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19화 (19/273)

19화 정천신검 (2)

전각 지붕 위에서 주석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일단 기왓장부터 제거하고 안으로 들어갈 통로를 확보해야 한다. 소리 없이 해치우려 했지만 전문가도 아닌 주석하가 제대로 해낼 리가 없었다. 그나마 이런 경험이 많은 도수가 옆에 붙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무려 기왓장을 네 장이나 들어내자 아래쪽 방안 풍경이 훤히 보였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 얼핏 보기에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선풍도골의 노인이었다.

‘들어갈까?’

주석하는 눈짓으로 의사를 알렸다.

정작 도수의 표정이 사뭇 심각했다. 영문을 모른 주석하는 눈짓으로 ‘왜’라는 신호를 보냈다.

도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백호문주인 선우학은 저렇게 나이가 많지 않아.”

“백호사협 걱정에 팍삭 늙었나 보지.”

그때야 주석하는 번지수가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 오늘은 일이 꼬이는 날인가 보다.

문주의 침소 위치를 추측했던 사람이 도수였기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눈으로 다시 물었다.

도수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 다음으로 미루자.”

다년간 받은 자객 훈련에 따르면 일이 틀어졌을 때는 빨리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다.

도수가 저렇게 말하는데 계속 강행할 수는 없는 노릇. 아쉽지만 백호문 응징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주석하는 조용히 기왓장을 다시 제자리에 끼우기 시작했다. 네 장을 모두 끼웠다 싶은 순간.

콰앙-

막 끼운 기왓장이 허공으로 터져나갔다. 동시에 아래쪽에서 강렬한 검기가 빛처럼 솟구쳤다.

전혀 낌새를 알지 못한 주석하는 속절없이 검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도수는 달랐다. 이미 방안의 풍경에서 뭔가 수상하다는 조짐을 느꼈던 그였다. 검기를 감지한 순간 재빨리 주석하를 밀었다.

서걱-

주석하는 지붕 위에서 옆으로 밀려났고 그 자리를 대신한 도수의 허벅지를 검기가 스쳐 지나갔다.

“크윽!”

순간 도수의 움직임이 멎었다. 검기는 예상보다 훨씬 강해서 완벽하게 피할 수 없었다. 허벅지에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거동이 불가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상처는 상당히 깊었다.

“수!”

놀란 주석하가 도수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아래쪽에서 다시 검기가 솟구쳤다. 이제는 확실하다. 지붕을 뚫고 올라온 검기는 주석하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어마어마한 위력을 뿜어냈다.

“고수다! 도망쳐!”

도수가 고통에 안면을 일그러트리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물론 주석하는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차피 믿는 구석이 있지 않은가.

퍼석-

두 사람이 피하는 순간 검기가 지붕을 두 쪽으로 길게 갈랐다.

우르르-

급기야 지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주석하라고 방법이 있을까. 지붕이 무너지면서 그는 도수와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다만 정상적인 낙하는 아니었다. 검기를 피하느라 몸이 균형을 잡지 못한 상황에서 추락했으니 아래로 처박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쿠웅-

주석하는 예상외의 엄청난 충격에 비명을 질렀다. 그는 부서진 기왓장과 함께 방 안에 있던 침상에 그대로 처박혔다.

도수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허벅지 부상 때문에 제대로 대비할 수 없었기에 바닥에 떨어져 큰 충격을 받았다.

놀랍게도 침상에서 자고 있던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순간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주석하를 향해 날카로운 예기가 밀려왔다.

퍼억-

일장을 그대로 가슴에 맞은 주석하는 속절없이 밀려나 벽에 처박혔다. 미처 정신을 차리기 전이라 상대의 공격에 대비할 수 없었다.

내상을 입은 걸까. 목구멍으로 비릿한 선혈이 흘러들었다.

“크윽!”

주석하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공격한 자를 찾았다.

방 한가운데 위풍당당한 자세로 노인이 서 있었다. 검기를 뿜어내는 무공과 주변을 장악하는 능력을 볼 때 엄청난 무림 고수가 확실했다. 마불과 비교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사천일살 정도는 쉽게 능가하는 고수 중의 고수였다.

“쥐새끼가 들어왔구나. 어디에서 왔을까?”

노인이 늙수그레한 음성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주석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방금 떨어지면서 받은 충격 때문에 그의 단전에서 내력이 깨어나 혈맥을 떠돌고 있었다. 그는 경혼심법을 이용해서 내력을 인도하느라 노인을 상대할 여유가 없었다.

반면 도수는 다친 다리를 움켜쥐며 간신히 물었다.

“넌 누구냐? 누군데 문주 방에서 자는 거지?”

“오호, 문주를 노리고 왔나 보군.”

“뭔 소리! 문주의 애첩을 보쌈 싸러 왔다!”

“갈! 감히 본좌 정천신검 앞에서 헛소리하다니!”

노인의 정체를 알게 된 도수는 입을 쩍 벌렸다.

정천신검(正天神劍)은 곤륜파에서 배출한 속가제자였다. 애초에 곤륜파 장문 제자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어느 때부터 곤륜파를 떠나면서 속가제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그는 곤륜이 배출한 역대 최강 속가제자였다. 곤륜파의 정수를 이은 그의 무공은 곤륜파 장로와 비등할 정도로 강했다. 그가 왜 속가제자 신분으로 전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젠장, 재수 옴 붙었는데?”

도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주석하에게 눈짓했다. 도무지 상대할 수 없는 자이니 얼른 도망치라는 신호였다. 자신은 다리를 다쳐 움직이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잠시 운기에 매진하던 주석하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벌떡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정천신검? 그래서 어쩌라고?”

“오늘은 안 패도 되냐?”

“저 자식이 팼잖아?”

“아깝네. 때릴 기회였는데.”

“이것들이!”

두 녀석의 도발에 정천신검이 분노를 터트렸다. 범을 본 적이 없는 하룻강아지는 범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천신검이 보기에 지금 주석하의 행동이 딱 그 수준이었다.

“네놈들을 잡아 정체를 확인해야겠군. 물론 너희들을 가엽게 여겨 팔다리 하나씩을 남겨주마.”

도수가 다쳤다는 생각에 주석하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백호문에 갑자기 유명 인사인 정천신검이 등장한 이유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이판사판. 누가 앞을 막든 뚫고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흐흐, 그러냐? 와라! 정천신검인지 나발인지.”

주석하가 노인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정천신검은 여전히 안하무인인 주석하를 응징하고자 일 검을 날렸다.

번쩍!

주석하가 서 있는 방향으로 검기가 뿌려졌다. 주석하는 본능적으로 저 검을 손으로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떨어질 때 놓친 검을 잡으려고 몸을 날렸다.

정천신검의 검기가 허공을 강타하며 전각 벽에 충격을 가했다.

퍼석-

강력한 검기에 벽이 터져나가며 전각에 충격이 가해졌다. 지붕이 무너지고 한쪽 벽마저 반파되자 그 여파로 전각이 흔들려 와르르 소리를 냈다.

순간 주석하는 도수를 낚아채고 힘껏 발을 굴렀다. 무너지는 전각을 뚫고 밖으로 나오자 눈앞이 환했다.

전각 외부에는 횃불이 대낮처럼 밝게 켜져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백호문 제자들이 일대를 포위한 상태였다.

“이놈들아! 독 안에 든 쥐다!”

포위망 한가운데서 한 중년인이 소리쳤다. 주석하는 그자가 문주인 선우학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뒤에는 이름난 고수인 정천신검이 버티고 있고 앞에는 수십 명의 백호문 제자들이 포위하고 있으니 빠져나갈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함정을 파고 마치 그들이 습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했다.

“젠장, 당했나…….”

“도망치기도 어려워.”

상황을 판단한 도수가 주석하와 눈빛을 교환했다. 지금도 패면 해결책이 생기냐고 묻는 눈치였다. 정작 주석하는 무슨 뜻인지 잊어버렸다.

정천신검이 오만한 비웃음을 지으며 주석하에게 다가섰다.

“쥐새끼에게는 매가 약이지.”

이런 압박은 응징해야 한다. 주석하는 도수를 내려놓고 다시 검을 잡았다.

정천신검이 가소롭다는 듯 소리쳤다.

“감히 본좌 앞에서 검을? 어떤 검법을 익혔길래 본좌 앞에서 허세를 부리느냐?”

“아, 그러셔? 덕양 최고검법! 흑검육식이라고 들어봤냐?”

흑검육식이라는 말에 주위에서 비웃음이 쏟아졌다.

“과연 예상대로 흑검문의 조무래기였구나!”

선우학이 흑검문을 조롱하며 정천신검에게 신호를 보냈다. 적당히 처리해서 사로잡으라는 지시였다.

주석하는 도수의 부상을 곁눈질했다. 대충 절룩거리면서 홀로 걸을 정도는 되어 보였다.

“넌 내 뒤만 따라와라.”

용기가 어디에서 생겼는지 모르겠으나 도수는 주석하를 믿었다. 지난번에 백호사협과 싸울 때 그가 보여준 놀라운 무공이 있으니 오늘도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주석하가 검으로 정문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길을 열어라! 앞을 막는 자는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저승으로 보낼 것이다!”

“미친놈!”

정천신검이 비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주석하의 신형이 번개처럼 앞으로 질주했다.

콰직-

주석하의 검을 얼떨결에 막은 정천신검은 손으로 전해지는 둔중한 충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리는 손도 손이지만 몸을 버티는 뒷발이 견디지 못하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무슨 힘이…… 황소냐?’

다시 날아드는 검의 살기에 정천신검은 감상에 잠길 여유가 없었다. 재빨리 검으로 상대의 검로를 차단했다.

챙-

“허억! 이놈이!”

온몸이 뒤로 주르륵 밀린 정천신검은 황당한 마음에 주석하를 노려봤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들과 달랐다. 그의 나이가 적지 않고 강호 경험 또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전은 처음이었다.

약관이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무지막지한 내공을 소유했다니!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닌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주석하가 휘두르는 검초는 대단히 단순했다. 곤륜의 검법에 비하면 어린애 수준이라 할만했다.

하지만 곤륜의 검법이 아무리 화려하고 정심하다 한들 힘에서 차이가 크게 난다면 우세를 점하기 어렵다. 어린아이가 아무리 현란한 기술을 갖고 있어도 훨씬 힘이 센 어른을 상대하기 힘든 법이다.

꽝- 꽈꽝-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주석하의 검을 간신히 막을 때마다 정천신검은 속절없이 뒤로 밀렸다. 그 광경은 주변 사람에게도 충격을 안겨줬다. 정천신검의 위명을 고려하면 있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허접탱이 노인네!”

주석하는 상대를 노려보며 다시 전진했다. 흑검육식이 다른 이들을 상대할 때와 달리 정천신검에게는 통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내공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우세를 점했다는 것도 알았다.

더구나 지금 그의 상태는…… 경혼심법으로 끌어올린 내력이 제법 말을 잘 듣고 있었다. 어쨌든 단전에 담긴 무한한 내력 가운데 일부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그의 의지대로 제어 가능했다.

마교의 마불도 절단 냈던, 무지막지한 내공 아니던가. 정천신검 따위가 그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정천신검은 포위망 근처까지 밀리자 안면이 붉어졌다. 이런 식으로 계속 밀리는 것은 명성을 진창에 박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름 없는 무명 소졸, 그것도 흑검육식이라는 싸구려 검법을 사용하는 놈에게 진다는 것은 일생일대의 수치였다.

“놈!”

정천신검은 분노를 터트리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힘만 센 놈이라면 기술로 요절내면 된다.

내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자 시퍼런 검기가 쭉 뻗으며 주변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가워졌다.

“오오! 곤륜의 무적검법이다!”

정천신검의 검법을 알아본 사람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지금까지와 다른 검기가, 지금까지와 다른 화려한 검의 궤적이 무적 곤륜을 상징하고 있었다.

‘넌 끝났다!’

정천신검은 내심 승리를 만끽하며 주석하에게 덤벼들었다. 무시무시한 검기가 주석하의 몸을 토막 내고자 날아들었다.

일격필살!

서걱-

정천신검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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