃으면서 재차 손짓했다.
“괜찮습니다. 그날처럼 힘껏 상대해보세요.”
신옹은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내력을 불어넣었다.
주석하도 사천이살을 상대하던 때를 떠올렸다. 자유자재로 그날을 재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력을 끌어올렸으나 단전에 숨은 녀석이 잠잠했다. 젠장!
앞에서는 손을 까딱거리면서 신옹이 얼른 공격하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주석하는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돌진했다.
“이야야얍!”
챙-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신옹이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신옹의 손에 들린 검은 멀쩡했다. 반면 주석하의 손에 잡힌 검은 뚝 부러져 반 토막이 나 있었다.
‘왜 엉뚱한 게 부러지냐…….’
혀를 차는 신옹의 앞에서 얼굴이 붉어진 주석하는 씩씩대며 변명거리를 찾았다.
“어르신, 혹시 흑검육식보다 더 좋은 검법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하지만 소주께선 아직 흑검육식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셨습니다.”
흑검문은 비록 내공심법은 보잘것없으나 검법은 평균 이상이었다. 흑검육식에 통달한 제자들은 그보다 더 고급 초식을 배웠다. 다만 신옹이 보기에 주석하의 수준은 아직 멀었다.
“앞으로 그걸 꼭 가르쳐 주세요.”
“알겠습니다.”
신옹은 마지못해 대답하면서도 혀를 찼다.
**
수련을 마치고 처소로 돌아온 주석하는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발견했다.
“어?”
핏자국은 그의 방안으로 이어져 있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백화루에서 벌어졌던 적혈방 자객들의 습격이 떠올랐다. 오늘도 놈들이 쳐들어온 건가?
주석하는 조용히 문 앞으로 다가가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진기를 끌어 모은 다음 문을 벌컥 열었다.
방안에서 뜻밖의 인물이 그를 맞이했다. 어둠 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은 바로 살검회의 둘째 공자인 도수였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주석하는 녀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왔어?”
도수는 침울한 안색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상의 곳곳이 베어지고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다쳤구나.”
도수를 살피던 주석하는 예상외로 부상이 심각해 보여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 도수의 반응이 이상했다. 도수는 그에게 전혀 시선을 돌리지 않고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실패했구나?”
만혼문주를 죽이라는 명을 받았다고 했던가. 그 만혼문이 꽤 위세를 떨치는 곳이니 만만찮은 임무라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쉽지 않았었나 보다. 온몸이 피투성이라니. 전생의 기억이 잘못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전생과 상황이 달라졌거나.
“괜찮아. 다음에 잘하면 되지.”
주석하는 녀석을 위로하려고 어깨를 토닥였다.
갑자기 도수가 울음을 터트렸다.
“으흐흑!”
이 녀석이 왜 이러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고 이런 반응이? 이건 책임감이 너무 강한 것 아닌가.
“왜 그래?”
“임무는 성공했어. 만혼문주를 저승에 보내버렸다고! 비록 다치긴 했지만…….”
“그런데 왜 그래?”
울음을 삼키면서 도수가 얼굴을 들었다. 눈물이 범벅된 안면이 처량하게 보였다.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른 도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살검회가…… 살검회가…….”
“살검회가 뭐?”
“하아, 씨불…… 와해됐어. 으흐흑.”
이건 또 무슨 이야기지? 갑자기 살검회가 왜 무너졌다는 걸까.
“아버지도 돌아가셨어. 나만 살아남았다고……. 만혼문주를 죽이는 임무로 나가 있는 바람에 나만…….”
주석하는 예상치 못한 소식에 할 말을 잃었다. 그의 기억에는 살검회가 붕괴되는 그런 사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몰랐었을 수도 있지만.
간신히 녀석을 달래면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살검회 최고 살수였던 도수는 어려운 임무를 자진해서 수행했다. 이번 만혼문주 살해 임무도 그가 아니면 해낼 사람이 없었기에 기꺼이 맡았다. 만혼문이 삼엄한 곳이고 문주의 실력이 예상을 넘었음에도 도수는 우여곡절 끝에 임무를 달성했다. 그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긴 했다.
문제는 돌아온 후였다. 임무를 마친 그를 환영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살검회는 강호에서 지워졌다. 무엇 때문인지 도수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짐작되는 것 없어?”
“아버지가! 아버지가…… 형의 죽음을 조사하고 있었다는 것 외엔……. 근데 그건 나도 마찬가진데…….”
문득 주석하는 우설금을 떠올렸다. 그녀는 무시무시한 여자였다. 마불의 죽음을 캐고 있었고 허윤 일행을 추적하고 있었다. 살검회주도 아들의 죽음 때문에 허윤을 추격하고 있다고 했던가?
뭔가 낌새가 왔다. 곤륜파라면 살검회를 그렇게 무차별로 죽이지 않을 것이다. 반면 우설금이라면? 싸늘한 성정에 마교인이라는 특성을 고려해보면 추격 도중에 우연히 만난 살검회를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우설금과 살검회가 우연히 만났을 상황이 그려졌다.
“으흐흐흑!”
그렇다고 도수에게 우설금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만일 도수가 원수를 갚겠다고 우설금에게 대들면 죽음뿐이니까.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자.”
주석하는 도수의 상의를 벗겨냈다. 옷은 이미 찢어진 부분이 많아 걸레 조각이었다.
도수의 등과 가슴팍을 살피던 주석하는 미간을 좁혔다. 녀석의 등에 난 칼자국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피가 서며 나오는 자상부터 딱지와 흉터가 앉은 오래된 자국까지 마치 등이 칼자국 난 나무 도마를 닮았다.
‘이 녀석은…… 그동안 수없이 생사를 넘나들었구나.’
새삼 존경스러웠다. 그 자국을 보는 순간 주석하는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 편하게 수련해온 것이 아닌가 반성했다.
주석하는 젖은 수건으로 핏자국을 닦아냈다. 아직 피가 채 마르지 않은 상처도 꽤 많았다. 만혼문주를 살해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익히 짐작됐다.
“적당히 하지…….”
“자객에겐 ‘적당히’란 없어! 임무를 실패하는 순간 내가 죽어! 아, 참!”
도수가 떨어진 자신의 상의를 가리켰다.
“선물 가져왔어.”
옷자락 속에서 책자가 하나 나왔다.
“만혼문에 들어갔는데 딱 있었어. 내공심법에 관한 책인데…… 너에겐 아직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지만…….”
이 녀석은 선물을 주더라도……. 주석하는 낡은 책자를 뒤적였다.
“경혼심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