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백호사협 (4)
“으아아! 뭔 소리야?”
도수는 이해하지 못하고 암습자의 공격을 막기 급급했다.
백호사협은 더 거센 공격을 펼쳤다. 몇 차례의 공방으로 백호사협은 주석하와 도수의 무공 수준을 완전히 파악했다. 역시 예상대로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보잘것없었다. 주석하는 백호문의 흔해 빠진 녀석들과 수준이 비슷했고 도수는 그나마 암습에 특화되어있어 가끔 날카로운 공격을 보이곤 했으나 정상적인 공방에서는 그들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백호사협은 한결 여유 있게 둘을 상대했다. 심지어 부상 중인 일협과 사협은 싸움에 가담하지 않고 도망칠 퇴로를 차단하며 만일에 대비할 정도였다.
채챙-
시간이 흐를수록 수세에 몰리게 되자 주석하는 다급해졌다.
“얼른 나 좀 때려보라고!”
“장난! 장난치지 마! 내가! 내가 지금 그럴 정신이 어딨어!”
도수는 날아오는 검격을 피하면서 주석하까지 돕느라 너무 바빴다. 그 와중에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머리를 굴리기까지.
“정파 놈들이잖아?”
야밤에 암습을 감행할 집단은 이 동네에선 살검회가 유일한데 살검회일 리가 없으니 정파가 분명했다.
“흐흐, 네놈들이 죽어야 할 이유가 또 늘었다!”
백호사협은 오히려 분노를 터트리며 도수를 몰아붙였다.
애초에 도수의 능력이라면 이들을 이기기는 어려울지라도 이곳에서 쉽게 도망칠 수는 있었다. 임무를 띠고 잠입했다가 여의치 않아 도망친 경험이 적잖게 있었기에 마음먹으면 이들의 손에서 벗어나기 어렵지 않다.
다만 지금 그럴 수 없는 이유는 순전히 주석하 때문이었다. 그가 도망치면 주석하가 정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도수는 주석하에게 도망치자는 눈짓을 수없이 보냈다. 정작 주석하는 녀석들의 검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어 의도가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도수가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정작 주석하는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뭉텅 베어졌다. 단순히 위험에 빠지는 것만으로는 내력을 깨우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단전의 내력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으로 판별 났다. 그날 우설금이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적혈방 살수의 검에 이미 고혼이 되었으리라.
챙-
가까스로 가슴으로 들어오는 일격을 막아낸 주석하는 나름대로 대응에 급급했다.
한가하게 대응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목숨이 간당간당한 위기에 빠져야 하는데 그렇다고 진짜 목숨을 내놓을 수도 없어 골치 아팠다.
“아! 미치겠네. 날 좀 패보라니까!”
그가 다시 소리 질렀을 때 그를 상대하던 삼협이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공격해 들어갔다.
“그렇게 맞고 싶으면 내가 패주마!”
가슴으로 들어오는 검을 주석하가 간신히 쳐내는 순간 삼협의 발이 날아왔다. 놀라운 퇴법에 주석하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뻑!
가슴에 둔중한 충격을 받으면서 주석하는 뒤로 우당탕 넘어졌다.
그 기회를 놓칠 삼협이 아니었다. 몸의 중심을 잡자마자 삼협은 재차 검을 찔러 갔다.
위기일발!
서걱-
날카로운 검이 주석하의 옆구리를 스쳤다. 허공으로 핏방울이 튀고 주석하의 몸이 굳었다. 적당히 다치기도 정말 어렵다.
으윽! 아득한 통증에 인상을 찡그리는 순간 단전에서 무지막지한 기운이 밀려 나왔다.
일격에 성공한 삼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 반반한 얼굴을 가진 녀석은 몸의 균형을 잃어 자세가 망가진 데다 옆구리의 상처 때문에 곧바로 반응하지 못한다. 회심의 공격을 절대 피할 수 없다.
삼협의 검이 쓰러진 주석하를 노렸다. 이미 항거불능인 목표물은 어디로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끝났다!”
삼협의 환호성이 입 밖으로 터지려는 순간 전진하던 검이 멈췄다.
주석하의 가슴팍에 도달하기 직전에 검이 허공에 정지해 있었다. 놀랍게도 주석하의 손이 검을 붙잡은 상태였다.
“허억!”
고수 흉내를 내다니! 삼협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검을 다시 밀어 넣었다. 무슨 재주로 검을 손으로 잡는단 말인가. 특히 그의 애검은 날카로웠다. 검날을 잡는 순간 손가락이 마디마디 잘려나갈 것이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손, 그것도 마디 몇 개가 토막 난 손을 떠올리며 비웃음을 지었다.
“어?”
놀랍게도 여전히 검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철벽에 막힌 듯 요지부동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검을 잡은 손 어디에서도 피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치 평범한 쇠뭉치를 잡은 듯 자연스럽게 검을 붙잡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삼협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놀란 것은 주석하도 마찬가지였다. 검이 가슴을 찔러오는 순간 주석하는 본능적으로 죽음을 느꼈다. 하지만 몸이 균형을 잃고 넘어진 터라 피하기도 이미 늦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그는 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그런데…….
그게 되다니! 손으로 검을 붙잡을 수 있었다. 단전에서 노도처럼 뿜어진 내력이 그 짧은 순간 손을 보호했다.
얼핏 보기엔 손으로 직접 검을 붙잡은 것 같지만 실상은 그사이에 아주 얇은 강기의 막이 존재했다. 손 주위를 호신강기가 둘러싼 상태에서 검을 붙잡았으니 당연히 손은 무사했다.
“이 자식이!”
화가 난 삼협은 힘껏 검을 밀어 넣었다. 어떻게든 상대의 가슴을 찌르고야 말겠다는 의지였다.
뚝-
주석하의 손에 잡힌 검신이 부러졌다.
“헉!”
삼협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부러진 검을 살폈다. 단단한 검이 엿가락처럼 부러져 있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맨손으로 검을 붙잡고 부러트리다니. 인간이 맞는 건가?
“하아! 십년감수 했네!”
주석하가 부러진 검을 들고 대수롭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심지어 부러진 검을 옷자락에 쓱쓱 닦기까지 했다.
“이것들이 오냐오냐하니까 제멋대로네?”
주석하는 몸을 일으키며 삼협을 노려봤다.
기막힌 상황에서도 삼협은 기가 죽지 않았다. 검이 왜 부러졌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평가한 주석하는 하수 중의 하수였다.
삼협은 공격을 재개하려고 재차 검을 뻗었다. 그 순간 검이 부러진 사실을 깨닫고 이대로 공격해야 할지 멈칫했다.
번쩍-
그때 주석하가 부러진 검을 마치 암기처럼 던졌다. 빛처럼 허공을 날아 삼협의 가슴 정중앙에 박혔다.
“이…… 커윽!”
삼협은 눈 깜짝할 새 날아온 검을 피하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용솟음쳤다. 그는 왜 자신이 죽게 되었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삼협의 무릎이 꺾였다.
“이게 어떻게…….”
남은 세 백호사협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특히 도수와 접전을 벌이던 이협은 검이 부러지는 장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 바람에 초식을 펼치던 동작이 뒤엉켰다.
한 번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었다. 남다른 실전 경험 덕에 도수는 상대의 실수를 순식간에 잡아냈다. 이협이 멈칫하는 순간 도수의 검이 손목을 그었다.
손목을 다치면서 더는 검을 휘두르기 힘들어지자 이협은 바로 수세에 몰렸다.
퇴로를 차단하고 있던 일협과 사협이 이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은 이협을 구하려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뻑-
어느새 주석하가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며 주먹을 뻗었다. 내력이 실린 주먹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팔을 다쳤던 일협은 가슴에 충격을 받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터진 주먹질이었다.
그 일 권에 의해 일협의 갈비뼈는 모조리 부서졌다. 일협은 더는 숨을 쉬지 못했다.
다음 차례는 다리를 다쳐 움직임이 예전만 못한 사협이었다. 내지른 주먹을 회수하면서 주석하는 허공을 날아 사협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쾅!
충격을 받은 사협의 신형이 속절없이 날아 벽에 박혔다. 그 충돌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전각의 벽에 구멍이 뚫리고 거미줄처럼 금이 쫙 그어졌다.
서걱-
도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놈들이 살아 있을 조금의 여유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일협과 사협의 가슴에 검을 박았다.
“하아!”
백호사협을 해치운 도수가 가쁜 숨을 내쉬며 주석하를 찾았다. 주석하는 방 중앙에서 주먹을 꾹 쥐고 멍하니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 자신이 벌인 일을 감탄하는 듯했다.
정작 주석하는 끓어오른 내력을 운기하느라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위기의 순간 끓어올랐던 내력은 위기가 사라지자 다시 잠잠해졌다. 다만 그런 가운데 경혼심법에 반응하던 내력만은 일부가 그의 의지에 반응하여 온몸을 일주천하고 있었다.
‘다른 놈은 안 되는 건가…….’
처음에는 여러 종류의 내력 가운데 하나만이라도 제어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왜 둘은 되지 않는지 아쉬웠다.
이전보다는 내력 운용이 편해지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단전에 잠재되어 있던 내력을 끌어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일단 혈맥을 따라 돌기 시작하면 예전보다 쉽게 제어 가능했다.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히.’
주석하는 내심 다짐하며 천천히 운기를 끝냈다.
도수가 부러진 검을 치우며 물었다.
“대체 뭐냐? 검! 검을 어떻게 부러트렸지?”
“불량품이었나 보지.”
주석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도수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달리 원인을 찾기도 어려웠다. 검날을 손으로 잡았는데도 상처가 나지 않았다는 것은 검이 불량품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아니면 검 주인이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녹이 슬었거나.
지금 급하게 해결할 일은 따로 있었다.
주석하는 죽은 네 사람의 복면을 벗겼다. 중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누구지?”
당연히 알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도수는 이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냈다.
“백호사협! 이 자식들! 백호문에서 보낸 거네.”
도수의 음성이 차가워졌다. 백호문이 적혈방과 맞먹는 큰 문파인 데다 백호사협의 위명을 익히 알고 있어서다.
“백호문?”
덕양에서 사는 이상 주석하도 당연히 들어봤다. 그들은 흑도가 아니라 정파 쪽 인물이니 상황이 심각했다. 주석하는 정파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근데 야밤에 들어와?”
주석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전생에서는 흑검문이 망해버렸으니 당연히 이런 일이 없었다. 그때는 덕양에서 적혈방과 백호문이 서로 패권을 겨루었다.
“이유가 중요해?”
도수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주석하는 분노를 씹으며 싸늘하게 답했다.
“이유? 그딴 건 필요 없지. 백호문이라…….”
“그냥! 그냥 요절내 버리자고!”
주석하와 도수는 의견이 잘 맞았다.
백호문이 왜 야밤에 흑검문을 습격했는지,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을 습격했는지 전혀 모른다. 백호사협이 누군지 어느 정도의 무공을 지닌 자들인지도 별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를 건드렸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흑검문을 건드렸던 적혈방은 멸문을 맞았다. 백검문도 같은 결말에 이를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암습을 공식적으로 항의할 생각은 없다. 정파의 습성으로 보자면 서로 뭉쳐서 흑검문을 비난할 것이고 그 경우 지루한 말싸움이 시작된다.
이에는 이이고 눈에는 눈이다. 그들이 암습했으니 이번에는 흑검문이 암습할 차례다.
“수! 생각 있냐?”
“당연! 당연하지. 적어도 덕양에서 나보다 뛰어난 자객은 없지.”
“좋아. 받은 대로 돌려준다!”
“가만 있으면 사람 아니지!”
“그래, 짐승이지!”
흑검문에 공식적으로 건의하면 당연히 반대가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일단 저질러 놓고 봐야 한다.
“거참, 정파까지 통합할 생각은 없는데……. 세상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네.”
주석하는 실소를 머금으며 전의를 불태웠다. 백화루 주인이 되어 놀고먹으려는 목표가 왜 이리 어려운지.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자꾸 건드리냐고!
굳이 적을 늘리고 싶지 않지만 선을 넘은 녀석들에겐 매가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