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4화 (14/273)

14화 백호사협 (1)

낡은 책자는 이름으로 추측하면 내공 관련 책이 분명했다. 다만 어째 이름이 좀 불길하게 느껴졌다. 경혼심법(驚魂心法)이라니.

내공을 다루는 심법은 무공의 근간이어서 이름있는 정파의 심법은 사실상 구하기 어렵고 사파의 심법은 정심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었다.

현재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무조건 배척할 일은 아니었다. 가져온 도수의 성의도 있고.

“이름! 이름이 좀 섬뜩하긴 한데…… 이름처럼 대단할 것 같진 않고, 하지만 그 천하무적 내공인지 뭔지 하는 책자보다는 훨씬 낫지.”

“이름에선 오히려 쳐 발리는데?”

주석하는 감동해서 도수의 상처 난 곳을 더 정성껏 닦아주었다. 위험 속에서 남을 챙긴 도수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혹시 이 책자를 훔치다가 다친 거냐?”

“그럴 리가. 네놈이! 네놈이 뭐가 귀엽다고!”

툴툴거리는 녀석을 보니 아무래도 사실일 듯했다. 제멋대로인 성격은 도건이나 도수나 비슷했지만 두 사람은 판이했다. 도건은 양아치 그대로인 반면 도수는 의외로 분별이 있고 사려가 깊었다.

도건의 죽음에 그 책임이 없지 않은 주석하는 제 발이 저렸다. 그래서 제안했다.

“너, 이제 갈 곳은 있냐?”

도수는 말이 없었다. 살검회가 무너졌으니 당연히 의지할 곳이 사라졌을 것이다. 내버려 두면 복수한답시고 곤륜파에 가서 땡깡을 부리거나 살검회 내막을 파헤치다가 우설금에게 걸려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설사 살아남더라도 앞으로 자객이나 낭인의 삶을 전전하겠지. 전생의 그처럼.

이 녀석이 그렇게 망가지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도건의 죽음에 영향을 미친 그의 책임을 어떻게든 무마하려는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당분간 여기 머물러라. 몸도 성치 않잖아?”

“오오오! 그래도 되냐?”

이런 제안은 원래 예의상 한번은 사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오히려 주석하가 뜨악했다.

“이 책자 가져온 것만 해도 그게 어디야? 심심하면 무공도 좀 가르쳐주고.”

“우아아! 그건 귀찮은데…….”

피식 웃는 녀석을 보니 싫지 않은 듯했다.

주석하는 앞으로 절대 우설금과 이 녀석이 마주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흑검문에서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바로 주석하의 제안 때문이었다.

흑검문주와 장로인 신옹, 그리고 적혈방에서 넘어온 흑검자까지. 세 사람은 주석하와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네 말은 살검회의 자객 스무 명이 우리 문하에 투신한다는 뜻이냐?”

“전부 자객은 아니지만…… 하여튼 받아들여 주신다면요.”

주격의 질문에 주석하는 살검회의 상황을 설명했다.

“허허, 너 좋을 대로 하거라.”

주석하의 부탁이라면 아무 생각이 없는 주격을 신옹이 재빨리 저지했다.

“살검회 둘째 공자의 의견입니까?”

“네, 청부업에 특화된 자들이라 쓸모가 있을 겁니다.”

흑도 문파인 흑검문은 자객이 모인 살수 집단이 아니다. 또, 살수 집단은 평범한 흑도가 아니다. 그들은 생사의 극단을 걷는 자들이다.

“혹시…… 살검회가 어떻게 망했는지 아십니까?”

이번에는 흑검문의 새로운 책사라 스스로 자부하는 흑검자가 걸고넘어졌다.

“모르는데요?”

주석하는 도건의 죽음이나 우설금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자칫 화근이 될지도 모릅니다.”

신옹조차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잖아도 최근에 적혈방 문하생을 받아들여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때 새로운 사람, 그것도 자객집단을 받아들이면 문파의 안정에 도움 되지 않는다.

만일 살검회가 타 문파의 원한을 사고 있었다면 그 은원이 흑검문으로 전부 넘어올 가능성도 있고.

“막말로 앞으로 살인 청부를 받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신중한 신옹의 의견은 타당했다. 흑검문은 살인 청부업에 뛰어들 생각이 전혀 없다.

불리하다고 생각한 주석하가 흑검자에게 눈치를 줬다.

‘헉! 저건 소문주께서 나를 발라 버리겠다는 선전포고?’

찔끔한 흑검자가 바로 태도를 바꿨다.

“꼭 같은 일을 시킬 필요는 없지요. 자객은 기본적으로 훈련이 잘 되어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그만한 능력자를 쉽게 구할 수 없지요. 살검회에서 갈고닦은 인물이라면 앞으로 문파의 성장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겁니다.”적혈방의 침입 이후 주변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덕양은 무풍지대였다. 정파와 사파, 각 문파의 대립이 수면 아래에서 잠자고 있었다. 그 평화가 최근 들어 갑자기 깨진 느낌이다. 물론 그 원인이 흑검문 때문이긴 하지만.

“흑검문의 미래를 생각하십시오. 현재에 안주하겠다면 살검회 사람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세력과 규모를 더 키울 작정이라면 이것은 좋은 기회입니다.”흑검자가 재차 상황을 정리했다.

사실 지금까지 주격은 흑검문의 유지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붓고 있었다. 흑검문은 주변 타 문파 대비 무공 수준이 낮았고 이렇다 할 고수가 부족했다. 문주인 주격의 무공도 보잘것없었다.

지금까지 문을 닫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처세술 때문이었다. 다른 문파를 자극하지 않고 이권에서 한발 물러서는 등 위험한 일을 삼갔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난번처럼 적혈방 습격을 피할 수 없었다.

흑검문의 미래가 달려 있으니 주격이 고민해야 하지만…….

“석하가 어련히 알아서 판단하지 않았겠소?”

아들을 감싸는 주격의 한 마디에 신옹의 한숨이 깊어졌다.

사실 주석하는 심층적으로 검토하지 않았다. 살검회가 무너지고 부모를 잃은 도수가 불쌍해서, 또 그 일부 책임을 느꼈기에 이곳에서 머무르라고 했을 뿐이다. 그랬더니 도수가 오갈 곳 없는 살검회 사람들이라며 대충 스무 명을 데려왔다. 그 바람에 이런 문제가 터졌다.

전생을 생각해보면 흑검문의 생존을 위해서도 세력 확장이 필요했다. 다만 그것은 정말 생존 때문이지 문파를 더 키우려는 목적은 아니다. 자칫 사천성을 대표하는 흑도 문파가 되면 훗날 정사대전이나 마교와의 전쟁에 불려갈 위험이 커지니까 오히려 막아야 한다.

주석하를 향한 주격의 애정을 확인한 흑검자는 재빨리 신옹을 설득했다.

“허허, 소문주께서는 흑검문을 키우고 싶은가 봅니다. 젊은이다운 패기가 돋보입니다. 문주님께서도 이 기회에 덕양에서 새로운 패권을 잡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물론 실제 의도를 완전히 잘못 짚었지만, 도수를 받아들이는 결과는 같았다.

신옹이 찜찜한 눈초리로 주석하를 의심했다. 주석하에게 저런 야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주석하는 쐐기를 박기 위해 도수가 가져온 무공서를 꺼냈다.

“도수가 이 비급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만혼문에서 가져왔다는데 혹시 아십니까?”

“오오! 도수가 우리 아들을 위해?”

주격이 경혼심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감탄만 연발하며 신옹에게 넘겼다. 신옹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심법은 조심해서 익혀야 합니다. 본인의 기질이나 익힌 무공 초식과 잘 맞아야 하며 내공을 쌓기에 얼마나 유리한지 따져봐야…….”

물론 그렇게 따지기만 하다가 흑검문은 지금까지 변변한 심법이 없는 문파가 됐다. 심법 이름도 이상해서 신옹이 거절하려는 순간 흑검자가 또 뛰어들었다.

“소인이 들어본 바 있습니다. 대략 일백 년 전 사천 일대에서 이름을 날린 경혼곡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일반 무인이라면 알지 못할 작은 문파였다. 당연히 흑검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경혼곡이 다른 분야는 몰라도 내공 면에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이 비급을 보니 그곳에서 흘러나온 물건이 확실합니다. 이 비급을 연구해서 우리 흑검문의 기초 심법으로 삼으면 어떻습니까?”흑검자의 고언에 주격의 귀가 솔깃했다. 이 기회를 활용하면 심법 문제를 해결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 제가 지난번부터 심법을 찾지 않았습니까?”

“그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려무나. 난 찬성이다.”

주격은 바로 주석하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신옹은 걱정으로 안색이 어두워졌다.

경혼곡 이야기가 진실일까? 주석하는 흑검자의 임기응변에 감탄했다.

**

덕양의 사파에 흑검문을 비롯하여 적혈방, 살검회, 혈랑곡이 있다면 이에 상응하는 백도 문파도 존재한다. 그 백도 문파 가운데 중간 정도의 세력을 유지하는 곳으로 백호문이 있었다.

백호문은 적혈방과 저잣거리를 두고 이권 다툼을 하던 문파로 덕양 일대의 무관에서 문도를 받아들였다. 백호문 제자들은 덕양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적혈방이 무너졌으니 우리도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정중하게 건의했다. 바로 백호문의 책사인 현현자였다.

그의 앞에는 각진 턱에 네모난 얼굴을 한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백호문을 이끄는 문주, 백호신룡 선우학이다.

그들은 최근 들어 덕양의 기존 질서가 변하자 고민을 거듭했다. 적대 관계에 있던 적혈방이 무너지니 한편으로는 숨통이 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흑검문으로 통합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백호문은 주로 적혈방과 대립해 왔기에 그보다 세력이 약한 흑검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책사께선 지금이 기회라 보십니까?”

“그렇지요. 막말로 우리가 흑검문에 뒤진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현현자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전의를 부추겼다.

선우학은 현현자의 건의를 바로 꿰뚫어 봤다. 세력을 유지하려고 적혈방과 끊임없이 다툼을 벌였던 기억이 있기에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덕양은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다. 근래 십여 년 동안 이보다 세력 확장에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문주님, 대의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이곳 덕양에서 흑도 무리를 모두 소탕할 기회입니다. 그동안 덕양 주민들이 흑도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그들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뢰한이지요. 정의란 이름을 걸고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합니다.”현현자가 대의를 들고 나왔다.

정파가 일을 벌이려면 대의가 필요하다. 흑검문을 처리하는 일은 대의에 부합했다. 두 사람은 덕양에서 흑도 문파가 사라지면 얼마나 살기 좋은 마을이 되는지 침을 튀겨가며 의견을 교환했다.

“지금이 바로 흑도 세력이 가장 약해진 때입니다. 적혈방이 무너졌으니 남은 것들은 오합지졸이지요. 살검회도 없으니 자다가 목을 걱정할 이유도 사라졌고요. 막말로 흑검문이라면…… 힘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거듭된 현현자의 권고에 선우학이 마지못해 수긍했다. 사실 이 대화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마음을 굳혔지만 바로 수락하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게다가 흑검문을 치려면 켕기는 점이 있어서 이제야 찬성하는 척했다.

“좋습니다. 책사께서 주장하시니 그게 바람직한 길이겠지요. 그럼 흑검문을 처리하려면…… 다른 정파 문파에도 알려야 할까요?”

현현자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어이쿠, 그런 말씀 마십시오. 죽 쒀서 개 줄 일 있습니까?”

“그럼 우리 혼자서 독자적으로 처리해야 하는데요?”

“당연하지요.”

정의를 앞세웠지만 흑검문을 도모하는 이유는 별다를 게 없다. 오로지 이권 때문이다. 타 문파와 연합하면 이권을 나눠야 하니 절대 반대다.

선우학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최근 적혈방이 관리하던 영업장을 흑검문이 대부분 흡수했다지요?”

“그렇습니다. 적혈방을 무너트린 곳이 흑검문이니 그곳에 우선권이 있었지요. 이제 그 모든 이권이 우리에게 떨어질 겁니다. 솔직히 주루 하나 얻으려면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합니까?”문파의 재정은 문하 제자를 기르면서 받는 기부금과 마을의 각종 이권 다툼에 끼어들어 버는 돈으로 유지된다. 그렇다 보니 영업장을 많이 확보할수록 유리했다. 이는 정파나 사파나 차이가 없었다.

“흑검문에 고수가 있습니까?”

“고수요? 푸하하! 당연히…… 없지요. 흑검문 사정을 우리도 빤히 들여다보지 않습니까?”

그 대답으로 모든 것이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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