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검천하-25화 (25/273)

25화 백호광객 (1)

운기 중에 주석하는 지금까지와 다른 편안함을 맛보았다.

예전에는 내력이 제멋대로 단전을 벗어나 밀물이 밀려오듯 혈맥을 돌아다녔다. 경혼심법으로 내력을 유도하면 일부 제어가 되긴 했으나 완벽하지 않았다. 그렇게 몸속을 떠돌던 기운은 위험이 사라지고 심신이 안정되면 언제 나타났느냐는 듯 순식간에 단전으로 사라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경혼심법 의지와 남궁천의 유도에 맞춰 계속 일주천을 지속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없던 현상이기에 주석하도 신이 났다. 남궁천의 노련함은 실로 놀라웠다.

그가 내력을 손끝으로 모으면 자연스럽게 손끝으로 모였고 발바닥 용천혈으로 돌리면 그곳으로 모였다. 마치 완전하게 자신의 일부가 된 기분이었다.

비록 다섯 진기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으나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주석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운기에 집중했다.

무려 다섯 번에 걸쳐 일주천을 마친 주석하는 마지막으로 단전으로 내력을 돌려보냈다. 단전 부근까지 내력을 인도한 남궁천의 내력은 그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빠져나갔다.

주석하는 남궁천의 인품에 감탄했다.

지금 이 순간 남궁천이 작심해서 그를 해치려고 그의 단전으로 내력을 밀어 넣었다면 그는 큰 중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그의 단전을 탐색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도 남궁천은 조금도 주저 없이 바로 물러났다. 상대의 허락 없이 단전을 살피면 예의가 아님을 몸소 실천했다.

“후우.”

주석하는 운기조식에서 깨어났다.

그의 눈앞에서 남궁천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아주 개운해졌어요.”

솔직히 개운해진 정도가 아니었다. 다시 시도해보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진기 하나는 그의 것처럼 다룰 수 있게 된 듯했다.

“잘 되었네요. 주 공자의 내력이 심후하여…….”

“이 모든 게 남궁 대협 덕분입니다.”

주석하는 정중하게 예의를 표했다. 타인을 강하게 만들어 주기란 쉽지 않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사람의 본성이 절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물며 강해지려는 욕망이 하늘을 뚫는 무림인들은 더 하다. 그렇기에 오늘 남궁천의 선의는 큰 은혜라 할 수 있었다.

“제가 느낀 바로는 주 공자의 내력이 어마어마하더군요. 정말 만년설삼을 드셨습니까?”

“만년설삼은 아니고…… 비슷한 기연을 얻었습니다.”

주석하는 적당히 둘러댔다. 그렇다고 마교 본산인 십만대산에서 내공을 얻어 이 시대로 회귀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정말 대단합니다.”

남궁천이 아낌없이 축하해주었다.

그때 주소은이 차를 가져왔다. 그들의 운공이 길어지자 안으로 들어가서 차를 준비했던 모양이었다.

“차 드시고 말씀 나누세요.”

주소은이 다소곳하게 두 사람 앞에 찻상을 놓았다.

이 여자가 언제부터 이렇게 조신해졌지? 주석하는 동생의 행동에 실소를 터트리며 남궁천에게 차를 권했다.

“남궁 대협, 솔직히 오늘 감탄했습니다. 저는 사파라 서로 적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도와주시니…….”

“오늘은 정사를 떠나 주 공자에게 관심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날 주 공자가 인의를 저버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으니까요. 사실 정파 사파가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보다는 사람의 성품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주석하는 남궁천의 대답에서 지금까지 그가 막연하게 가졌던 정파에 대한 선입견을 일부 바꿀 수 있었다. 사실 그의 전생 오 년을 따져보면 그를 정말 괴롭혔던 자들은 흑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파를 세상의 악이라 간주하고 몰아붙인 것은 정파 쪽 사람들이었다. 사파라 볼 수 있는 마교는…… 인간이 아니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어느 쪽도 그의 기준에서 올바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생에서는 정파니 사파니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냥 흑검문이 사파이니 사파에 속해있을 뿐.

“오늘 주 공자의 심후한 무공에 감탄했습니다. 저는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남궁천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말씀하시지요.”

“정파에 서든 사파에 서든 사람을 존중하고 의롭게 살아 주십시오.”

당연히 주석하도 이 의견에 찬성했다. 그의 목표는 어느 쪽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목에 힘주고 살아가는 것이니까.

“물론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주소은이 얼굴을 숙인 채 조용히 듣고 있었다.

**

남궁천을 배웅한 후 문주인 주격을 찾은 주석하는 분위기가 예상외로 심각해서 놀랐다.

사무를 관장하는 대청에는 주격이 신옹과 흑검자와 함께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요 며칠 백호문으로부터 별다른 선전포고가 없었기에 상대적으로 흑검문은 평온한 상태였다.

“잘 왔다. 앉거라.”

주격이 한쪽 옆 의자를 가리켰다.

“그들이 정말 정사대전을 계획하고 있단 말이지요?”

주석하의 눈썹이 꿈틀했다.

정사대전?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그의 전생에서 경험했던 정사대전은 정말 끔찍했다.

“그렇습니다. 정사대전이라고 하기엔 조금 낯간지럽습니다만…… 덕양의 정파가 모두 모여 연합군을 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흑검자가 입수한 정보를 풀어놓았다. 역시 그 정사대전은 아니었다. 덕양에 있는 정파 쪽 다섯 문파가 연합하여 거사를 계획하는 조짐이 포착되었다고 했다. 평소 그들이 무리 지어 일을 벌이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작금의 상황은 사뭇 심각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소?”

“제가 적혈방 시절에 타 문파에 뿌려둔 세작들이 꽤 됩니다.”

적혈방이 흡수되면서 그 하부조직도 고스란히 흑검문으로 넘어오다 보니 뜻밖에 이런 이점이 생겼다. 물론 세작을 심는 행위는 주격의 성향과 맞지 않았으나 지금 그런 문제를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알다시피 이 동네 흑도는 우리를 제외하면 변변한 곳이 없잖습니까?”

백호문에서 추진하던 복수가 곤륜십이검수 문제로 결국 덕양의 정파 전체로 옮겨간 느낌이었다.

“허어, 백호문 하나도 벅찬 판에 큰일일세.”

주격이 안절부절못했고 옆의 신옹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번에도 곤륜파가 끼어든답니까? 그때처럼 남궁세가도? 아! 그렇지. 소문주님, 오늘 남궁세가 공자가 방문했다고…….”

신옹이 다급하게 주석하에게 물었다.

사실 문주가 없는 백호문이야 그리 두렵지 않다. 문제는 그 뒷배다. 곤륜파는 감히 흑검문이 상대할 문파가 아니었고 남궁세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곤륜파에 변고가 발생하여 회담에서 빠지자 백호문이 바로 꼬리를 내린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초미의 관심 속에 주석하는 말을 더듬었다. 그렇다고 남궁천이 그의 무공 수련을 도와주었다고 털어놓기엔 켕기는 부분이 많았다.

“차 마시고 갔어요. 다행히 우리 흑검문을 나쁘게 본 것 같지는 않고요.”

모두의 안면에 안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지! 누가 우리 아들을 나쁘게 보겠느냐?”

주격의 환호성에 흑검자가 바로 끼어들었다.

“염탐하러 왔을 겁니다. 우리 쪽에 고수가 있는지, 백호문을 칠 의도가 있는지 그런 의심 때문이겠지요.”

주석하가 보기에 흑검자 이 사람은 말이 많은 게 문제였다. 책사로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으나 가끔 자신감이 넘쳐 주제를 넘는다.

“여기에 뭐가 있다고…… 그래서 정파 쪽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거요?”

주격이 다그쳤고 흑검자가 설명을 자세하게 덧붙였다.

문주가 죽으면서 흑검문에 보복하기 힘들어진 백호문은 다른 전략을 쓰게 됐다. 도움을 줄 여지가 사라진 곤륜파를 배제하고 덕양에 있는 다른 백도 문파를 끌어들였다.

덕양에서 흑도를 몰아낼 호기란 주장에 타 문파들이 설득당했다.

“그래서 그동안 외부에 나가 있던 문도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있답니다. 이건 분명히 일전을 벌이려는 의도겠지요. 한 문파가 아닌 모든 문파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니 확실합니다.”

“가장 고수는 누구요?”

“문주를 제외하면…… 이번에 돌아오는 인물 가운데 두 사람이 문제입니다.”

사실 덕양의 소문파에서 인재를 배출해봐야 특별한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다만 매우 껄끄러운 두 사람이 있긴 했다. 일전에 곤륜파 속가제자였던 정천신검 수준의 고수다.

“두 사람이나?”

“한 사람은 죽은 백호문 문주의 사형으로 알려진 백호광객입니다. 원래 백호문을 일으킨 자인데…… 뒤늦게 문주에게 일임하고 본인은 강호로 무공을 수학하러 떠났지요. 지금 백호문의 위기를 듣고 달려오고 있답니다.”흑검자가 언급한 인물은 백호문의 개파조사인 백호광객(白虎狂客) 선우범으로 성격이 지랄맞다고 알려져 있었다. 끼어들기 좋아하고 다혈질이라 사고를 자주 일으키다 보니 한 문파를 이끌 그릇과 거리가 멀었다. 그 때문에 고강한 무공에도 불구하고 문주 자리를 내놓고 강호로 나갔었다.

“다른 한 사람은 창무관의 관장 사숙으로 화산파의 속가제자입니다. 섬서성 일대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별호는…… 소화자라 했던가…….”창무관은 덕양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무관이었다. 화산파 속가제자였던 소화자(少華子)의 제자가 설립하여 꽤 유명했다.

구대문파의 제자라면 큰 문제이지만 속가제자라는 말에 주석하는 바로 흥미를 잃었다. 일전의 정천신검 수준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격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허, 어쩌다 그런 고수들까지…… 이래서야 우리 흑검문의 생존이 위태롭지 않겠소.”

흑검자가 바로 고개를 조아리며 주석하의 눈치를 봤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정천신검마저 해치운 소문주님이 있잖습니까?”

“무슨 소리! 우리 아들은 닭 잡을 힘도 없어. 그건 운이 좋아서였지. 어쨌든 작금의 상황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 걱정이오.”

“아닙니다. 위기 속에 기회라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만 잘 버티면 덕양에서는 그 누구도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주격의 걱정과 흑검자의 달래기가 계속됐다.

정작 주석하는 별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 잘 버텨오지 않았던가. 앞으로도 흑검문을 노리는 자는 모두 혼쭐을 낼 생각이었다. 기세 싸움에서 밀리면 훗날 피곤해지는 법이다.

주석하가 침묵하자 주격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당부했다.

“석하야, 걱정하지 말거라. 이 아비만 믿어라. 넌 조금도 다치면 안 된다.”

“소자, 알고 있습니다.”

주석하는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흑검자의 주관으로 몇 가지 대책을 수립한 후 회의가 마무리됐다.

대책이라고 해봐야 타 문파의 정보를 확실하게 캐오자는 것이 전부였다. 흑검자의 의견에 따르면 결국 저들이 노리는 것은 이권이므로 견디기 어려우면 적혈방을 통합하면서 얻은 이권을 내놓으면 충분하다고 했다.

문파의 존립을 위협할 일이 없으리란 견해에 주격도 안심했다.

듣고만 있던 주석하는 생각을 달리했다. 전생에서도 외부의 힘에 휘둘리다 보면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렇기에 그는 백도 문파 연합에 굴복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다만 그들이 강해지기 전, 그들이 모이기 전에 와해시키는 게 전략상 유리하다. 이번 연합의 핵심은 지금 덕양으로 달려오는 두 인물, 백호광객과 소화자로 알려져 있으니 이 둘을 우선해서 해치워야 한다.

지금까지의 사건은 적이 먼저 공격해왔거나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다면 이번에는 처음으로 먼저 적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전에 처리하면 훨씬 적은 노력으로 바로잡을 수 있으니까.

‘하아, 편하게 살기도 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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