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곤륜십이검수 (2)
뜻하지 않은 말다툼에 장내에 긴장이 돌았다.
도수는 방덕산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주석하는 살검회가 도건의 죽음을 파헤치다가 곤륜파와 만났을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살검회의 살겁을 일으킨 곳이 우설금의 마교가 아니란 걸까.
도수의 눈빛이 타는 듯 강렬해졌다.
정작 방덕산은 여유롭게 도수를 응시했다.
“살검회라…… 최근에 감히 겁도 없이 곤륜십이검수를 찾아왔더군.”
“그래서?”
“가만히 있을 곤륜십이검수라 생각하나?”
“이 자식이!”
도수가 발끈해서 일어나려는 순간 주석하가 어깨를 눌러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참아!”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도수를 노려보던 방덕산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회주란 자는 간신히 살아서 도망쳤다만…….”
살검회주를 죽이진 않았지만 살검회 멸문에 꽤 많이 개입했다는 암시였다.
부드득-
도수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분위기를 누그러트려 보려고 마련했던 술자리가 이상하게 흘렀다. 주최자인 허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설약과 남궁서란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이 자리의 최강고수이자 중원사룡의 일인인 남궁천은 무슨 상황인지 몰라 허윤에게 눈짓으로 묻고 있었다.
주석하는 눈을 찌푸리며 방덕산을 노려봤다. 이 상황이 고의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모호했다. 애초에 도수의 무공은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바닥이나 마찬가지여서 주석하 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주석하와 도수를 발톱의 때처럼 여긴 방덕산은 호탕하게 웃었다.
“굳이 지난 일을 들출 필요는 없겠지. 지금은 백호문과 흑검문의 일만으로도 바쁘잖아? 살검회 문제는 천천히 해결하자고, 물론 지금 당장 해결해도 상관없네만.”방덕산이 술병을 들어 남궁천을 비롯한 자기 쪽 사람들에게 술을 따랐다.
그 행동이 워낙 능글맞아 도수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주석하는 조용히 도수를 말렸다.
설약까지 술잔이 채워지자 방덕산이 도수를 향해 술병을 기울였다.
“자네도 받지? 술을 마시면 끓는 속이 좀 누그러질 거야.”
방덕산이 도수에게 권하는 술은 화해의 의미가 아니라 명백히 상대를 놀리는 행동이었다. 도수가 술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노려보고 있자 방덕산이 장난치듯 술병을 까닥거렸다.
“푸하하, 졸보 같은 놈! 겁먹었군.”
분노를 참을 수 없던 도수가 벌떡 일어나려는 순간 주석하가 재빨리 술병을 잡았다.
“이봐, 너무 나갔어!”
“뭐야?”
“네 말대로라면 네놈은 살검회의 원수야.”
“뭔 소리! 난 회주를 죽인 적 없다!”
“살검회 제자들은?”
“그놈들이 사람이냐? 인간 백정이지!”
욕설을 퍼부으며 방덕산이 술병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주석하는 술병을 놓아주지 않았다. 술병 하나를 두 사람이 동시에 잡고 양쪽으로 끌어당기는 묘한 장면이 시작됐다.
“술 마실 기분 아니니까 술 치워라.”
“감히 네놈이! 그러잖아도 정천신검을 죽였다는 네놈의 무공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방덕산의 조롱이 주석하를 향했다. 방덕산은 술병을 끌어당겼으나 주석하의 손에 잡힌 술병이 꼼짝하지 않자 음흉한 비웃음을 머금었다.
순간 주석하는 술병으로 전해오는 뜨거운 기운을 포착했다. 방덕산이 자신의 내력을 술병으로 불어넣고 있었다. 웬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내공 공격이었다.
주석하가 술병에서 손을 떼면 방덕산의 도발은 바로 끝이 난다. 다만 그때는 술병이 방덕산으로 넘어간다. 양측의 실랑이가 방덕산의 승리로 굳어지고 주석하와 도수는 모욕을 당한 셈이 된다.
기껏 술병 하나 넘기는 것뿐,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주석하는 포기하기 싫었다. 곤륜파와 방덕산이 살검회의 멸문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었다.
상황을 눈치 챈 도수가 재빨리 눈치를 줬다. 지금 이 자리는 무척 불리하니 절대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가 전해졌다.
“크흐흐.”
방덕산의 미소가 더욱 짙어지며 술병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술병을 잡은 주석하의 손도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방덕산의 내공에 주석하는 재빨리 경혼심법을 운용해서 내력을 끌어올렸다.
내력이 단전에서 빠져나오긴 했다. 다만 그 양이 본래 그의 것이었던 한 줌이다. 단전에 잠재된 웅후한 내력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젠장!’
되풀이되는 같은 현상에 주석하가 내심 욕을 하는 사이 방덕산은 자신의 우위를 확신했다. 상대의 당황한 표정이 그의 즐거움을 배가했다.
‘어떻게 이런 놈이 감히 사숙을 죽였지? 조금 더 가지고 놀아볼까?’
방덕산은 내력을 더욱 불어넣었다.
주변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실하게 인식했다. 붉게 달아오른 술병이 모든 정황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허윤은 안타까운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만류하려고 했으나 감히 사형의 행동을 저지할 수 없었다. 설약과 남궁서란은 재밌다는 표정이었고 남궁천은 다소 심각해진 얼굴로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도수가 끼어들려 했다.
“석하야!”
주석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술병을 손에서 놓으면 간단히 끝난다. 다만 이놈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곤륜파에서 손꼽히는 고수이자 곤륜십이검수의 일인이라더니 방덕산의 무공은 대단했다. 서서히 주석하가 버티기 어려운 지경까지 왔다.
여전히 주석하는 단전의 내공을 깨우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 내공은 목숨의 위협이 없으면 깨지 않는 것일까. 술병을 잡은 손이 뜨거워 익을 지경이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아, 대체 누가 내공을 전수했던 거야? 이왕 하려면 좀 쓸모 있게 해주지…….’
주석하는 그때의 꿈을 떠올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핏 보기에도 손목까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방덕산이 다시 빈정거렸다.
“흠,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그만해!”
옆에서 도수가 분노를 터트렸다.
“그만은 무슨! 감히 정천신검을 비롯한 곤륜파를 건드린 죄를 묻겠다.”
내친김에 방덕산은 더욱 공력을 끌어올려 주석하를 핍박했다.
이제 양상은 술병을 가운데 두고 방덕산이 주석하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처지가 됐다. 누가 말리지 않는다면 주석하는 치명적인 내상을 입을 것이다.
‘크으윽!’
주석하는 내력 공격에 온몸의 혈맥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아마 그에게 공격당한 마불이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주석하는 눈을 부릅뜨고 방덕산을 노려보며 신음을 흘렸다.
“으…… 네놈 지금 실수하고 있어…….”
“헛소리! 약자가 항상 그런 변명을 하더군.”
여유만만하게 방덕산이 끝마무리를 지으려던 순간이었다.
드디어 주석하의 단전에서 내력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어?”
방덕산은 갑자기 술병을 쥔 손에 고통이 전해지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와 달리 상대의 저항이 느껴졌다. 역시 소문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그는 내력을 끝까지 끌어올렸다.
고오오오-
술병이 붉게 타올랐다. 주석하의 바다처럼 깊은 내력이 폭풍처럼 술병을 통해 방덕산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 내력은 혈맥을 지나가며 타격을 주고 있었다.
방덕산은 경악하여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자신의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
“으으…… 으악!”
방덕산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남궁천의 일장이 술병을 때렸다.
퍼석!
술병이 산산이 조각나고 내부에 담겨 있던, 가열된 술이 증기가 되어 피어올랐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남궁천이 쓰러지는 방덕산을 붙잡았다.
두 사람의 내공 대결은 남궁천의 개입으로 막을 내렸다. 주석하는 붉어졌던 얼굴과 손을 금방 회복하고 평온한 상태로 돌아갔다.
반면 방덕산의 상태는 다소 심각했다. 내상을 입은 듯 안면이 일그러지고 제대로 몸을 펴지 못했다.
재빨리 남궁천이 내력을 불어넣어 방덕산의 내기를 진정시켰다. 방덕산은 곧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흐음, 벼룩도 재주가 있다더니 대단한데요?”
의외의 사태에 눈을 동그랗게 뜬 남궁서란이 주석하를 빈정거렸다.
“대단할 것도 없소. 상대를 얕잡아보고 덤빈 하룻강아지가 문제였을 뿐.”
주석하도 조롱을 되돌려주며 응수했다.
남궁서란이 눈썹을 상큼 올리며 재차 물었다.
“흑검문이라…… 흑검문에서 당신 같은 고수를 배출했다고는 믿을 수 없군요. 어디에서 무공을 익혔죠?”
“남궁세가에서 익히진 않았소.”
주석하의 빈정거림에 남궁서란이 발끈했다.
“너! 감히 알량한 재주를 믿고 남궁세가를 능멸하느냐?”
“예전에도 이 자식은 예의라곤 눈곱만큼도 없었어!”
설약이 옆에서 가담했다.
두 사람을 상대하기 귀찮았던 주석하는 벌떡 일어났다. 어차피 이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는 불가능하다. 백호문과 중재는커녕 더 불을 지핀 데다 살검회와 곤륜파가 저리 엮였으면 좋게 넘어가기도 틀렸다.
“앞으로는 얼굴 보지 맙시다.”
주석하는 냉랭히 말을 뱉고는 도수에게 가자고 눈짓했다.
“뭐야? 흑검문 나부랭이가…….”
남궁서란이 발끈해서 일어서려는 순간 진기 주입을 끝낸 남궁천이 동생을 말렸다.
남궁천은 이미 밖으로 나가버린 주석하를 뒤늦게 쫓아갔다.
“주 공자!”
비록 남궁천과는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인지라 주석하는 남궁서란과 달리 감정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무슨 일입니까?”
“동생이 좀 천방지축이라…… 너그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앞으로 볼 일도 없으니까요.”
주석하가 눈짓으로 인사하고 다시 몸을 돌렸을 때 남궁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공이 상당하시군요. 혹시…… 어떤 내공심법을 쓰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방덕산을 내공으로 눌렀다는 사실은 주석하의 내공이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흑검문처럼 작은 문파에서 그만한 고수를 길러내기 쉽지 않기에 물어본 것이다.
“경혼심법입니다.”
주석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뵙지요.”
주석하는 남궁천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도수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백화루를 나서는 주석하를 남궁천이 아쉬운 눈으로 지켜봤다.
**
삼경이 넘은 이슥한 밤.
덕양 외곽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모두 흑의를 입고 얼굴에는 복면, 머리에는 두건을 둘러 두 눈을 제외하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 사제, 확실한가?”
“제가 확인했습니다. 흑검문의 주석하라는 놈이 사숙을 죽였다고 회담장에서 실토했습니다.”
대답한 인물은 바로 방덕산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수하지 않을 수 없지.”
“맞습니다. 흑검문 따위에 우리 곤륜이 움츠리면 안 되죠. 곤륜십이검수의 위명을 보여줍시다.”
여기저기에서 호응이 일었다. 그들의 수는 정확히 열두 명이었다.
“그놈의 무공은?”
“별 것 없습니다. 우리 열둘이면 흑검문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도 웬만하면 이렇게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겁니다. 낮에 회담에서 그 자식들이 얼마나 뻔뻔하게 구는지…… 응징하지 않고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더라고요.”방덕산은 주루에서 있었던 내공 대결을 떠올렸다.
솔직히 어떻게 된 일인지 그도 기억이 없었다. 내공 대결을 벌이다 무자비한 힘에 억눌렸고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뿐이다. 주석하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응징을 계획했다.
“그렇지, 주제를 모르는 개는 패는 게 답이지.”
모두가 방덕산의 의견에 호응했다. 비록 속가제자라지만 정천신검은 그들과 무척 가까웠던 사람이었다. 그 복수를 주저할 그들이 아니었다. 정파라서 정의롭다는 생각은 밤의 세계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곤륜십이검수는 어둠을 타고 작전을 시작했다. 오늘 새벽이 오기 전, 흑검문은 문을 닫고 주석하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눈에 기이한 행색의 세 사람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