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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검천하-21화 (21/273)

21화 곤륜십이검수 (1)

흑검자와 현현자의 말다툼이 계속됐다.

흑검자는 먼저 기습한 백호사협의 잘못을 따졌으나 현현자는 백호문주와 정천신검의 죽음을 문제 삼았다.

당연히 양쪽 주장은 평행선을 그렸다.

“흑검문이 요즘 위세를 떨친다더니 이리 안하무인일 줄은 몰랐소.”

“앞뒤를 따지지 않는 쪽은 백호문이오.”

“뭔 소리요? 방금도 당신이 남의 말에는 귀를 닫지 않았소?”

“당신 자신을 생각해보시오.”

“어허, 살인자와는 역시 말이 안 통하는군. 죽은 백호사협에게 잘못을 덤터기 씌우는지 누가 알겠소?”

쉬운 협상이 아니라고 예상하긴 했으나 도무지 타협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주석하는 자리에 앉은 채 하품만 토했다. 이런 식의 협상을 전생에서도 많이 보았다. 어차피 저들은 작정한 바가 있을 테니 그것을 들어줄 때까지 위협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원하는 바는…… 최근 흑검문이 차지한 각종 이권이겠지.

회담이 지겨워진 그는 앞에 놓인 과일로 손을 뻗었다. 과일 먹는 재미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이보시오, 흑검문이 그렇게 안면을 몰수한다면 우리도 생각이 있소. 과연 흑검문이 우리 백호문의 총공세를 견딜 수 있을지……. 어차피 혈채는 피로 갚아야 하는 법이오.”드디어 백호문이 이빨을 드러냈다. 현현자는 곤륜파 운룡진인의 눈치를 본 후 다시 흑검자를 협박했다.

“혹시 곤륜파의 자랑인 곤륜십이검수를 들어보셨소?”

곤륜십이검수(崑崙十二劍秀). 곤륜파가 자랑하는 후기지수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무력 부대다. 최근 강호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무림 정의를 실천하는 협의지사 부대로 유명했다.

흑검자는 금방 현현자의 경고를 눈치 챘다. 현현자가 곤륜십이검수를 동원할 수도 있다고 시위하는 것이다.

“마침 자랑스러운 곤륜십이검수의 일인이 이곳에 계시오.”

현현자가 동석한 방덕산을 향해 살짝 눈짓했다. 방덕산도 고개를 숙이며 좌중에 예를 표했다.

당연히 흑검문 측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들도 곤륜십이검수의 위명을 들어봤던 차였다. 곤륜심이검수가 뜨면 흑검문 정도는 우습게 쓸어버릴 것이다.

당황한 흑검자가 주격을 비롯한 아군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주석하가 눈에 들어왔다.

무료한 회의를 신경 쓰지 않고 태연자약 앞에 놓인 과일을 집어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이 대단히 여유로웠다.

순간 흑검자는 적혈방주의 목을 벤, 기세등등하던 주석하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주석하가 백호문주를 죽이는 바람에 이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런 주석하가 저렇게 여유롭다는 것은…….

‘그렇지, 소문주께선 다 생각이 있으신 거야.’

정작 주석하는…… 당연히 아무 생각이 없었다.

주석하에게서 용기를 얻은 흑검자는 다시 목을 꼿꼿하게 세웠다.

“흐흐, 그래서 곤륜십이검수로 본문을 쓸어버리겠다는 협박이오?”

흑검자가 직접 들이받자 현현자는 말문이 막혔다. 이래서 흑도 놈들과는 상종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현현자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켕기는 부분이 많은가 봅니다? 곤륜십이검수는 악을 응징할 뿐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상관없군요. 하하.”

흑검자도 능글맞은 웃음을 터트렸다.

“험험.”

보다 못한 운룡진인이 잔기침으로 양쪽을 만류했다.

분위기를 눈치 챈 주격이 얼른 술잔을 들었다.

“진인, 한잔하시지요.”

협상은 책사가 하더라도 분위기는 단체의 수장이 잡아야 한다. 주격은 이 회담의 결정권이 백호문이 아닌 곤륜파에게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곤륜파의 최고 연장자는 운룡진인이니 자신은 운룡진인과 좋은 분위기를 만들면 소임을 다하는 셈이다.

당연히 운룡진인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회담에 진저리가 난 차였다.

두 사람이 술잔을 기울이자 분위기가 한결 온화해졌다.

“회담은 내일 계속하기로 합시다. 이 중요한 일을 하루 만에 끝낼 수는 없지요.”

주격은 영업용 웃음을 머금고 술을 대접했다.

연장자들 사이에 끼어 있기 지겨웠던 주석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생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주격에게 허락을 구한 후 좌중을 향해 인사했다.

“후우, 역시 이런 자리는 끼는 게 아니었어.”

주석하는 후원으로 나와 가슴을 폈다. 실내 공기에 비하면 무척 시원한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그의 옆에는 어느새 도수가 따라 나와 그를 흉내 내고 있었다. 녀석의 얼굴에도 지겨움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후원을 서성이다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마주쳤다. 바로 곤륜의 허윤과 방덕산이었다.

허윤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주 공자, 여기에서 또 뵙는군요.”

“그날은 잘 가셨습니까?”

“다행히 양주까지 아무 일 없었습니다.”

일검신성 가적성을 호위해서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는 뜻이다. 별일 없었다니 그날 포기한 나머지 일당이 아까워진 주석하는 내심 쓴웃음을 달랬다.

허윤이 방덕산을 주석하에게 소개했다.

“들으셨듯이 이분은 곤륜십이검수에 속한 방덕산 대협이십니다.”

주석하는 상대에게 포권을 취해 인사했다. 그는 곤륜파에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정천신검은 속가제자일 뿐이고 그 또한 백호문의 피해자다.

정작 방덕산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당신이 그 유명한 흑검문 소문주요? 정천신검을 죽인?”

“정천신검이 먼저 공격했소.”

“당신이 백호문을 침입했으니 그런 것 아니오?”

“그날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면 나도 죽이지 않았을 거요.”

“당신이라면 집에 들어온 도둑을 그냥 내보내겠소?”

방덕산이 분노를 드러내자 허윤이 재빨리 만류했다.

“사형, 그 문제는 문주와 책사가 알아서 할 테니 우리까지 싸우진 맙시다. 마침 남궁천 형님께서 여기 계신 데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주석하를 힐끔 본 방덕산이 바로 수락했다.

“좋지, 나도 술이 고팠는데 아까 그 자리에선 차마 마시기 어려워서…….”

“주 공자께서도 같이 가시지요?”

주석하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살피다 마지못해 수락했다. 앞으로 문제를 더 키우지 않으려면 이쯤에서 적당히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가 아는 허윤은 그나마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무엇보다 그를 솔깃하게 한 것은 남궁천이란 인물이었다.

오대세가의 수장이라 할 남궁세가의 소가주인 남궁천. 강호에서 그 남궁천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창천일룡(蒼天一龍)이란 별호를 지닌 남궁천은 현 무림을 이끌어가는 신진 최강자인 중원사룡(中原四龍)의 한 사람으로도 유명했다.

주석하는 전생에서 남궁천을 본 적이 없었다. 단지 그 위명만 들었을 뿐이다. 당시 그의 명성은 구대문파 장문인에 못지않았다. 무공 또한 현 무림 최강자인 정파십존(正派十尊)에 버금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잘생긴 호남형이어서 뭇 여인의 관심이 집중된 사람이었다.

유명한 인물을 접할 기회는 흔치 않기에 이 자리를 피할 생각이 사라졌다. 그만큼 남궁천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허락해주신다면 기꺼이 참석하겠습니다.”

주석하는 바로 수락하며 도수를 채근했다. 어째 도수는 내키지 않는 듯했다. 그렇더라도 주석하는 강제로 그를 데려갈 생각이었다. 어떤 자리이든 원군은 필요한 법이니까.

“오늘 회담이 잡힌 김에 창천일룡 대협을 이곳으로 초대했었거든요. 같이 가시지요.”

허윤이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안내했다.

**

백화루의 이 층, 주루의 한쪽 구석에 젊은 강호인들이 자리 잡았다.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주석하는 처음 허윤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지금 그가 앉은 탁자가 그날 정파와 사파의 젊은이들이 대립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예상과 달리 무겁지 않은 분위기에 주석하는 긴장이 풀렸다.

현재 그의 편은 오직 도수 하나. 나머지는 모두 정파의 인물로 적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맞은편에는 만나기 싫었던 그녀, 설약마저 있으니.

다만 이곳에서는 설약도 찌그러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무공도 미모도 완전 오징어가 되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주석하는 내심 폭소를 터트렸다.

“흑검문 소공자이셨군요.”

지금까지 주석하가 본 인물 가운데 가장 훤칠한 미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바로 남궁세가가 자랑하는 신예, 창천일룡 남궁천이었다. 사실상 현 정파에서 손에 꼽히는 최강자다.

“반갑습니다.”

주석하는 포권을 취해 인사했다. 옆에 앉은 도수도 성의 없이 따라 했다.

남궁천의 바로 옆에는 눈이 절로 돌아가는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궁천의 친동생인 검봉(劍鳳) 남궁서란이다. 남궁서란은 현 중원에서 최고 미인을 지칭하는 천상삼화(天上三花)에 속했다. 그만큼 그녀의 미모는 눈에 띄게 빼어났다.

강호의 청년기협들이 그녀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기를 원한다더니 과연 그럴만했다. 나이는 주석하와 비슷해 보였다.

지금 주석하의 맞은편에는 남궁천을 비롯하여 그 동생인 남궁서란과 곤륜파 삼인방인 허윤, 설약, 방덕산이 자리해있었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보통 인물이 아니기에 예전의 주석하라면 오금을 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생에서 강호를 굴렀던 경험과 지금 단전에 잠재된 내공으로 무장한 주석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앞으로 보지 말자고 하더니…….”

그의 합석이 못마땅한 듯 설약이 바로 시비를 걸어왔다.

당연히 주석하도 설약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당신 보러 온 게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시오.”

“흥, 서란이 보러 왔군요? 역시 남자들이란…….”

갑자기 왜 그렇게 말이 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주석하는 혀를 찼다.

“남궁 소저가 절색이긴 하지만 본 공자의 발걸음을 끌지는 않았소.”

실제로 주석하가 보기에 남궁서란의 미모는 지금까지 본 최상이 아니었다. 미모로 따지면 얼마 전에 보았던 우설금도 만만치 않았다. 오히려 그의 취향에는 우설금이 오히려 더 아름다웠다. 천상삼화에 버금가는 미모의 여인, 우설금에 대한 호기심이 한층 짙어졌다.

남궁서란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주석하는 남궁서란의 성격도 대단하리란 추측을 했다. 과연 유유상종이었다.

“주 공자, 오늘 처음 본 사이에 말씀이 조금 심하시군요.”

남궁서란의 질책에 주석하는 어색한 웃음을 머금고 입을 닫았다. 말이 안 통하는 여자들이다.

꼬투리를 잡은 남궁서란이 비웃음을 머금고 도발해왔다.

“주 공자는 수도승 출신인가요?”

“그게 아니라 낭자 정도의 미모를 본 적이 있어서요.”

“누구죠?”

“그게…….”

주석하는 우설금을 올리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째 그녀를 언급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사실 그도 그녀의 정체를 모르고 있으니.

“다른 천상삼화를 봤었나요?”

“그건 아니고…….”

“호호, 거짓이라 말씀을 못 하시는군요.”

남궁서란의 비웃음에 주석하는 적잖게 당황했다. 이 여인은 천상삼화가 아니라면 자신보다 못생겼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아! 무공이 아닌 외모로 평가받는 더러운 세상!

‘도수야 넌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사니?’

주석하는 괜히 옆의 중구난방으로 생긴 얼굴을 돌아봤다.

남궁서란은 자존심이 상한 듯 그를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중에 기회 되면 소개해 드리리다.”

“기대하죠. 과연 가능할지 모르지만.”

옆에 앉은 남궁천이 뒤늦게 여동생을 말렸다. 덕분에 두 사람의 설전은 간신히 막을 내렸다.

이번에는 정작 다른 곳에서 싸움이 붙었다. 주석하도 예상치 못한 이 싸움을 먼저 도발한 사람은 도수였다.

“방! 방 대협은 살검회와 만난 적이 있어?”

“살검회?”

방덕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표정을 보니 아는 것이 분명했다.

“최근에 곤륜십이검수가 살검회를 공격했지?”

“네놈! 살검회였구나?”

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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