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백호사협 (3)
“우와와!”
도수는 부러진 검을 살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내력이 주입된 검은 웬만한 충격에는 부러지지 않는다. 천하의 명검이거나 더 강한 내력이 주입된 병기가 아니라면 절단할 수 없다.
지금 주석하가 휘두른 검은 저잣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싸구려 검 아닌가. 게다가 주석하의 내력은 그도 알 듯 불과 한 줌이다.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도수는 멍한 상태로 주석하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석하는 검을 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경혼심법을 떠올리며 내부에 들끓는 내력을 제어하려 애썼다. 간신히 내력을 검으로 보냈던 그는 이제는 심법 구결에 맞춰 운기를 시도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내력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도처럼 혈맥을 일주천하면서도 그가 인도한 방향을 일부 따른다는 사실이었다. 예전처럼 어디로 튈지 몰라 전혀 제어할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고오오오-
내력을 사지 곳곳으로 순환시키고 다시 손에 들고 있는 검으로 보냈다. 검신에 흐릿한 기운이 어렸다. 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고수라면 모를 수 없다. 이게 바로 검기의 시작임을.
“으허헉!”
도수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눈앞의 현상은 엄청난 고수만이 보일 수 있는 경지가 아닌가.
한참 동안 내력을 제어하느라 고생한 주석하는 단전에서 꿈틀거리는 엄청난 내력 때문에 고민에 잠겼다. 예전처럼 이상한 낌새가 감지됐다.
그의 단전에 잠자는 내력은 한 종류가 아니었다. 두 종류도 아니었다. 얼핏 다섯 가지로 추정되는, 서로 성질이 다른 내력이 잠자고 있었다. 지금 경혼심법에 의해 그나마 조금이라도 인도되는 내력은 한 종류뿐이었다. 나머지는 여전히 죽은 듯 잠자고 있었다.
한 사람의 몸 내부에 어떻게 여러 종류의 기운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어쨌든 한 종류라도 미약하나마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주석하는 눈을 번쩍 떴다.
“봤냐?”
“너! 너, 대체 뭐야?”
도수가 부러진 검을 흔들며 다가왔다.
“왜? 검 사달라고?”
“으아아! 그 말이 아니라…….”
“경혼심법이 제대로 먹혔어.”
“응?”
“드디어 내력이 운기되기 시작했다고.”
“뭔 말이야? 어차피 한 줌 내력이면서. 그리고 그 경혼심법, 그리 좋은 심법 아냐.”
“크하하! 아니어도 쓰기 나름이지!”
주석하는 검으로 땅을 짚고 호탕하게 웃었다.
“미친놈……. 나만 미친 줄 알았더니…….”
도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러진 검과 대나무를 정리했다. 그 와중에도 경혼심법을 잘못 판단하고 있지 않은지 고민에 잠겼다. 아무래도 경혼심법을 그도 한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
**
어둠이 내린 흑검문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흑검문은 덕양의 외곽에 세워진 큰 장원이 중심이었다. 이 장원에는 흑검문의 주요 대소사를 처리하는 가장 큰 전각을 중심으로 문도들이 머무는 여러 별채와 소규모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주석하가 거주하는 처소는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해있었다.
지금 그 전각 지붕을 네 사람이 올라탔다. 검은 옷에 검은 두건까지 쓰고 있어 그들의 존재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기와지붕의 용마루를 타고 앉아 주위를 살폈다.
“이거…… 검은 옷이 영 마음에 안 드는군.”
“어쩌겠나? 그렇다고 백도의 상징인 흰옷을 입을 수는 없지.”
이들은 백호문에서 파견한 백호사협이었다. 흑검문의 주요 인사를 처리하라는 특명을 받고 달이 없는 야밤에 잠입했다.
“흑도 놈들은 시커먼 옷을 어떻게 입지? 옷이 검으면 잘생긴 얼굴이 바래져서 말이야.”
“으이그, 네놈이 잘 생겼냐? 나야말로 검은 옷을 입으니 영 볼품이 없어.”
이들은 한가롭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예정 시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그들의 목표물은 모두 셋. 흑검문을 책임진 문주와 권력 중심에 선 장로 신옹, 그리고 소문주였다. 그들이 듣기로는 이 셋 모두 무공 수준이 변변찮다고 했기에 전혀 긴장감을 느끼지 않았다.
흑검문 전체를 상대할 것도 아니고 목표 셋만 재빨리 죽인 후 이곳을 빠져나가면 임무는 완성이다. 흑검문 병합은 날이 밝으면 백호문주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정체를 숨기려면 어쩔 수 없어. 백호문이 몰래 습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손가락질을 받을 테니까.”
“나도 알아. 그래서 기꺼이 시커먼 옷을 입었지. 걸리면 적혈방이나…… 하여튼 흑도인이 저질렀다고 위장해야 하니까.”
백호사협은 오늘 밤의 기습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공명정대하다고 자부하는 정파에서 이런 일을 벌이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사악한 흑도를 상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변명했다.
그들은 가끔 남의 이목을 속이고 사파도 꺼릴 공작을 뒤에서 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것으로 이 세상이 평화로우면 충분하지 않는가.
“첫 대상이 누구였지?”
떠날 때 이미 작전을 짜두었다. 습격은 적군 가운데 가장 강한 놈부터 순차적으로. 흑검문에서 가장 강한 자는 아무래도 문주이겠지?
“문주이긴 한데…….”
한 녀석이 멀리 떨어진 중앙 전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귀찮아.”
“최근 소문에는 문주가 아니라고도 하고.”
“문주가 아닌 거야?”
“적혈방이 침입했을 때 소문주가 다했다는 소문이 있어.”
“그건 와전된 거라고…….”
“……그렇긴 한데.”
그들은 결정 장애에 빠졌다. 첫 목표물을 어떻게 잡느냐는 이 작전의 성패를 가늠할 중요한 요소다. 절대 기분대로 선택할 수 없다.
“마침 여기가 그 소문주란 놈의 거처인 게 문제지.”
백호사협은 자신들이 올라선 전각을 살폈다. 바로 아래에 목표물이 있다니 더욱 조심스럽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기 갔다가 돌아오려니 짜증나기도 하고…….”
이곳에서 중앙 전각까지는 만만찮은 거리였다. 다시 지붕을 내려갔다가 올라가는 일이 무척 귀찮았다.
“어차피 누구든 고만고만해서 대세에 지장이 없기도 하고…….”
슬슬 핑계를 붙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흑검문주든 소문주든 그들이 걱정할 대상이 아니었다. 일대일로 붙어도 몇 초식이면 제압할 수 있는데 하물며 그들은 지금 넷이 한꺼번에 기습한다.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한 녀석이 하품하며 중얼거렸다.
“대충대충 하자고. 얼른 가서 잠이나 자, 이건 너무 힘든 일이야.”
“그렇지, 우리가 자객이냐?”
“지금 딱 그 꼴인데?”
“그래도 잠은 자야지.”
전혀 긴장감 없는 분위기 속에서 잡담을 나누던 그들은 예정했던 시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아무도 목표물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지금 올라선 이 전각이 첫 목표로 선정됐다. 바로 주석하의 거처였다.
멀리서 삼경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빛을 교환한 그들은 조심스럽게 지붕의 기와를 해체했다. 기왓장을 치우자 아래로 방안의 풍경이 흐릿하게 들어왔다.
“음…….”
어두운 방 내부의 풍경은 다소 뜻밖이었다. 놀랍게도 침상이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소문주가 결혼했던가?”
“아니, 혼자일걸?”
“그런데 왜 둘이야?”
“설마…….”
백호사협은 앞다투어 아래를 관찰했다. 혹시나 여인과 함께 잠이 들었다면 좋은 볼거리가 있으리란 기대와 함께.
“억! 둘 다 남자인데?”
“소문주 자식, 취미도 고상하군.”
한 녀석이 안면을 구기며 비난하자 다른 자들도 덩달아 동조했다.
“역시 흑도는 어쩔 수 없어.”
“……그런데 어느 놈이지?”
“하, 씨바알…….”
예상치 못한 곤란한 문제가 발생했다. 습격하려면 목표물이 분명해야 한다. 그런데 방안에 두 사람이 자고 있으니 대체 누구부터 공격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자칫 이 선택에 성패가 좌우될 수 있기에 그들은 고민에 빠졌다.
“흠, 어떻게 생겼지?”
“한 놈은 준수하고 한 놈은 자유분방하군.”
“자유분방한 게 뭐야?”
“제멋대로 생겼다고. 여자라고는 절대 안 붙을 놈이야.”
“흠, 그럼…… 잘 생긴 놈이지. 원래 황자나 세자는 다 잘생겼잖아.”
“푸하하, 미친놈! 그게 문파에서도 적용되나?”
무심코 웃음을 터트리던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깨닫고 금방 침묵에 잠겼다. 그들은 양쪽을 동시에 기습하기로 했다. 어차피 그들 숫자는 넷이고 목표물은 둘뿐이니.
지붕 위에서 사람이 통과할 구멍을 확보한 그들은 한 사람씩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혼자라면 내려오면서 바로 검으로 찔렀겠지만 그들 수가 넷이나 되다 보니 모두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사협의 발이 바닥에 닿으려던 순간이었다.
어둠을 가르는 검광이 번쩍였다. 그 검광은 미처 예상치 못한 백호사협을 무자비하게 갈랐다.
서걱-
미리 내려와 대기하던 일협의 팔 상단을 검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방향을 바꾼 검은 막 뛰어내리던 사협의 허벅지를 갈랐다.
“크윽!”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역습이었다. 기습당한 백호사협은 우왕좌왕하면서 검의 정체를 찾았다. 자유분방하게 생긴 녀석이 어느새 일어나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넌…….”
“나! 난 도수다. 네놈들은 누구냐?”
“도수? 살검회의 소회주?”
도수의 정체를 알게 된 백호사협은 기겁했다. 그제야 어떻게 된 상황인지 어림짐작했다. 살검회는 자객집단으로 암습에 최적화된 단체 아닌가. 그런 인물을 상대로 기습했으니 공자 앞에 풍월을 읊은 격이었다.
일협이 오른팔을 쓸 수 없어 사실상 무력화됐고 사협도 허벅지를 베어 동작이 편치 않았으나 아직은 백호사협의 우세였다.
암습에 능한 도수일지라도 정면승부는 백호사협이 무조건 우세였다.
머뭇거릴 틈도 없이 이협과 삼협은 도수를 포위했다.
“흐아암.”
주석하가 졸린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하아, 뭐가 이리 시끄러워? 도수야…… 어?”
간신히 눈을 뜬 주석하는 방안의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때아닌 활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이 꿈속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 순간 그의 눈앞으로 검광이 번쩍였다. 주석하는 재빨리 몸을 낮추며 침상 옆으로 피했다.
서걱-
향낭이 달린 침상 기둥이 사선으로 잘려나갔다.
“이, 이거 뭐야?”
“뭐긴! 자객이지!”
도수가 툴툴대며 주석하 쪽으로 몸을 날렸다. 도수가 있던 지점으로 검이 스쳐 지나갔다.
“자객이 여기 왜? 혹시 너 친구냐?”
“젠장, 친구가 기습하는 거 봤어?”
날아오는 검을 상대하며 도수가 이리저리 바쁘게 몸을 놀렸다. 그가 지나간 곳으로 검이 날아가며 기물이 부서졌다.
다행히 백호사협 넷 중 다친 두 사람의 움직임이 굼떠서 도수는 간신히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주석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도 검을 잡고 도수를 도우려 했다.
“끙!”
열심히 경혼심법을 시도했으나 단전에 잠재된 내력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내력은 단전을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어느 정도 운기가 되지만 끄집어내는 일이 문제였다.
용을 쓰고 있자니 그의 옆구리로 검이 날아왔다. 간신히 검으로 막고 재차 내력을 끌어올렸다. 역시 되는 일이 없었다.
“젠장! 이놈의 내력은 꼭 위험해져야 잠에서 깨나…….”
주석하는 투덜대면서 공격해오는 검을 쳐냈다.
챙-
둔중한 충격에 검을 쥔 손이 저렸다. 단 일 합만으로도 그는 상대의 수준을 파악했다. 이자들 개인의 무공은 최소한 도수보다 높았다. 간신히 협소한 공간과 기물을 이용해 버티고 있으나 곧 위기가 닥칠 것이다.
대체 어디에서 온 놈들이지? 정순한 내공으로 보아 아무래도 정파 쪽일 것 같았다.
서걱-
머리로 날아오던 검이 옆의 장식장을 박살냈다.
주석하는 재빨리 도수에게 요청했다.
“수! 나 좀 패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