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4화 (24/273)

24화 곤륜십이검수 (4)

“곤륜십이검수 사건은 해결됐습니까?”

“나도 그게 궁금해서 공자를 만나러 왔습니다.”

남궁천도 비슷한 의문을 가졌나보다. 아직 주석하는 구체적인 사건 내용을 모르고 있었기에 남궁천의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

“곤륜십이검수라면 아무나 함부로 건드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현 무림 최강이라는 정파십존, 흑도팔군을 제외하고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래서 더 오리무중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사건은 곤륜파에서도 주석하와 흑검문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설사 흑검문 전체 전력이 곤륜십이검수를 노렸다 해도 이처럼 깔끔하게 죽일 수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제가 여기 온 이유도 전후 사정을 좀 알고 싶어서입니다. 허윤 소협의 말에 따르면 주 공자도 최근 여러 일로 얽혀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저도 일검신성을 호위했으니까요.”

“그래서…… 혹시 아시는 것 있습니까? 짐작 가는 인물이나요.”

남궁천의 말투는 정중했다. 그에게서 정상급의 무공을 가진 자의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당연히 있다. 그날 사건을 들었을 때부터 주석하는 우설금이 의심스러웠다. 그녀 정도의 고수라면 곤륜심이검수를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그녀는 곤륜파와 적대할 이유도 있다. 그녀가 마교 인물이라면.

하지만 우설금을 꺼내봐야 이들이 믿어줄까. 그처럼 강한 고수가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시기에는 그 누구도 마교가 중원에 관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또 우설금에게 괜히 밉보일 짓을 할 이유도 없다. 정사를 떠나 정파가 그에게 잘 해준 것도 아니고. 굳이 남 좋은 일을 해주고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는 척하던 주석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남궁천에게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그들의 대화는 곧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가 꼭 그 때문은 아닙니다.”

“다른 일이 또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 주 공자를 보니 꽤 특이하신 것 같아서요.”

“제가요?”

주석하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뒤를 힐끔 보니 여전히 주소은이 애절하게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와 눈길을 마주친 주소은은 어떻게든 좋은 분위기로 대화를 지속하라고 응원하는 듯했다. 동생의 바람을 저버릴 수도 없고…….

“사실 믿지 않았습니다. 정천신검을 죽였다는 것 말입니다.”

주석하는 그날 백호문과의 회담과 주루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경계하는 기색을 띠었다.

“아, 제가 무례했나요? 저도 압니다. 백호문과의 사건은…… 사실 백호문이 먼저 흑검문을 건드린 것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지요. 다만 정파라는 틀에 묶여 있다 보니 곤륜파나 남궁세가도 백호문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긴 합니다만. 서로 입장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절대 백호문이 잘한 게 아니죠.”주석하는 내심 흐뭇했다. 정파인이면서 이런 바람직한 생각이라니. 그날 남궁천이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아 좋게 보았었는데 과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흑검문의 사정을 봐주시는군요.”

“봐준다기보단 같은 편이라고 무조건 잘못을 덮을 수는 없는 거죠.”

어쨌든 정과 사에 얽매이지 않는 것 같아 주석하는 마음에 들었다.

남궁천이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주루에서 방덕산 대협과 다투는 장면을 본 후 당신이 예상외의 고수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 네.”

그날 술병을 들고 내공을 겨루던 때의 주석하는 단전에서 잠자던 내력 일부가 깨어난 시점이니 남궁천이 그를 고수라고 간주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름 없는 흑검문에서 엄청난 고수를 길러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방문해보고 싶었습니다.”

“하하, 전 그냥 발버둥 치고 있을 뿐입니다.”

주석하는 기꺼이 환영했다.

이리저리 무공에 관한 견해가 이어졌다. 전생을 통틀어 주석하는 남궁천 만큼 무공이 고절한 인물을 처음 만났다. 그 때문에 물어볼 곳이 없어서 담아두었던 여러 의문을 해결하고자 질문했다.

두 사람은 연무장을 비롯하여 후원을 거닐었고 그 뒤를 일정 간격을 두고 주소은이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정작 주석하는 대화에 정신이 팔려 주소은이 따라다니는지 전혀 몰랐다.

주제는 다시 내공에 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남궁 대협, 혹시 만년설삼을 드신 적 있습니까?”

“하하, 전설의 영약을 어떻게 먹어봤겠습니까? 남궁세가에도 만년설삼은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만년설삼이라고 무조건 내공에 좋은 것은 아니지요?”

“그렇죠. 나쁘진 않지만 그 효능을 전부 얻으려면 자신의 내공과 상성이 잘 맞아야지요. 산삼은 따뜻한 기운을 갖고 있어서 음공을 연마한 사람이라면 이득을 보기 어렵지요.”이어서 남궁천이 내공에 대한 자신의 지론을 열심히 설명했다.

“만년설삼을 먹을 때도 조심해야죠. 무턱대고 먹는다고 그 기운을 모두 내공으로 흡수할 수 없습니다. 특히 내공을 제어할 능력, 즉 제대로 된 심법이 없다면 그 기운은 몸에서 잠자게 됩니다. 몸에 잠든 기운은 서서히 사라지지요. 그러므로 만년설삼을 먹을 때는 그 기운을 제대로 인도해줄 내공 고수가 옆에서 도움을 주어야 해요.”잠자는 기운이 서서히 사라진다는 말에 주석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그에게 숨은 내력이 어마어마한데 그 내력이 사라진다면? 다시 전생처럼 고난이 시작되는 건가? 생각하기도 싫은 현실에 주석하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럼 고수의 도움을 받으면 그 기운을 본인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아무래도 조금은 도움 되지 않겠습니까?”

“하아……!”

주석하의 한숨에 남궁천이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생각에 잠겼다. 주루에서 보았던 주석하의 행동을 다시 되새겨보는 것이다.

“흠, 주 공자님, 그때 경혼심법을 익혔다고 하셨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제가 알아보니 경혼심법은…… 백 년 전쯤에 등장한 심법이더군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우연히 얻었거든요.”

남궁천이 후원을 거닐던 발걸음을 멈췄다. 다소 주저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주 공자, 그날 놀라운 내공을 견식 하기는 했습니다만…… 외람된 말인지 모르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내력 사용이 조금 어색하더군요. 제 짐작에…… 방금 만년설삼 이야기도 그렇고 혹시 영약을 드셨는데 그 기운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그렇게 설명이 되나? 지금 주석하의 최대 관심사는 단전에 잠재된 내력을 어떻게 제대로 다룰 수 있는가이다. 무공에 박학다식한 남궁천이라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내공은 무공 가운데서도 대단히 은밀한 부분이라 심도 있는 의견을 교환할 수 없는 분야다. 하지만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아, 눈치채셨군요. 어떨 때는 자유롭게 운기 되다가 어떨 때는 막히다가 합니다. 그 때문에 저도 고민입니다.”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무공을 익힌 남궁천은 금방 주석하의 문제점을 이해했다.

“주 공자, 외람되지만 제가 한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정상이라면 이는 대단히 무례한 제안이기에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상대의 몸 내부를 관조하는 행위는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를 깨달은 남궁천이 금방 사과했다.

“아, 거기까진 좀 힘드시겠네요. 그럼…….”

“아닌데요. 괜찮습니다.”

“예?”

아무렇지도 않게 허락하는 주석하의 태도에 오히려 남궁천이 깜짝 놀랐다. 주석하의 처지에서 보자면 남궁천은 적대 관계인 사람이다. 선 긋듯 정사로 나뉘어 있으니 개인적으로 신뢰하더라도 믿기 어렵다.

정작 주석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궁천은 고수 중의 고수 아닌가. 현 무림에서 손꼽히는 최정상급 고수를 제외하면 중원사룡의 일인인 그를 따를 자가 없다.

평생 무림을 주유하더라도 한번 만나보기 힘들 그런 엄청난 고수다. 그런 고수를 만나 조언을 얻을 기회가 생겼는데 이를 거부하면 그건 바보가 아닌가.

사실 남궁천 같은 사람이 이름 없는 소문파인 흑검문을 방문한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기도 하고. 어쨌든 급이 다른 인물인 그에게 주석하는 별것 아닌 존재여서 굳이 정사를 구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석하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쉽게 결정했다. 이 사람에게 뭐라도 도움을 받으면 좋다. 못 받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제가…… 요즘 내공 때문에 솔직히 고민이 많거든요. 가능하다면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음, 기꺼이 도와드리지요.”

남궁천도 별다른 의심 없이 바로 수락했다.

후원을 거닐던 그들은 작은 연못가의 평상에 앉았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요?”

남궁천이 그에게 평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으라고 요구했다.

주석하는 남궁천에게 등을 내보이고 앉았다. 다만 이 상태에서 남궁천이 그의 내부를 간찰하게 되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단전에 잠재된 내력만 들킬 뿐이다.

“남궁 대협, 먼저 제 등을 세게 한 대 쳐주시겠습니까?”

주석하는 평상의 난간에 몸을 밀착시키며 요구했다.

“예? 그게 무슨…….”

“하여튼 한 대 쳐 보시지요.”

주석하는 내력을 운기했다. 역시 단전의 내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퍽!

마치 어린아이가 때리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충격이 등에 전달됐다.

“아아, 그렇게 말고요. 더 세게.”

퍽!

젠장. 이 남자는 아침을 굶었나? 주석하는 인상을 쓰며 다시 요구했다.

“그러지 말고요. 저를 원수라 생각하고 제대로 한 대 쳐보세요.”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요구에 남궁천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도무지 짐작되지 않았다.

“저 안 다치니까…… 제대로 충격을 받게끔 때려 봐요.”

남궁천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주석하의 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얼핏 보기에 주석하는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서생처럼 보인다. 무공이 경지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내공을 갈무리할 수 있다지만 하수가 고수 앞에서 그 경지를 숨기기란 쉽지 않다.

그날 주루에서 주석하에게 놀라움을 표시한 이유도 이런 부분이었다. 엄청난 내력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평소에는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았으니까.

남궁천은 주석하가 장담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하시지요.”

남궁천은 내력을 손바닥에 실었다. 눈앞의 이 인물은 무공 고수이니 이 정도 충격은 별것 아니라고 세뇌하면서 강력한 일장을 퍼부었다.

퍼억!

엄청난 충격이 주석하의 등에 가해졌다.

‘크윽!’

주석하는 난간에 그대로 엎어지며 신음을 토했다. 젠장, 치라고 한다고 이렇게 세게 패다니. 이건 사심이 담겨 있는 게 분명하다.

내공을 끌어올릴 때마다 이렇게 얻어터져야 한다면 차라리 안 하고 말겠다며 저주하는 사이 단전에서 꿈틀거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주석하는 재빨리 경혼심법을 운용하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위험에 처했다고 인식했는지 내력이 온몸을 돌기 시작했다.

주석하는 심법을 운용하면서 내력을 제어하려 애썼다.

그 순간 남궁천 또한 그의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장심을 등에 댔다.

주석하의 등으로 뜨거운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그 기운은 주석하의 내력과 잠시 엉키며 경쟁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서로 어울리기 시작했다.

편안해진 주석하는 남궁천의 도움을 받아 내력을 일주천했다.

한 번, 두 번.

지금까지와 달리 깨어난 내력은 금방 사그라지지 않았다.

고오오오-

주석하의 주위로 강렬한 기운이 번졌다. 그 기운은 남궁천마저 놀랄 엄청난 것이었다.

지금 주석하의 혈맥을 돌고 있는 내력은 공력이 심후한 남궁천도 대적하기 어려울 정도가 아닌가.

남궁천은 심혈을 기울여 주석하의 운기를 도왔다.

정작 남궁천마저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지금 주석하의 몸을 도는 내력이 전부가 아닌, 다섯 기운 가운데 한 가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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