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정천신검 (1)
주석하의 계획은 금방 실행될 수 없었다.
백호사협과 싸우다가 옆구리를 다친 주석하가 움직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주석하는 활동에 지장이 없었다. 단지 부상이 심각하다고 생각하여 운신을 제한한 주격의 아들 사랑 때문이었다.
“하아, 지겹군.”
“나도! 나도 마찬가지야.”
주석하의 방에서 도수가 검을 닦으며 장단을 맞췄다. 그날 피를 묻혔던 도수의 검은 다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물론 주석하는 그런 그의 행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값비싼 명검이라면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지만 도수의 검은 저잣거리에서 산 검보다 조금 더 좋은 정도였다.
“또 닦냐?”
“당연하지. 내 목숨인걸.”
살수인 도수는 손에 익은 검이 무척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좋은 검이라도 손에 익지 않으면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나.
살수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주석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어쨌든 검을 소중히 다루는 도수의 마음가짐만은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야, 야! 문주님 오신다.”
검을 닦던 도수가 얼른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 기척을 인지하지 못한 주석하에 비해 확실히 도수의 감이 뛰어났다. 무공이 더 높다는 증거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주격과 흑검자가 들어왔다.
“아들아, 몸은 괜찮으냐?”
“그럭저럭 아물어갑니다.”
“다행이구나.”
문주를 보필하던 흑검자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소문주께선 회복 능력이 남다르십니다. 역시 어릴 적부터 영약을 많이 섭취한 덕분에…….”
“전 많이 안 먹었거든요?”
“문주님께서 배 터지게 먹였다던데요?”
흑검자가 천연덕스럽게 주격의 동의를 구했다.
굳이 말다툼해서 무엇하리. 주석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회복 능력이 좋아진 때는 최근에 적혈방이 쳐들어온 이후부터였다. 그 전에는 도건 등에게 얻어터지고 돌아오면 거의 한 달 이상 상처가 덧났다. 그랬던 것이 최근에는 뼈가 부러져도 이삼일이면 붙는 기적이 일어났다. 칼에 벤 자상은 더욱 회복이 빠르고.
단전에 잠재된 내공 때문이라 추정하지만, 그 사실을 남에게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근엄한 표정으로 흑검자에게 눈치를 준 주격이 이곳에 온 목적을 꺼냈다.
“석하야, 백호문과 엮인 일 있느냐?”
“제가 정파를 상대할 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감히 백호문 그것들이 내 아들을 암습해!”
며칠 동안 주격은 이 의문을 풀려고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당연히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
“백호문이 확실하답니까?”
“백호사협이라더라.”
물론 주석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저를 노린 게 아니라 아버지를 노리고 들어온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난 백호문과 원수질 일이 없다.”
주석하를 떠보던 주격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방구석의 도수에게 향했다.
“도 공자, 자넨 혹시 백호문과 엮일 일이 있었나?”
“전혀 없는데요?”
“……혹시 살검회에서 백호문에 자객을 보냈다거나…….”
“괜히 백호문을 건드릴 이유가 없지요. 백호문 관련 청부는 받지 않았고요.”
도수의 대답에 주격은 더욱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렇단 말이지…….”
도수의 시선이 결국 흑검자를 향했다. 이곳에서 가장 머리가 잘 굴러가는 사람이 흑검자이니 의문을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흑검자도 나름대로 난감했다. 이럴 때 존재감을 내지 못하면 굴러들어온 돌인 이상 언제 내쳐질지 모른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양 문파의 은원 관계가 없었다면……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뭔가?”
“세력 다툼이죠.”
“정파와 사파는 서로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영역이 존재해. 백호문이 괜히 분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어.”
지금까지 흑검문이 덕양에서 문을 닫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가 바로 뛰어난 처세술이었다. 백호문 같은 문파를 적대시했었다면 오래전 멸문지화를 맞았을 것이다.
“문주님, 정황상 백호문이 암습한 이유는 흑검문을 압박해서 세력을 넓히기 위함입니다. 왜 소문주님이었는지는 더 고민해보아야겠으나 최근 덕양의 세력 분포를 고려하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추정입니다.”
“설마?”
“확실합니다. 백호문이 세력을 넓히려고 한 짓입니다. 예전 적혈방도 같은 이유였잖습니까?”
흑검자의 확신 어린 말에 주격은 한숨을 내뱉었다. 오랜 기간 문파를 경영해온 경험에서 주격 또한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갑자기 덕양의 세력 균형이 깨졌다. 그것도 흑도 문파가 줄줄이 궤멸했다. 대립하던 백도로서는 절호의 기회일 수밖에 없다.
“그 말은…….”
“그렇습니다. 덕양에서 흑도를 아예 제거하려는 속셈입니다. 지금 우리 흑검문이 눈엣가시겠죠. 백도 천하를 만들 기회니까요.”
주격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세월의 경험과 통찰력이 아니라는 대답을 막았다. 다만 흑검문은 스스로 세력을 키우지 않았다. 주격 또한 세력 확장에 욕심이 없었다. 최근에 어이없게도 그런 식으로 결과가 드러났을 뿐이다.
“이것들이! 겨우 그딴 이유로 내 아들을 습격해?”
“응징해야죠.”
주석하의 응답에 흑검자는 화들짝 놀랐다. 비록 적혈방과 살검회 문하 일부가 흡수되었다고 하지만 흑검문은 예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백호문을 상대할 힘이 부족했다. 그런데 백호사협은 어쩌다가 죽었지?
문득 떠오른 의문을 해결할 틈도 없이 주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호문 뒤에는 정파가 무더기로 있지?”
“그렇습니다.”
“크흠, 백호문을 건드릴 수 없다는 뜻이군.”
“송충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이죠. 아니면 흑도라 할 수 없죠.”
백호문과 일대일로 붙어도 불리할 판에 백호문 뒤에는 덕양에만 여러 문파가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그 뒤에는 사천의 왕인 곤륜파와 무림 전체를 아우르는 무림맹마저 존재한다.
“나쁜 놈들…….”
대화를 경청하던 주석하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백호문이 먼저 건드렸어도 이쪽에서는 어떻게 응징할 방법이 없다. 아마 그런 점을 노리고 백호문은 과감하게 기습 작전을 펼쳤을 것이다. 전생 오 년간의 고생과 설움이 다시 생각나서 주석하는 새삼 분노를 삼켰다.
주격은 아들을 다급하게 달랬다. 자칫 흥분해서 백호문으로 달려가면 사랑하는 아들이 위험하다.
“석하야, 넌 가만히 있거라. 내가 알아서 하마. 알겠니?”
주석하가 대답하기도 전에 주격의 시선이 도수에게로 향했다.
“네놈도 괜히 나서지 마라.”
둘에게 신신당부하고는 주격이 흑검자를 이끌고 사라졌다.
다시 둘만 남게 되자 주석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지? 꼭 우리더러 사고 치라는 말 같은데?”
“우리가 송충이니 꿈틀대라는 거야?”
“흑도면 가만있지 말라는 거지.”
지금까지 열린 회의를 되새겨보니 문주인 주격은 대체로 신중했고 일을 벌이지 않은 반면 흑검자는 일을 키우려 했다. 방금 나온 대화도 어째 고의로 흘린 것 같기도 하고.
“햐! 내가 자객인 걸 알고…….”
“흑검자, 이 자식 교묘한데……. 적혈방에서 흑검문을 치러 온 것도 이 자식 머리에서 나왔던 거지?”
“당연히 그럴걸?”
지나간 일을 다시 나무랄 수는 없으나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이래서 책사는 믿기 어렵다. 사심 없이 정말 충성심이 가득한 책사는 역사를 돌아봐도 매우 드무니까.
어쨌든 지금은 뒤에서 판을 깔아주니 오히려 고마웠다.
“수! 언제 갈래?”
“아무 때나! 옆구리 다 나았어?”
갑자기 옆구리가 쑤시는 이 기분은 무슨 이유일까.
**
그즈음 백호문의 문주인 선우학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백호사협을 흑검문에 보낸 지 며칠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아서다. 그들이 연락 없이 사라질 리 없으니 사고 발생이 우려됐다.
“어떻게 된 걸까?”
선우학의 질문에 책사인 현현자가 고민에 잠겼다.
일이 터졌다는 점에는 그도 동의했다. 다만 무슨 일인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백호사협의 무위를 고려하면 작전에 실패할 리가 없었다. 설사 실패했더라도 목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처리하고 최소한 한 사람은 빠져나왔어야 한다.
또 백호사협의 습격이 있었다면 흑검문에서 당연히 항의해야지. 이상하게도 흑검문에서는 항의는커녕 잠잠했다. 이것은 습격 사건이 아예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현현자는 결론을 내렸다.
“뭔가 외부 세력이 개입한 듯합니다.”
“외부 세력이?”
“백호사협이 흑검문에 가기도 전에 저지를 당한 거죠.”
지금 상황으로 보아선 이런 추측이 가장 타당했다. 선우학은 현현자와 머리를 맞대고 이 사건의 해결책을 찾았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백호사협의 생사였지만 선우학과 현현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백호사협은 고수이니 시간이 흐르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단지 지금 다소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아직 흑검문에서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대체 그 외부 세력이 누굴까?”
“굳이 알 필요 있습니까? 만일을 대비해 우리도 외부에서 귀빈을 초빙해서 대처하죠.”
언제 백호문이 흑검문이나 흑도의 눈치를 봤단 말인가. 상대방이 고수라면 그보다 더 강한 자를 초빙하면 될 일이다. 마침 문에 상주하는 빈객이 얼마 없어 고민하던 차였다.
“적당한 자가 있나?”
“흐흐,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지 않습니까?”
선우학은 외부의 도움을 받기 싫었으나 백호사협이 행방불명된 마당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문주님께서는 저만 믿으시지요.”
현현자의 현란한 말발이 선우학을 안심시켰다. 설사 백호사협이 흑검문을 치러 갔다가 포로가 된 상황이라도 제대로 고수를 초빙하면 쉽사리 해결할 수 있으리란 계산이 깔렸다.
**
주석하는 도수와 함께 백호문에 잠입했다.
혼자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도수와 함께하니 어렵지 않게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무공이 도수에 비해 많이 뒤떨어지고 암습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아 담벼락 하나를 넘는데도 생고생이었다.
달도 없이 어두운 밤에 백호문 전각 지붕에 앉아 정황을 탐색하는 것 또한 흥미로웠다.
“저기 제일 큰 전각 있지? 그 옆에 있는 작은 전각이 문주의 침소야.”
도수가 건물 곳곳을 설명했다. 대충 말을 듣다 보니 이 녀석은 예전에도 이곳에 와 본 듯했다.
“여기 왔었구나?”
“일하러 종종 왔었지.”
그 일이 청부 건이었는지 아닌지 물어볼 필요 있을까? 이 자식이 아버지께 거짓말한 게 확실하네.
“우리가 할 일은?”
“문주! 책사! 문주랑 책사만 죽이면 돼.”
둘이면 각자 한 사람씩이니 깔끔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도수가 조용히 속삭였다.
“백호문주 선우학은 우리가 상대하기 힘든 고수거든. 그러니까 무조건 잠이 들었을 때 기습하고 여의치 않으면 도망쳐야 해. 도주로는…….”
주석하는 도수의 치밀함에 감탄했다. 성공하든 못하든 이곳에서 빠져나와야 하니 무엇보다 도주로 확보가 우선이다. 역시 자객이 천직인 녀석은 생각부터 달랐다.
“지금쯤 잠들었으려나……. 어디로 들어갈까?”
“바로 여기!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주석하는 피식 웃으며 기왓장을 가리켰다. 백호사협이 기왓장을 뚫고 들어왔으니 그들도 그렇게 결정했다.
미친놈이라고 비웃으며 도수가 몸을 날리려는 찰나 주석하가 붙잡았다.
“지난번처럼 나 좀 패달라고 하면 이번에는 꼭 패야 한다. 알지?”
도수가 찜찜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이유가 있으려니 하면서도 도무지 그 속셈을 알 수 없었다. 팬다면 얼마나 팰지, 갈비뼈를 부러트려도 상관없는 건지 그게 고민이었다.
도수의 다짐을 받은 주석하는 어둠 속으로 먼저 숨어들었다. 오늘은 예전보다 쉽게 일이 해결되려나.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 둘이 문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 전각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