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백호광객 (2)
하남이나 섬서 등 외지에서 사천의 덕양으로 오는 길목에 양주가 있다.
늦은 시각, 양주의 외곽 한 주점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손님마저 다 돌아간 이 시각에 주점 주인은 마지막 손님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벌써 며칠째 이곳에서 숙박하며 술을 마시는 손님이었다. 나이는 대략 오십 대 초반의 장한이었고 시커먼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얼굴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흡사 산적처럼 보였다. 솔직히 하는 짓도 산적과 진배없었다.
이 장한이 앉은 탁자에는 이미 십여 병의 술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저만큼 술을 마셨다면 인사불성이어야 하는데 저 장한은 아직도 쌩쌩했다.
‘허구한 날 저러고 있으니…….’
주인장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매일 저렇게 술을 마시고도 버티는 것을 보면 대단한 술꾼이 확실했다.
술을 팔아주니 좋아야 하건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째 마신 술과, 밥, 거기에 방값까지. 주인의 속이 터졌다.
“여보게, 주인장! 술 떨어졌어!”
“손님! 그만 마시지 않으시렵니까?”
장한의 눈썹이 쓰윽 올라갔다.
“자네, 내가 술값 안 낼까 봐 그러지?”
“아, 아닙니다. 많이 취하신 듯하여…….”
“이봐, 내가 소싯적에는 말이지, 한 달 내내 이만큼 마시고도 전혀 안 취했었다고!”
장한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예, 예! 그렇고말고요! 술 대령하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술에 취한 목소리였지만 어쩔 수 없이 주인장은 술을 한 병 탁자에 올렸다.
탁-
다소 불쾌하게 술병을 올려놓자 다시 장한의 잔소리가 계속됐다.
“이봐, 내가 누군 줄 알아? 나, 백호광객이야! 백호광객! 내 동생들만 오면 이 술값 따위는 바로 갚아줄 거야. 걱정하지 말라고!”
무림인이 아닌 주인장은 백호광객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름 없는 낭인 무사가 그럴듯한 별호를 붙이고 영웅 흉내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대충 선후를 파악해 보니 동생이 와야 술값을 낸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때가 언제일까. 그때까지 무전취식 하는 장한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푹푹 쏟아졌다.
쫓아내자니 무림인이라 겁도 나고 이미 들어간 밥값, 술값, 방값이 아까웠다. 손해 보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이 동생이 와서 돈을 내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얼른 동생이 오기만을 바라야지…….”
슬그머니 불만을 토하는 주인장의 귀에 백호광객의 한탄이 들려왔다.
“아! 이 자식들 왜 이리 굼떠? 여기에서 술 마시고 있으라더니…….”
벌컥!
그때 주막 문이 열리며 두 인영이 들어왔다. 갑자기 들어온 손님을 쓱 쳐다본 백호광객이 안면을 찌푸렸다.
“으음, 동생이 아니군…….”
야심한 시각에 젊은 두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자 주인장은 저절로 간이 오그라들었다.
시커먼 흑의를 걸친 두 남자는 영락없는 강도였다. 거기다 생김새는 또 어떤가. 한 녀석은 그나마 귀공자처럼 생겼는데 다른 한 녀석은 차마 얼굴을 표현할 수가 없다. 강도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 수준이다.
오늘 운이 다했다고 생각한 주인장이 한숨만 내쉬는 사이 두 청년이 구석에 자리 잡았다.
“밥을 먹어야겠지?”
“후아, 며칠 만에 제대로 먹어보냐.”
강도라고 써 붙인 녀석이 손을 까닥이며 주인장을 불렀다.
“주인장, 지금 되는 거 뭐 있어요?”
“대충 아무거나 됩니다.”
“그럼 아무거나…….”
“아무거나란 음식은 없는데요?”
“있다며?”
얼굴을 표현할 수 없는 녀석의 인상이 험악해지자 주인은 재빨리 태도를 바꿨다.
“만둣국 해드리겠습니다.”
“그럼 그거 두 그릇만 주세요. 그리고…… 방 있죠?”
“물론입니다.”
아무래도 오늘 주막 분위기가 심상찮다고 생각한 주인장이 잽싸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
주석하는 만둣국을 먹으면서 저쪽 구석의 탁자에 앉아 술을 퍼마시는 장한을 힐끔거렸다.
어찌 보면 정상인데 묘하게 신경을 거슬렸다. 이미 취했음에도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자니 술이 사람을 마시는 모양새다.
술이 과하면 반드시 사고를 치게 마련. 그 사고가 오래지 않아 발생할 것 같은 기분에 주석하는 괜히 마음을 졸였다.
“왜에? 맛없어?”
그의 시선을 따라 장한으로 눈길을 옮기던 도수의 입술이 흐뭇하게 벌어졌다.
“크흐, 마시고 싶다고 얘기하지!”
도수 이 녀석은 눈썰미가 저래서야 어떻게 자객 노릇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한턱낼까?”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며 은자를 찾는 행태가 정말 술을 시킬 모양이었다. 도수가 주인장을 부르기 직전 백호광객이 먼저 주인을 호출했다.
“주인장! 술 떨어졌다!”
주인이 한숨을 쉬며 만류했다.
“그만 드시지요? 방금 술 한 병 또 비우지 않았습니까?”
“뭔 소리! 자고로 술은 엎어질 때까지 마셔야지. 얼른 가져와!”
백호광객이 빈 술병을 흔드는 모습이 꽤 정신이 없었다. 주인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다시 술병을 갖다 놓았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이봐! 내가 술값 안 낼 것 같아서 그러는 거지? 걱정하지 말라니까. 동생들이 온다고! 지금 바로 저 문을 열고……”
백호광객이 고래고래 소리치는 순간 갑자기 주막 문이 벌컥 열렸다.
“어? 동생들이…… 아니군.”
바로 흥미를 잃어버린 그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번에 들어온 사람들은 모두 다섯이나 됐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하고 남루한 옷차림에다 어깨에 도끼까지 든 모습이 영락없는 산적이었다.
그들을 접한 주인장의 안면이 얼어붙었다.
‘하아! 오늘 진짜 재수 옴 붙었구나. 저놈들이 또 나타나다니.’
지금 들어온 다섯 장한은 일대를 누비며 노략질을 일삼는 산적이었다. 그들은 야간에 도적질하다 심심하면 이곳에 와서 끼니와 술을 해결하곤 했다. 당연히 돈을 내지 않았기에 주인은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장! 술 가져와라!”
다섯 산적이 주막 중앙을 차지하고 본격적으로 대작을 시작했다.
주석하와 도수는 시끄러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눈을 찌푸렸다.
“저것들 산적 같지?”
“그렇지. 산적 맞네.”
도수의 대답에 주석하는 흥미를 잃고 다시 젓가락질했다. 흑검문도 흑도 문파니 산적이 모인 산채랑은 그래도 동류 아닌가. 굳이 시끄럽다고 나무랄 생각이 사라졌다. 게다가 인상을 보니…… 호락호락할 것 같지도 않고.
식탁에 술과 요리를 연신 배달하며 한숨을 쉬는 주인장을 발견한 백호광객이 물었다.
“주인장! 저 자식들은 술값 내나?”
“안 내는데…… 왜 그러십니까?”
“왜 안 내지? 단골이라 그런가?”
“그게…….”
“사람 차별해? 내가 만만해 보여?”
말문이 막힌 주인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산적 때문에 이 장한마저 술값을 내지 않겠다고 오리발을 내밀 것 같아서다. 지금 이 장한은 오늘 하루가 아니라 며칠째 밀리고 있으니 정말 안 내고 가버리면 타격이 너무 컸다.
털북숭이 백호광객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내가 받아줄까?”
주인장이 보기에 이 장한도 하얀 옷을 입은 것만 빼면 산적과 별 차이 없었다. 행동이나 모습이나.
“괜찮습니다.”
위험을 느낀 주인이 재빨리 그를 만류했다.
“어허, 내가 해결해준다니까! 그래도 내가 강호에서 알아주는 협사 아닌가!”
주인은 조금 전 장한이 밝혔던 별호를 떠올렸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든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주인은 적극 백호광객을 만류했다.
하지만 이미 술에 취한 백호광객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쾅!
성큼 걸어간 백호광객이 산적들이 앉은 탁자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쳤다.
“이 새끼 뭐야?”
산적들이 흉흉한 살기를 뿜으며 백호광객을 노려봤다.
“나? 으하하하! 정의의 협사다! 돈을 내야지. 돈!”
“어? 네놈도 강도냐?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이 자식아! 돈 내라고! 돈!”
“아! 머리 돌겠네. 야! 주인장! 네놈이 꼰질렀냐?”
산적들의 눈총이 주인에게로 넘어갔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주인은 재빨리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설사 오늘 산적들이 물러가더라도 저 장한이 사라지면 다시 와서 보복할 것 아닌가.
“으하하! 산적이면 안 내도 되는 법 있냐?”
당신도 돈을 안 내고 있다고 주인이 내심 중얼거리는 찰나 백호광객이 호기를 부리며 탁자를 걷어찼다.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이 와르르 무너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산적들이 벌떡 일어나 도끼를 찾았다.
“이 새끼! 너 밖으로 나와라!”
산적 다섯이 무기를 집어 들고 백호광객에게 따라 나오라고 손짓했다.
주인은 간신히 안도했다. 저들이 주막 안에서 난동을 부리면 끝장이다. 기물이 파손되고 집이 무너지면 손해가 막심하다. 술값과 집값은 비교 불가 아닌가. 그나마 밖에서 저들끼리 지지고 볶으면 그나마 낫다.
‘으으, 얼른 나가라고!’
주인이 내심 신음을 토하며 백호광객을 눈으로 떠밀고 있을 때였다.
백호광객이 탁자에 놓아둔 검을 확 뽑으며 몸을 날렸다.
“으하하! 이것들이 어딜 도망가!”
밖으로 나오라는 행동을 도망가는 것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우당탕!
“내가 술 취했다고 착각하나 본데!”
백호광객의 몸놀림은 날렵했다. 넘어진 탁자를 박차고 허공으로 치솟은 백호광객이 마치 물찬 제비처럼 아래로 검격을 내리꽂았다.
서걱!
얼떨결에 옆으로 피한 산적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순간 검이 꽂힌 탁자가 반 토막 났다.
“허억!”
산적들은 깜짝 놀라 백호광객을 다시 봤다. 단순히 술주정뱅이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놈의 실력이 대단했다. 밖으로 끌고 나가 몇 대 패서 교육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순간 그들은 눈치를 보며 계산을 완료했다. 상대는 술에 취한 한 사람일 뿐이고 그들은 무려 다섯이니 설마 질까.
계산이 선 산적들이 도끼를 휘두르며 백호광객을 덮쳤다.
콰직!
별것 아닐지라도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은 무시무시했다. 산적들도 경륜이 있어 쉽게 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술 취한 백호광객과 어울리며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우당탕!
콰지직!
쿠우웅!
넘어지고 부서지고 쪼개지고…… 난장판이 벌어졌다.
‘으으으!’
사색이 된 주인이 말리지도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을 때 산적 하나가 백호광객의 손에 걸려 날아갔다.
우지직-
산적의 몸이 급기야 주막의 벽을 뚫었다.
“으하하! 이것들이 정의의 협사를 몰라보고!”
백호광객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곧이어 산적들의 도끼에 주막 기둥이 부러져나갔다. 백호광객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면서 주막은 점점 그 형체를 잃어갔다.
“으으, 난 망했어!”
얼이 빠진 주인의 안색이 푸르죽죽 변했다.
급기야…… 견디지 못한 주막이 풀썩 무너져 내렸다.
“으아아!”
한쪽에서 밥을 먹던 주석하와 도수에게도 그 여파가 미쳤다. 떨어져 내리던 각종 건자재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밥 먹기를 포기하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하아! 밥 먹기 진짜 힘드네.”
“우아아아! 말이 안 통하는 무식한 놈들!”
한탄하던 주석하와 도수가 다시 중심을 잡았을 때 백호광객과 산적들은 무너진 주막을 누비며 계속 싸우고 있었다.
“크윽!”
마침내 싸움의 우열이 가려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산적들은 백호광객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둘은 백호광객의 검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다른 둘은 무너진 지붕에 깔려 신음을 토했다. 마지막 한 녀석만 간신히 도끼를 휘두르며 백호광객에게 용감히 대처하고 있었지만…….
쿠당탕!
마지막 남은 산적이 피 분수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피를 덮어쓰고 헉헉대면서 백호광객이 주인을 불렀다.
“으하하하! 주인장! 술값 받아라! 내가 처리해 줬으니 난 공짜 맞지?”
호탕하게 웃는 백호광객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진 주석하는 주인을 찾았다.
주인이 어디로 갔지? 주인도 무사하지 못했다. 무너진 벽에 깔려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주인을 찾던 백호광객의 눈길이 주석하를 향했다.
“어? 네놈들 뭐야? 산적 아들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