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백호광객 (3)
시커먼 옷을 입은 두 사람은 영락없이 산적 사촌쯤 되어 보였다.
백호광객이 다시 검을 곤두세우고 그들에게 걸어왔다.
“아직도 산적 놈이 남았구나!”
주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장한은 술에 취해 판단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도수를 힐끔 살폈다. 아무리 동태 눈이라도 어떻게 그들을 산적과 혼동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다 도수의 얼굴을 보고 나니 변명이 사라졌다.
“난 산적이 아닌데?”
“으하하! 거짓말 마라! 내 눈에 띈 놈은 전부 아니라고 우겼다!”
백호광객의 검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왔다. 정말 눈에 뵈는 게 없는 막무가내였다.
주석하가 피하기도 전에 도수가 먼저 검을 들고 공격을 막았다.
챙!
양쪽의 검이 격렬하게 부딪히자 힘을 이기지 못한 도수가 주르륵 뒤로 밀렸다. 반면 백호광객은 튕겨 나간 검을 돌려 곧바로 그들을 찔러왔다.
무공에서 백호광객의 월등한 우세가 바로 입증됐다.
열 받은 도수가 재빨리 태세를 가다듬었다. 두 사람이 초식을 주고받기를 몇 차례, 도수가 휘청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대단한 자다!”
주석하는 백호광객을 노려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비록 도수가 절세고수는 아니지만 강호에서 흔히 만날 삼류는 아니었다. 이런 주막에서 도수를 능가하는 자를 만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가까스로 잡다한 무더기에서 빠져나온 주인이 울상이 되어 신세를 한탄했다.
“난 망했어! 으흐흑! 망했어.”
주막이 반파되고 몸도 다쳤으니 주인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했다. 정작 이 사태를 벌인 장한은 아직도 제정신이 아니니 할 말을 잃었다.
주인의 심정을 이해한 주석하는 분노를 불태웠다. 본인은 대의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저 장한은 실제로는 주인의 앞날을 완전히 망쳐버린 셈이었다.
호기롭게 덤빈 도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밀렸다.
“으하하, 산적 놈이 제법이구나!”
백호광객은 다 이긴 것처럼 무지막지하게 도수를 몰아붙였다. 그 바람에 주막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도수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고 생각한 주석하는 조심스럽게 내력을 끌어올렸다.
남궁천에게 도움을 받은 뒤로 이제는 목숨의 위험이 없어도 내력을 일부 끌어올릴 수 있게 됐다. 물론 아직 자유자재로 운기되는 것은 아니나 예전과 비교하면 괄목상대했다고 볼 수 있었다.
‘끙!’
단전에서 슬금슬금 감이 왔다. 마치 호랑이가 잠이 깨는 것처럼 묵직한 감이 느껴졌다.
정신없이 도수를 밀어붙이던 백호광객의 눈에 옆에서 딴짓하는 주석하가 보였다.
“으하하! 이 자식은 뭐야!”
백호광객의 검이 방향을 틀어 주석하의 어깨로 날아왔다.
“헉!”
주석하는 다급한 비명과 함께 상체를 틀었다. 불의의 기습이라 완전히 피하지 못한 데다 백호광객의 무공 수준이 그의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어깨를 스치듯 지나간 백호광객의 검이 바로 허공을 선회하며 재차 주석하의 목을 겨냥해서 들어왔다.
주석하는 검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뚝!
그의 검이 부러졌다. 역시 진기가 주입되지 않은 검은 싸구려 티를 그대로 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부러진 검을 보고 있자니 백호광객이 미친 듯 포효를 질렀다.
“으하하! 빌빌한 놈! 검이 없으면 나도 맨손으로 상대해주마!”
그를 만만하게 본 백호광객이 검을 던지고 주석하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백호광객의 손이 번개처럼 주석하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백호광객은 과연 고수였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흡사 목을 찍어 버릴 듯 압박했다.
“커윽!”
목이 졸리자 주석하는 백호광객의 손목을 붙잡으며 신음을 토했다.
“히, 힘이 대단하구나! 하지만 그 정도로 될까?”
주석하의 반응에 백호광객은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을 터트렸다. 수십 년간 강호를 누비면서 무공에 자신감이 붙은 탓이다. 눈앞에 보이는 이 어린 녀석은 그가 전력을 다하면 언제든 죽일 수 있다. 허약한 산적 나부랭이니까.
주석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처음에는 이놈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냥 술주정뱅이였으니까. 그런데 이놈은 그를 공격했고 지금도 목을 졸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부근에 쓰러진 산적들이 녀석의 의도를 말해준다. 녀석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면 그도 산적처럼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상대의 목숨을 노리면 자신의 목숨도 내놓아야 하는 법. 게다가 녀석의 언행으로 보아 강호를 전전하며 협사라고 떠벌리고 다닌 듯한데……. 주석하는 전생에서 저렇게 가면을 쓴 정파 인사를 무수히 많이 보았었다.
그는 이자와 은원이 없다. 무고한 자를 죽이는 이런 놈은 살려둘 가치가 없다.
주석하는 목을 조르는 녀석의 손을 붙잡았다. 목에 통증에 가해지자 운기 가능한 내공 외에 잠자던 다른 내공마저 활성화됐다.
아무리 백호광객이라지만 주석하의 내공을 견딜 리 없었다.
우드드득-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으아아악!”
백호광객의 손가락이 찢겨나갔다. 경악한 백호광객의 고통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두두둑-
가공할 주석하의 힘에 백호광객의 어깻죽지가 찢어져 피투성이가 됐다. 그리고 녀석의 사지가 하나하나 찢겨나갔다.
“끄으으윽-”
마침내 생기를 잃은 몸이 축 늘어졌다.
“별것도 아닌 놈이…….”
주석하는 피투성이가 된 녀석의 몸을 한쪽으로 던졌다. 백호광객의 시신이 무너진 집 무더기에 처박혔다.
상대를 죽였으나 기분이 개운하지 않다.
한쪽 옆에 도수와 망연자실한 주인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으흐흑, 난 망했어…….”
주인은 무너진 주막을 둘러보며 흐느꼈다.
주석하라고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가진 돈도 없었고 부자도 아니었다. 사실 그도 피해자였다. 밥을 다 먹지 못한 데다 오늘 잠잘 장소도 사라져버렸으니.
“저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모,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듣긴 한 것 같은데…….”
주인은 백호광객이란 별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도수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누구긴…… 미친놈이지. 아, 우리가 만날 그 자식도 이름에 ‘미친놈’이라고 쓰여 있구나.”
정작 주석하나 도수는 방금 죽인 이 장한이 목표로 삼았던 백호광객임을 꿈에도 몰랐다.
“하아, 죽겠군. 오늘 밤도 노숙이네.”
주석하는 도수를 떠밀며 길을 떠났다. 이곳에 있어 봐야 주인을 도울 방법도 없고 시체와 함께 있으면 속만 어지럽다.
“으아아! 내가 작살내야 했는데!”
도수가 투덜대며 뒤를 따라갔다.
**
계곡을 타고 넘어오는 길목에 커다란 나무가 서 있었다.
주석하와 도수는 그 나무 위에 올라가 계곡을 뱀처럼 휘감은 길을 보며 대기했다. 가끔 오가는 상인이 있었으나 두 사람이 기다리는 백호광객과 소화자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암, 빨리 오면 얼마나 좋아…….”
주석하는 나무 위에서 하품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래서야 졸다가 나무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
“원래 자객의 업무란 이런 거야. 끊임없는 기다림! 절묘한 순간의 포착!”
“으응?”
“이 과정을 견디면 훌륭한 자객으로 거듭나지. 좀 배워라!”
도수가 주석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말을 듣고 보니 지금 그들이 하는 일이 자객의 일상이었다. 숨어 있다가 목표물이 나타나면 바로 목을 베는. 언제 이렇게 자객이 된 거지?
도수 옆에 있으니 점점 닮아가는 건가.
따뜻한 햇볕 아래라 잠이 쏟아졌다. 잠을 깨려고 몇 차례나 도수를 툭툭 치며 정신을 붙들고 있을 때 저쪽에서 한 노인이 걸어왔다. 옷차림이 영락없는 도인 차림새다. 희고 검은 수염에 주름이 희끗희끗한 얼굴이 나이가 대략 이순임을 알렸다.
“석하! 정신 차려. 비슷한 놈 나타났다.”
목표물인 백호광객과 소화자 가운데 소화자는 화산파 출신이다. 화산은 도를 추구하니 지금 저 도인은 소화자일 가능성이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기다려야지. 한방에 해치울 기회.”
그런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았으나 어쨌든 선배 자객의 말이니 따라야 한다.
설렁설렁 길을 따라오던 노인이 햇빛이 부담스러웠던 듯 그들이 숨은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에혀, 인생이 고달프구나. 팔다리도 쑤시고…….”
노인의 청승이 시작됐다.
“기회 아니야? 지금 바로 공격하면…….”
기회를 엿보던 주석하가 전의를 불태웠다.
정작 도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대쪽 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길 반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 자객의 경험은 무시할 수 없다.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모두 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주석하는 정체를 바로 깨달았다. 그들은 백호문도와 동일한 복장이었다.
백의를 입은 한 사람이 노인에게 인사했다.
“혹시 소화자 어르신 아니십니까?”
“흘흘, 그렇네만. 예의 바른 그대는 누군고?”
놀랍게도 도수가 예상한 대로 노인은 소화자였고 그들이 노리던 인물이었다.
“저희는 백호문 제자입니다. 백호광객 사백님을 모시러 가고 있습니다.”
“흘흘, 그래? 과연 정파답게 예의가 발라. 근데 우리 애들은 대체 뭐 하는 거야? 내가 그 먼 덕양까지 가는데 마중도 안 나와. 그래, 백호광객은 만났나?”
“그게…… 약속한 객잔이 무너져서…… 지금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흘흘, 정성을 다하면 만나는 법이지.”
“저희 사백님 못 보셨지요?”
“흘흘, 본 적 없네.”
그들의 대화를 들은 주석하는 백호광객도 부근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저놈들을 따라다니면 백호광객을 쉽게 만날 수 있으려나? 아니, 지금은 눈앞의 소화자부터 처리해야 할 때다.
한동안 대화를 나누던 백호문도들이 다시 갈 길을 떠나고 나무 아래에는 소화자만 남았다.
주석하는 다시 도수와 눈빛을 교환했다.
‘지금 해치울까?’
사람이 없는 야산의 길목에서 소화자를 제거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소화자가 화산파 문하라 무공이 제법이라지만 정상급 살수인 도수가 기습하면 피하기 어렵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자신이 있지 않은가.
도수의 긍정적인 눈빛을 읽은 주석하는 나무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소화자가 다시 길을 떠나려고 일어서는 순간 도수가 먼저 공격할 것이다.
턱!
그때 갑자기 도수가 주석하의 팔을 잡고 만류했다.
“응?”
“누가 오고 있어.”
또 누가 방해를 한단 말인가. 내심 누군지 모를 그자를 욕하면서 시선을 돌리는 순간 주석하는 고개를 넘어 이쪽으로 다가오는 세 인물을 발견했다.
“허억!”
자칫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 세 인물은 주석하가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빨갛고, 하얗고, 검은 세 인물. 게다가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그야말로 천하절색이다. 바로 우설금 일행 아닌가.
순간 주석하는 적혈방의 기습을 호신강기 벽으로 막아내던 우설금의 가공할 무위를 떠올렸다. 단전의 내공 일부를 다룰 수 있게 된 지금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절대 무위였다.
‘우설금이 이곳에 왜 나타났지?’
이상하게도 우설금과 자주 엮인다. 이건 명을 재촉하는 일인데……. 어쨌든 지금은 그런 문제를 따질 겨를이 없다. 괜히 그녀의 주의를 끌면 피곤해지니까.
다가오던 우설금 일행이 길가에 우뚝 솟은 울창한 나무를 발견하고는 햇빛을 피하고자 그늘진 곳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그곳에는 이미 소화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 밑동을 두고 반대편에 우설금 일행이 자리 잡았다.
졸지에 아래쪽에 소화자와 우설금이 쉬게 되자 주석하는 나무 위에서 꼼짝 못 하고 아래쪽 동정만 살폈다. 뭔가 이상하게 엮이는 기분이다.
소화자가 뒤쪽을 힐끔거리며 우설금에게 관심을 보였다. 꼼지락거리면서 우설금의 얼굴을 연신 쳐다보는 소화자의 입이 더할 나위 없을 만큼 크게 벌어졌다.
“흘흘, 소저는 뉘신가?”