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백호사협 (2)
현현자의 확신에 선우학은 미간을 모았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원래 적혈방은 흑검문보다 무력이 우세했다. 백호문과 비교하면 적혈방은 막상막하였지만 흑검문은 언제라도 무너트릴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까지 흑검문이 무사했던 이유는 굳이 처리할 생각이 없었던 데다 다른 흑도 문파의 눈치를 봐서다.
지금은 흑검문과 동맹을 이루던 적혈방이나 살검회가 사라졌으니 더는 흑검문을 내버려 둘 이유가 없다.
“그런데…… 적혈방이 왜 무너진 거지요? 적혈방이 흑검문을 습격했다고 하던데…… 혹시 그 반대였습니까?”
그제야 선우학은 찝찝했던 부분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혈방이 무너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흑검문을 칠 결정을 내릴 마지막 단계라 생각한 현현자가 확고한 목소리를 냈다.
“떠도는 소문은 많습니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야지요. 두 문파가 붙었던 날에 사천일살이 개입했나 봅니다. 사천일살 아시지요?”사천 일대에서 위명을 날리던 고수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요?”
“사천일살이 그 싸움에서 죽었습니다. 이를 합리적으로 추론해보면…… 아마 흑검문에서 사천일살을 초빙해서 적혈방과 싸운 것 같습니다. 원래 두 문파 사이에 시비가 붙었는데 적혈방이 응징하러 간다고 하자 그 시점에 맞추어 흑검문에서 사천일살을 초빙한 것이지요.”고수로 알려진 사천일살을 흑검문에 붙이니 얼추 세력 균형이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보면 결과가 이해됐다. 적혈방 수뇌부는 사천일살에 의해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흑검문은 완전히 어부지리였던 셈이다.
“좋습니다. 그럼 정의를 앞세워 흑검문으로 몰려갈까요?”
선우학의 말에 현현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일은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습니다. 그게 희생도 적고요. 백호사협을 보내면 어떨까요?”
“아! 백호사협!”
백호사협(白虎四俠)은 백호문에서 최강자로 군림하는 네 사람이었다. 이들 네 사람의 무력은 백호문 무력의 절반에 해당했다. 그만큼 이들의 고강한 무공은 덕양을 넘어 사천에서 이름이 높았다.
“흑도만 자객을 보내란 법 있습니까? 아, 자객이 아니라…… 우리가 보내는 이들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건 협사들이죠. 조용히 흑검문 문주를 포함해서 주요 인물만 처리하면 나머지는 오합지졸입니다. 큰 희생 없이 흑검문을 무력화해야 강호인들이 문주님의 덕을 칭송할 겁니다.”그러잖아도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려니 심적 부담이 컸었는데 현현자의 작전은 선우학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하하, 좋습니다. 이 일만 성공하면…… 덕양의 모든 이권을 우리가 가져오겠군요.”
“백호문이 덕양을 넘어 사천 최고 문파가 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현현자가 엄지를 척 올렸다.
두 사람은 세부 작전을 세우며 머리를 맞댔다. 사실 작전이랄 것도 없었다. 그만큼 흑검문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
주석하는 비급을 째려보고 있었다.
바로 경혼심법이다. 심법이란 무공은 검법이나 장법, 지법에 비해 높은 이해를 요구한다. 때로는 고차원의 심득이 필요하기도 하다.
문제는 주석하가 지금까지 읽은 무공서가 사실상 거의 없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하아, 좀 쉽게 써놓지. 이걸 누가 보라고…….”
불평해봐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심법을 창안한 사람이 옆에 있다면 몇 대 패주고 싶었다.
심법 구결을 떠올리다 고개를 젓던 주석하는 원군을 찾았다. 그리 넓지도 않은 방안에 그를 도와줄 유일한 인물인 도수가 한쪽 구석에 보였다. 도수를 확인한 주석하의 미간이 바로 찌푸려졌다.
도수는 가부좌를 튼 채 검을 허벅지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것도 검집을 버리고 검신을 드러냈다. 그 검신 위를 손으로 쓱쓱 더듬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하아, 여자를 더듬고 있으면 이해하지, 저게 대체 무슨 짓이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전에 도수에게 물어봤더니 저런 자세로 검법의 심득을 깨친다고 했던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주석하는 질문을 그만두었다. 심득을 얻으려면 연무장에서 열심히 검을 휘둘러야지 저게 무슨 짓인지.
이건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기 싫어 지어낸 변명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막말로 아랫배를 더듬으면 심법의 심득이 깨우쳐지나? 차라리 기루에 가고 만다.
어쨌든 도수를 보고 있자니 숨이 턱턱 막혔다. 검에 다칠까 염려되는 게 아니라 묻고 싶은 것을 묻지 못해서다. 경혼심법 책자와 도수를 번갈아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도수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흐억!”
괜히 찔린 주석하는 비명을 가까스로 손으로 막고 도수에게 눈짓했다. 도수의 입이 열렸다.
“뭐, 뭐지? 또 막혔어?”
주석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혼심법의 한 구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수가 검을 쭉 뻗어 책자를 끌어당긴 다음 해당 부분을 바로 해석해줬다.
“이건…… 백회혈로 들어온 외기를 임맥을 통해 아래로 흘리란 거잖아? 즉 외기를 순화하여……. 으흠, 말을 말자.”
“다른 심법도 그렇지 않나?”
주석하가 말하는 심법은 헌책방에서 구한 천하무적 내공심법이다.
“그게! 그게 아니야. 이 부분이 다르잖아!”
“뭐가 달라?”
주석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스승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다고 알아들어야 한다. 그나마 도수의 가르침이 도움이 되긴 하니까.
처음에는 신옹에게 비급 해석을 부탁했었다. 하지만 불과 이틀 만에 바로 포기했다. 신옹의 잔소리가 귀를 뚫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릴 때 게을러서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것과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까지 한꺼번에 책망 받으니 견디기 힘들었다. 괜히 꼰대 소리를 듣는 신옹이 아니었다.
“흐음, 이게 그런 뜻이란 말이지…….”
그나마 도수는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조금 귀찮아하는 모습이 역력하긴 했지만.
“그럼 이건?”
“그건 말이지…….”
그에게 뜻을 설명해주던 도수가 벌떡 일어났다.
“난 연무장 간다!”
이 자식이 갑자기 심득을 깨치는 방법을 바꿨나? 아니면 질문이 귀찮아진 건가?
주석하는 가자미눈을 뜨고 녀석을 노려보다가 몸을 들썩였다.
“그래, 먼저 가 있어.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오, 오지 마라!”
어차피 주석하도 흑검육식을 연마해야 하기에 방에 틀어박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홀로 남은 주석하는 경혼심법을 운용해보았다. 원래 그의 것인 한 줌 내공은 의도대로 혈맥을 돌았다. 하지만 단전에 잠재된 내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 시도해보던 주석하는 포기하고 검을 들었다. 심법을 고민하느니 검법을 익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다.
**
흑검육식을 몇 차례 연마하던 주석하는 금세 지겨워졌다.
그는 옆에서 땀을 흘리는 도수를 관찰했다. 과연 녀석의 검법은 살수답게 간결하고 예리했다.
저 녀석은 어릴 때부터 저렇게 열심히 수련에 매진했겠지? 무시무시한 실전도 셀 수 없이 경험하고. 녀석의 등에 나 있던 칼자국이 다시 떠올랐다. 역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 법이다.
서걱-
도수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 대나무가 사선으로 잘렸다.
손뼉 치던 주석하는 슬그머니 도수에게 다가갔다.
“수! 그 검으로 공격해볼래?”
“오오오! 막을 수는 있고?”
도수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녀석의 이런 반응은 익히 예상했던 바다.
지금 주석하는 몸속에 잠재된 내공이 활성화된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천일살과 싸울 때 목숨의 위협을 받아 죽기 직전에야 내공이 되살아났다. 마불에게 위협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우설금과 함께 있을 때 벌어진 적혈방의 기습은? 내공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순간적인 위협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는 걸까. 그날 우설금이 아니었다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나.
“어쨌든 나를 찔러봐.”
“죽을 텐데?”
도수가 검신을 훑어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잘린 대나무 앞으로 성큼성큼 가더니 몇 차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순식간에 죽검이 만들어졌다.
허리춤에 진검을 꽂은 도수는 오른손에 죽검을 들고 벼락처럼 주석하에게 달려들었다.
정말 빨랐다. 자객 출신이어서일까. 죽검이 코앞에 이를 때까지 주석하는 자신의 검을 빼지도 못했다.
뻐벅-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주석하는 죽검에 두들겨 맞았다. 죽검에 찔린 옆구리에 통증이 엄습했다.
“푸하하! 아파?”
“다시!”
주석하는 호기롭게 외쳤다.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도수는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주석하의 부탁을 재차 수행했다.
이번에는 주석하가 제대로 대응했다. 주석하는 흑검육식을 펼쳐 죽검을 막았다.
뻐벅-
주석하의 검에 공격이 막힌 죽검이 방향을 전환하며 그의 몸을 두들기고 지나갔다. 도수의 검법은 주석하가 상대할 수준을 넘어섰다.
‘젠장!’
주석하는 내심 욕설을 퍼부었다. 벌써 두 번이나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음에도 단전의 내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꼭 죽을 정도가 되어야 깨어나다니!
휘리릭-
죽검이 변화를 일으키며 다시 그를 공격해 들어왔다. 주석하는 전력을 다해 죽검을 막았다.
쾅-
내력을 불어넣은 죽검은 주석하의 검과 부딪혀도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오히려 두 검이 만나자 그 충격파가 주석하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검술에서도 차이가 컸지만 역시 내공에서의 차이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한쪽은 죽검이고 한쪽은 진검이건만 주석하의 충격이 훨씬 심했다.
“으윽!”
견디지 못한 주석하가 뒤로 물러서자 곧바로 도수가 따라붙었다.
퍽- 퍽- 퍽-
다시 두 사람의 검이 어지럽게 어울렸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난전이었다.
신랄한 도수의 공격은 주석하의 몸 곳곳을 타격했다. 내력이 실린 죽검은 순식간에 주석하를 녹초로 만들었다.
몇 초식이나 지났을까.
“아오! 씨불!”
그때 주석하의 단전 내부에서 기운이 꿈틀거렸다. 그 기운은 갑자기 폭발적으로 일어나 온몸을 일주천하기 시작했다. 놀란 주석하는 재빨리 경혼심법을 운용했다.
‘오오! 반응이 있어!’
지금까지와 달리 강력한 기운이 조금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길들이지 않은 말이 흥분해서 제멋대로 날뛰는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흥분에 휩싸였다. 그의 의지대로 내력을 운기하기는 지금이 처음이었다.
퍽- 퍽-
두 사람의 검이 다시 부딪치며 충격파가 일었다. 주석하는 내력을 검에 실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 검에서 검명이 일었다.
도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검이 부딪치는 순간 이전과 다른 충격파가 전달된 것이다. 갑자기 둔중한 기운이 죽검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그가 아는 주석하의 내공을 참작한다면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뭐지?”
의문을 풀 시간도 없이 주석하가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강력한 기세에 도수는 지금까지처럼 경시하지 못하고 검에 더 많은 내력을 불어넣었다. 이제는 평범한 죽검이 아니었다. 강철로 만들어진 진검 못지않은 위력이 실현됐다.
묵직한 두 검이 허공에서 만났다.
콰앙-
“흐허헉!”
생각지도 못한 파괴력에 도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무려 내력을 불어넣은 죽검이 평범한 대나무처럼 쫙 쪼개졌다.
주석하의 검은 그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재차 위협이 들어오자 도수는 보법을 밟아 옆으로 피하며 허리춤의 진검을 꺼냈다. 그 검은 묵직한 위력을 동반한 주석하의 검을 힘껏 가로막았다.
챙-
도수가 주석하의 검을 진검으로 막는 순간 마찬가지로 충격파가 일었다.
놀랍게도 도수의 진검마저 뚝 부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