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0화 (20/273)

20화 정천신검 (3)

정천신검은 부러진 검을 들고 망연자실한 채로 서 있었다.

그의 앞에서 주석하는 마치 하류 무사처럼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이것들아! 덤벼! 덤벼!”

어딜 봐도 고수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그것도 건성으로 거들먹거리는, 진중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외침이었다.

저런 녀석과 겨루다 검이 반 토막 났다고?

“삼류 애새끼가…….”

정천신검은 눈을 부릅뜨고 검의 절단면을 살폈다.

무려 내력을 극성으로 투입하여 검기를 뿜어냈다. 설사 불량품이었더라도 이렇게 부러질 상황이 아니었다. 장대에 내기를 불어넣었더라도 그 예리함은 검을 훨씬 상회했을 것이다.

‘하! 불량품이었나?’

그런데도 부러졌으니 원인을 자신이 아니라 상대에게서 찾아야 했다. 눈앞의 저 녀석이 무시무시한 고수라는 이야기인데…….

“그게 말이 되나?”

검을 쥔 손만 봐도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다년간 검법에 매진한 자는 검을 저렇게 잡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손을 훑어봐도 훈련으로 인한 못이 박히지 않았다. 무공이라고는 거의 익히지 않은 부드러운 손이다.

정천신검은 상대가 고수란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 확인해봐야 한다.

“이놈이!”

정천신검은 토막난 검을 내던지고 옆에 선 백호문 제자에게서 검을 빼앗았다.

“죽어!”

단말마의 기합과 함께 그는 재차 검기를 흩날리며 전력을 다해 주석하를 덮쳤다.

주석하의 시선이 정천신검을 향했다.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주석하가 신경질이 난 듯 가볍게 검을 움직였다. 역시 조금 전에 선보였던 흑검육식이었다.

카캉-

두 검이 맞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그 순간 정천신검의 상체가 뒤로 확 밀렸다. 내공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아니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순간 자존심이 상한 정천신검은 곧바로 최후의 절초를 펼쳤다. 곤륜파에서 수학하면서 배웠던 비기이자 강호로 나온 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검의 빠르기는 섬전과 같았고 위력은 벼락이 온 누리에 내려친 듯했다.

콰직-

이번에는 녀석을 벴다고 생각한 정천신검은 자신이 든 검을 살펴보고 실소를 터트렸다.

이번에도 검이 부러져 있었다. 반면 주석하가 든 검은 여전히 쌩쌩했다.

“다 했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주석하가 숨돌릴 틈도 없이 정천신검에게 돌진했다. 경악한 정천신검은 토막 난 검으로 공격을 막았다.

쾅- 쾅-

마치 둔기로 공격하듯 거대한 충격이 정천신검을 몰아쳤다. 그때마다 정천신검의 다리가 뒤로 주르륵 밀렸다. 힘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뒤로 우당탕 넘어졌다.

심장이 널뛰듯 제멋대로 움직이며 호흡이 가팔라졌다. 심지어 비릿한 피비린내가 울컥 목을 넘어왔다. 순식간에 내상을 입은 것이다.

정천신검을 몰아붙인 주석하가 가소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다시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부었다.

쾅- 쾅-

“헉!”

정천신검의 눈이 왕방울이 됐다.

부러진 검의 검신이 몽땅 날아가고 이젠 검병만 남았다.

푹!

“크윽!”

주석하의 검이 정천신검의 가슴에 그대로 박혔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백호문 사람들은 정천신검이 이런 식으로 허망하게 패할 줄 꿈에도 몰랐다. 몇 번 검을 마주치더니 뒤로 밀려났고 순식간에 주석하의 검이 가슴에 박히는 것만 목격했다.

문주인 선우학은 경악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앞에서 날뛰는 저놈을 막아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전 제자들이 모두 덤비면 적을 잡을 수 있을까? 정천신검마저 패한 고수인데……. 머릿속이 한없이 복잡해졌다.

이 사이 도수는 판을 제대로 읽었다. 비록 다리를 다쳐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으나 적의 허술함을 순식간에 간파했다.

여전히 주석하가 길을 열라고 고래고래 허세를 부리는 사이 바로 뒤에 붙어 있던 도수는 재빨리 과감한 공격을 시도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필살의 한 수가 펼쳐졌다. 수많은 암살 임무로 다진 그만의 공격이었다.

푹!

도수의 공격 목표는 바로 백호문의 문주인 선우학이었다.

선우학은 쓰러진 정천신검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미처 도수의 공격에 대응하지 못했다. 선우학을 옆에서 호위하던 다른 백호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암습에 성공한 도수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후에야 주변 사람들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깨달았다.

“문주님이 쓰러졌다!”

“놈을 잡아라!”

정천신검이 쓰러지는 순간 경악에 빠졌던 문도들은 문주가 쓰러지자 눈이 뒤집혔다. 그들은 문주의 원수를 갚으려고 앞뒤 가리지 않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군중의 분노와 광기는 무섭다. 한 사람의 분노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 지금 백호문 모두가 그렇게 여겼고 일을 저지른 도수도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망했다…….’

다만 전혀 개의치 않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개떼들! 와라!”

주석하가 전면을 향해 벼락처럼 검을 휘둘렀다.

푸아악-

검에서 시퍼런 빛이 뻗어 나가는 착각을 불러왔다. 주석하와 도수를 노리고 몸을 날리던 문도들이 피를 뿌리며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순간의 광기에 제정신을 잃었던 모두에게 찬물을 퍼붓는 일격이었다.

“허억!”

개떼처럼 몰려들던 문도들이 시간이 정지하듯 동작을 멈췄다. 그 누구도 감히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공격하는 순간 저승행이란 두려움에 흥분이 확 식었다.

“와라! 남김없이 죽여주마!”

주석하의 포효가 어둠을 갈랐다. 그가 성큼 앞으로 내딛자 썰물이 갈라지듯 사람들이 양쪽으로 물러섰다. 앞으로 길이 생겨났다.

“인간이냐? 괴물이다!”

“고…… 고수다! 이게 정말 덕양의 무공 수준이란 말입니까!”

“소림사에서 득도한 거겠지?”

“이 자식아, 소림에서 살인마 키우냐?”

“으아아! 뱃속에서 무공을 익혔나?”

주위의 백호문도들이 감히 주석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혀를 내둘렀다.

“가자!”

도수를 부축한 주석하가 거리낌 없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도수는 어리벙벙한 상태로 질질 끌려갔다.

과연 주석하는 고수인가 하수인가. 도수는 도무지 정답을 알 수 없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옆에서 평소에 지켜본 바로는 주석하는 분명히 고수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평범했다.

그런데 위기가 닥치면 오늘 정천신검을 상대할 때처럼 엄청난 괴력을 발휘했다. 마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원래 낙천적인 성격인 도수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어쨌든 백호문에서 임무를 마쳤으니 좋은 일 아닌가. 녀석들을 혼쭐내고 문주를 죽였으며 비장의 한 수인 정천신검마저 쓰러트렸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석하와 도수가 나란히 백호문을 떠났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책사인 현현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머릿속에서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다. 마치 하룻밤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이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오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리라.

**

정천신검의 죽음은 사천성 일대를 뒤흔들었다.

이전에 일어났던 사천삼살의 죽음과는 완전히 다른 파문을 불러왔다. 정천신검이 사천삼살을 능가하는 고수이기도 했고 사천삼살과 달리 정파에서 나름 추앙받던 인물이어서였다.

지역 터줏대감인 곤륜파가 연관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화제를 낳았다. 적혈방과 살검회의 멸문으로 눈치를 보던 정파인들이 백호문에 불어닥친 혈겁에는 불이 난 것처럼 다급하게 움직였다.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고자 곤륜파를 비롯한 정파 인물들이 백호문에 모였다. 예상치 않게 덕양이 사천 일대의 시선을 끌어 모으게 됐다.

백화루.

평소라면 술과 요리를 즐기는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을 이곳에 오늘은 평소와 다른 손님이 들어섰다.

바로 흑검문의 주요 인물이 총출동한 것이다.

눈치 빠른 백화루 총관은 그들을 후원 별채로 안내했다. 별채 이 층에 차려진 커다란 탁자 한쪽을 흑검문 인물들이 자리를 채웠다. 바로 문주인 주격을 비롯하여 책사로 등극한 흑검자, 장로인 신옹에 주석하와 도수였다.

“우리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흑검자가 조심스럽게 주격의 눈치를 봤다.

주석하가 백호문에 잠입해서 백호문주와 정천신검을 죽인 이후 흑검문에서는 매일 회의가 열렸다. 정천신검의 뒷배인 곤륜파와 어떻게 맞설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주석하가 사고를 쳤음에도 주격은 오히려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 흑검문이 이처럼 위명을 떨친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무려 흑검육식으로 곤륜파의 절기를 깼다니!

정파의 위협을 두려워하면서도 흑검육식의 위명을 떨친 주석하를 모두가 자랑스러워했다. 아무도 이 대형 사고를 야단치지 않았다.

어쨌든 오늘은 백호문과 후속 대책을 협의하는 날이었다.

“석하야, 오늘은 나에게 맡겨라.”

주격이 신신당부했다. 오늘 이 자리는 반드시 몸을 낮춰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곤륜파의 비위를 건드리면 정말 멸문지화를 맞게 될지도 모르니까. 주격은 다년간 몸조심했던 자신의 경험과 그럭저럭 머리가 잘 돌아가는 흑검자의 능력을 믿었다.

“입 꾹 다물고 있겠습니다.”

지은 죄가 있는지라 주석하는 바로 머리를 숙였다. 어쨌든 이런 정치적인 자리는 아직 젊은 그가 나설 필요가 없으니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문이 열리고 백화루 총관의 안내를 받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 일부가 도사 차림이어서 곤륜파의 압박이 느껴졌다.

주석하는 그 가운데 낯이 익은 한 사람을 발견했다. 바로 지난번에 그를 고용했던 허윤이란 사람이었다.

그날 헤어지면서 앞으로 보지 말자고 과감히 말했었는데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만나니 매우 어색했다.

어쨌든 그날의 서먹함을 잊고 잘 보여야 하기에 주석하는 손을 흔들며 아는 척했다.

다행히 허윤도 미소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생각해보니 허윤은 성격이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했었다. 그 사매인 설약이 개판이어서 그렇지.

어쨌든 허윤이 맞은편에 앉자 주석하는 기분이 좋아졌다.

착석한 양 진영은 인사를 주고받았다.

허윤의 옆에 그보다 약간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은 사형인 방덕산이라 했다. 한때 정천신검을 매우 따랐었다나.

그 옆에는 이 회담의 가장 연장자이자 최고 고수인 곤륜파 장로 운룡진인(雲龍眞人)이 하얀 수염을 매만지며 위엄을 내뿜고 있었다.

운룡진인의 옆에는 백호문의 두 인물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앉았다. 바로 책사인 현현자와 백호문 부문주인 선우청이었다. 선우청은 문주인 선우학의 동생으로 사십 대였다.

“거두절미하고 감히 야밤에 남의 문파에 들어와 살인한 죄를 묻고자 하오.”현현자가 사실상 선전포고를 울렸다.

이에 맞서 목소리를 높인 사람은 주석하의 눈치를 본 흑검자였다.

“뭔 소리요? 이 일은 백호사협이 흑검문을 기습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 아니오?”

“백호사협? 설마…….”

“아직 몰랐소? 백호사협이 암습한다고 설치다가 목숨을 잃었소. 암습을 당했는데 응징하지 않을 만큼 흑검문은 용기가 없지 않소.”

백호사협의 생사가 드러나자 좌중은 경악에 빠졌다. 이로써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 정황이 모두 드러났다.

“감히 백호사협까지 살해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선우청이 분노를 터트리고 현현자가 동조했다. 사실상 백호문은 이번 사건으로 재기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곤륜파 사람들은 직접 말다툼에 끼어들지 않았으나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우리 흑검문은 받은 것을 돌려주었을 뿐이오. 먼저 공격한 쪽은 백호문이오.”

“간악한 흑도 같으니! 잘못을 우리에게 덮어씌워? 쓴맛을 못 봤구나!”

곤륜의 위세를 등에 업은 현현자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는 흑도를 응징하는 일이 강호 정의라고 철석같이 믿는 자였다. 곤륜파 사람들이 같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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