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곤륜십이검수 (3)
야밤에 무려 열두 명이나 모여서 움직이는 곤륜십이검수도 정상이 아니었으나 그들을 가로막은 자들은 더 이상했다.
불타는 홍의를 입은 여인과 눈이 내린 듯한 백의를 입은 자와 어둠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흑의를 입은 자. 야밤에 이남 일녀 조합이라니! 게다가 세 사람 모두 이십 대 안팎으로 젊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사실 곤륜십이검수는 남의 눈치를 볼 사람들이 아니었다. 정파인이라지만 혈기 왕성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했다. 지금 그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이유도 복수와 더불어 흑검문의 멸문이 강호에 도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직감한 이들은 세 사람 앞에서 행동을 멈췄다.
“뭐냐?”
방덕산이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걸었다.
지금 날강도나 마찬가지인 그들을 보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남녀 조합이 수상했다.
흑의를 입은 자가 앞으로 나서며 조용히 물었다.
“곤륜파인가?”
정체를 들켰다는 사실에 당황한 방덕산은 목에 힘을 주면서 윽박질렀다.
“알았으면 비켜라.”
흑검문을 처리하기 바쁜데 여기에서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흑의를 입은 자가 홍의 여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곤륜이라고 합니다.”
“가적성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아라.”
순간 방덕산은 어떤 기억이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 전에 사제인 허윤이 일검신성 가적성을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때 가적성을 추적했던 자들이…….
워낙 건성으로 들었기에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대화의 주제는 정천신검이었지 가적성이 아니었다.
어쨌든 눈앞의 이들이 곤륜파에 대항하는 사파 무리라는 사실을 심중으로 굳혔다.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흑검문에 가기 전에 몸을 풀 수 있게 되었으니. 이들이 누구인지, 정말 죽일만한 사람인지 굳이 확인할 이유는 없었다. 곤륜파에 대드는 것만으로도 그 죄는 넘치고 넘쳤으니까.
“우리가 남녀를 가렸나?”
“그렇지. 때로는 우리도 한 번쯤 사나워질 수 있지.”
“푸하하, 정파가 밤에도 정의롭다는 생각은 버려!”
껄렁대는 곤륜십이검수에게 눈짓한 방덕산은 가장 먼저 앞으로 돌진했다.
“우리를 만난 것을 불운으로 여겨라!”
현 무림에서 구대문파의 행동부대로 선두를 다투는 곤륜십이검수였다.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고수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해도 무방했다. 현 무림에서 손꼽는 최정상급 고수가 아니라면. 더구나 이런 작은 마을에서 그런 고수를, 그것도 야밤에, 하필 이곳에서 만날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감 팽배한 곤륜십이검수가 일제히 홍의 여인과 흑백의 남자에게 뛰어들었다.
콰앙!
순간 무형의 반탄력에 곤륜십이검수의 신형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
다음 날, 주석하는 흑검문 사람들과 함께 백화루로 갔다.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회담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그들은 전략을 세웠다. 무려 곤륜파와 남궁세가마저 백호문을 지원하고 있으니 일부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이 노리는 것은 적혈방으로부터 얻은 이권이 분명합니다. 그 가운데 알짜를 제외하고 자투리 몇 개를 넘기는 것으로 타협을 봐야 합니다.”
흑검자의 주장은 이러했고 주격은 내키지 않았으나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을 돌이켜보면 강한 상대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것이 장수의 지름길이었다.
“어차피 곤륜파가 오랜 시간 백호문의 뒤를 봐주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면 백호문이 스스로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데 이미 문주가 사망한 상황에서 백호문이 버티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때 우리에게 다시 기회가 올 겁니다.”흑검자가 장기적인 전략을 언급했다.
주격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주석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백호문은 날개가 꺾였다. 내버려 두어도 백도 문파의 견제를 받아 지리멸렬할 것이다.
현재 덕양에서 흑검문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흑도이니 앞으로 백도 문파의 견제를 집중적으로 받을 것이다. 앞으로는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오늘도 곤륜파와 남궁세가에서 참석하려나…….”
어제 술자리 분위기가 나빠서 오늘 회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염려됐다. 옆에서 걷던 도수가 신경 쓰인 듯 그를 힐끔거렸다.
주석하는 괜찮다는 뜻으로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약속 시각이 되었건만 아직 백화루에는 아무도 도착하지 않았다. 주석하 일행은 한쪽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타인을 기다리게 하는 행동은 자신들이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려는 의도다. 주석하는 그들의 졸렬한 태도에 혀를 찼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무려 약속 시각에서 반 시진이 지났음에도 백호문에서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흑검자의 안색이 점차 찌푸려졌고 주격은 연신 헛기침만 연발했다.
한참 후에야 백호문 제자로 보이는 한 청년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부문주님께서 오늘 회담을 연기하자고 하십니다.”
인내심이 다한 흑검자가 버럭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오? 대체 백호문에서는 약속을 개똥이라 여기는 거요?”
“그…… 그게…….”
제자가 우물쭈물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곡절이 있어 보여 주격이 조용히 상대를 달랬다. 머뭇거리던 제자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어젯밤에 곤륜파에서 변고가 발생했습니다.”
“무슨 변고?”
“곤륜십이검수가…… 시신으로…….”
“뭐라고?”
엄청난 충격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곤륜십이검수가 누구인가. 현 무림에서 가장 잘 나가는 무력 부대 아닌가. 그런 집단을 소리 소문 없이 날려버리려면 대체 얼마나 엄청난 고수가 일을 벌여야 할까.
상상조차 되지 않은 사건에 모두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였다.
“방덕산은 어떻게 되었소?”
도수가 급하게 질문했다. 어제 술자리에서의 굴욕을 떠올려서다.
“방 대협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도수의 안면에 안도와 한숨이 드리워졌다. 살검회의 원수라 할 수 있는 곤륜십이검수가 죽었다니 그는 만감이 교차했다. 이런 엄청난 사건을 벌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물론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주석하가 살검회의 원수를 갚아준 것일지도?
주석하를 바라보는 도수의 눈에 존경이 어렸다.
백호문 제자가 돌아간 후에도 침묵이 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이런 일이 왜 발생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덕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주 조용한 작은 마을이었다.
허탈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경험한 주격이 일행을 재촉했다.
“우리도 돌아가세.”
돌아가는 주격을 허겁지겁 따라가면서 주석하는 문득 우설금을 떠올렸다. 현재 그가 아는 최강고수다. 갑자기 우설금이 떠오르는 것은 괜한 기우일까.
**
곤륜파가 정신없는 덕분에 백호문도 잠잠해졌다.
그날부터 주석하는 심법에 매진했다. 오늘도 처소에서 경혼심법 책을 꺼냈다.
기본적인 구결을 다 외웠으나 여전히 어딘가 미흡한 기분이었다. 책자를 펴고 한 구절구절을 음미하다 보면 새로운 깨달음이 얻어지리라는 생각에 책에 적힌 글자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젠장! 흰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자였다. 깨달음은커녕 잠만 쏟아졌다.
“역시 별 볼 일 없었나?”
밀려드는 근본적인 의심을 주석하는 바로 머리를 흔들어 떨쳐냈다. 지금 경혼심법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경혼심법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 아닌가.
다만 그도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단전에 깃들어 있는 여러 기운 가운데 한 가지 기운만은 경혼심법에 반응하고 있었다. 이것은 서로 상성이 맞음을 의미했다.
즉 경혼심법의 심득이 깊어지면 적어도 이 하나의 기운만은 제대로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욕심낼 때가 아니라 생각한 그는 열심히 경혼심법을 운용했다.
“왜 안 되는 거냐…….”
심법을 운용하면 내력이 움직여줘야 하는데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목숨이 위협을 받아 그 기운이 단전을 빠져나오면 간신히 일부 운용할 수 있었다. 다만 단전에서 빼내는 방법이 목숨을 거는 방법뿐이라니 한숨이 푹푹 쏟아졌다.
그가 모르고 있는 무엇이 있어 보이는데 딱히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흑검문에는 내공심법에 조예 있는 자가 없고 친구인 도수도 의문을 풀어줄 수준이 되지 못했다.
그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여동생 주소은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응? 뭐냐?”
“오빠는 뭐해?”
“나? 수련 중이지.”
주석하는 어깨를 쫙 펴고 손에 든 책을 쓱 내밀었다.
“웬일이래…….”
입술을 삐죽 내밀지만 주소은의 눈빛을 보니 존경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를 아끼는 주소은의 이런 태도에 주석하는 미소를 머금었다.
“요즘 오빠가 갑자기 고수가 된 느낌이야.”
“고수는 무슨.”
“무림고수를 해치웠잖아?”
“운이 좋았던 거지.”
다행히 주소은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닥친 흑검문의 위기를 주석하 덕에 잘 넘기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했다.
“그런데 여기는 왜 왔냐?”
“아!”
갑자기 주소은이 몸을 배배 꼬았다. 그녀의 이런 태도를 처음 보았기에 주석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래?”
“소…… 손님이 왔어.”
“손님? 어디에 있는데?”
“밖에.”
손님을 처소까지 데리고 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지금까지 흑검문을 방문한 손님이 주석하를 만날 일이 없기도 했었고 주석하가 친구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드물었던 탓이다. 게다가 지금 주소은의 행동은 어딘지 어색했다.
‘내 손님인데 왜 저래?’
얼굴이 살짝 물든 것이……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알았어, 가보자.”
주석하가 몸을 돌리는 순간 주소은이 그를 붙잡았다. 그의 옷매무시를 쓱 살펴봐 준 주소은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오빠, 절대 화내거나 무례하면 안 돼.”
대체 누구이길래?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며 주석하는 방문을 열었다.
앞마당에는 낯익은 한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 존재만으로도 주위를 압박하는 인물, 정파의 떠오르는 신성이자 중원사룡의 선두 주자. 남궁세가의 소가주라던 남궁천이었다.
남궁천과의 인연이라면 며칠 전 주루에서 인사한 게 전부였다. 남궁천이 그와 방덕산의 내공 대결을 깨트렸으니 그의 대단한 무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정파의 후기지수가 이처럼 흑도 문파를 방문하는 것은 정말 이례적이다. 무슨 목적인지 짐작이 가지 않아 주석하는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뒤에서 주소은이 가볍게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오늘따라 왜 이래?’
주석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궁천에게 인사했다.
“창천일룡 대협이셨군요. 어쩐 일이십니까?”
“주 공자님을 뵈러 왔습니다.”
남궁천이 예의 바르게 포권으로 답례했다.
“아, 그날은 신세 많이 졌습니다. 대협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큰일이라뇨. 주 공자의 심후한 공력에 오히려 감탄한걸요.”
속으로 씁쓸함을 느꼈으나 주석하는 고개를 주억였다.
남궁천과 인사하고 있으려니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얼핏 뒤를 슬쩍 보니 주소은이 들뜬 표정으로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어휴….’
새삼 느끼는 바가 있어 앞을 살펴보니 얼굴이 준수하고 체격이 훤칠한 남궁천에게 그녀가 관심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비록 누이동생인 남궁서란의 성격이 좀 개차반인 듯하지만 남궁천 본인은 꽤 곧은 성격이었다.
‘그래도 정사로 갈라진 판에…….’
주석하는 내심 주소은을 위로하며 그를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